조선후기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심원록(尋院錄)
자료적 가치
서원은 양반이라면 방문하고 싶은, 또 방문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새로 도임한 관찰사, 고을 및 인근 고을의 수령·察訪·都事 등도 서원에 알묘하고 부조하였다. 지방관들뿐만 아니라 소·대과에 급제한 사람들도 新恩 인사, 전직관료, 유학 등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서원에 들러 알묘하고 갔다. 후손·방손·外裔들도 끊임없이 서원을 방문하였다.
바로 심원록은 서원 방문자들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이다. 심원록은 임원록과 함께 서원에서 중요히 취급했던 문서로 그 등재 여부도 엄격히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심원록 표지에 本官 士人・서얼・中人은 勿書, 표제 인물・鄕員・本府人은 疊書한다는 문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色目이 判異하면 이름을 기재하더라도 인위적인 삭제를 가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서원 방문자들의 심원록 작성은 상식화 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참배 후 본관・이름・관직・字・날짜・방문목적・기타 등의 내용을 적는다.
현재 옥동서원에 현전하는 심원록은 모두 9책으로 본 자료는 그 중 하나로 작성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며 서원을 방문한 195명의 명단이다. 기재 방식은 위에 언급한 방식과 유사하며 동행자, 방문 소회를 담은 詩는 찾아 볼 수 없다. 서원 방문의 목적은 참배가 주된 이유이며, 帶恩·지방관의 내방 사실도 확인 된다.
이들 방문자들을 그 인원과 성관을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長水 黃 55명, 昌寧 成 10명, 豊壤 趙 8명, 南陽 洪·恩津 宋 각6명, 光州 盧·全州 李 각 5명, 開城 高·光山 金·密陽 朴·安東 權·沃川 全·義城 金·晉山 姜 각4명, 星山 李·玉山 張·仁同 張·眞城 李 각 3명, 慶州 李·潘南 朴·商山 金·星山 呂·永山 金·全義 李·晉陽 柳·鄭氏·靑松 沈·坡平 尹·韓山 李·陜川 李 각 2명, 慶州 盧·慶州 孫·管城 全·廣州 李·南原 尹·同福 吳·聞韶 金·碧珍 李·寶城 吳·鳳城 張·盆城 許·善山 金·宣城 金·順天 金·安東 金·楊州 趙·驪興 閔·延安 李·延日 鄭·完山 崔·蔚山 金·柳氏·完山 李·李氏·仁川 李·全州 朴·濟州 高·晉陽 鄭·昌寧 曺·昌原 黃·平山 申·豊基 黃·豊山 洪·海州 鄭·黃氏·興陽 李 각 1명 순이다.
72개의 성관 중 황희의 후손인 장수황씨 가문의 비율이 상당이 높으며 창녕성씨·풍양조씨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창녕성씨는 상주지역을 대표했던 노론계 가문이다. 이 가문은 花潭·牛栗 문인 成灠이 1592년(선조 24) 이후 장모 인동장씨를 모시고 처향 상주 水回村에 移居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되며 바로 그 후손들이 이 지역 내 세거하였다. 풍양조씨는 15세기 이주한 가문으로 낙동 주변에 정착했으며, 趙光璧·趙靖·趙翊·趙榮遠 등의 인사들을 배출한 상주의 명문가이다. 한편 방문자들의 거주지는 상주가 절대적이며 龍潭·聞慶 등 인근 고을이다.
자료 내 중요 인물에 대해서는 표점을 찍어 구분했는데 吳承鉉·高允相·趙在元·金圭錫·高夢洙·李源祚·黃峻老·盧鎭岐·盧德奎·洪祐昌·趙在一·李鍾善·張晉遠·李尙秊·黃起源·朴鳳煥·趙萬淳·盧恒敬·張箕遠·金錫倫·高基升·高水+式·金庸源·李敦煜·黃漢植·趙昇衍·李基一·黃義健·鄭淳采·洪大原 등이 그 대상이다. 대다수 생원·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한 자들로 거주지는 상주 내지 인근 고을이 많다.
이중 주목되는 인물은 단연 1830년(순조 30) 8월 19일 방문한 李源祚이다. 그는 상주를 대표하던 立齋 鄭宗魯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809년(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후 1837년(헌종 3) 正言으로서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극간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과 공조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당시에는 관직 진출 전 정종로에게 수학하던 시기로 보인다. 또한 예조·형조판서를 역임한 노론계 洪祐昌의 경우 부친 洪翰周가 상주목사를 재직하던 당시 서원을 방문했고, 유년시절부터 총명하여 약관에 문명을 떨치며, 이조정랑·사헌부장령·通禮院右通禮·宗簿寺正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黃起源은 황희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방문하였다.
문집 내 옥동서원 방문 기록을 남긴 高基升은 1880년(고종 17)은 문과 급제를 기념하기 위해 방문해서 「七月望日遊玉洞淸越樓」·「玉洞淸越樓三十人會話」를 남겼다.
또한 상주목사로 심원록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李晩綏와 閔種烈 2명이다. 특히 1898년 4월 초4일 방문한 민종열은 옥동서원 院宇 重修 차 방문했고 다음해 중수 기문을 직접 지었다. 그는 목사 재직 시 상주향교 운영 절목을 제정했고, 「尙州事例」를 지어 당시 상주 사정과 목민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기록해 두었다. 상주사례 내 대원군 훼철 당하지 않은 옥동서원과 興巖書院에 대한 관리 기록이 적혀있다. 그래서 현재 총 5기의 선정비가 상주지역에 세워져 있다.
옥동서원은 이 서원은 고종 연간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있었던 전국적인 서원 훼철령에도 제외된 미훼철 祠宇 47개소 중 하나로 그 원형을 보존하였다. 방문객 비율이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장수황씨 가문이 높았고, 지방관 방문 등 상주지역 내 어느 정도 위상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심원록 분석은 그 서원의 위상을 반영하는 일정한 窓이 될 수 있는데 본 자료를 통해서 옥동서원이 사액받기 이전 대외 인적 네트워크 파악에 일정한 의의가 있다. 또한 옥동서원의 학맥과 인맥, 정치적 성향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高基升, 恁堂集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尋院錄』을 통해 본 18세기 전반 陶山書院의 방문과 그 의미」『퇴계학과 유교문화』 53, 김명자,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