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정묘년 8월 慶尙道 玄風縣 道東書院이 보유하고 있던 儒生 院屬의 성명을 기록해 놓은 명부
丁卯八月 日 道東儒生案
자료의 내용
조선후기 정묘년 8월 慶尙道 玄風縣 소재 道東書院의 儒生案으로 표제는 「丁卯八月 日 道東儒生案」이다. 이 자료의 표제는 ‘儒生案’이나, 실제 기재된 사람들은 정묘년 8월 당시 도동서원이 보유하고 있던 院屬들이다. 원속은 서원에 소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일정한 物力을 바치는 良人을 뜻한다. 현재 도동서원에는 보유 원속의 명부인 여러 종의 유생안·募入案·資費案·院生案이 전하고 있다.
「정묘8월 일 도동유생안」에는 모두 35명의 원속이 수록되어 있다. 명부는 세 군데로 나누어 각각 10명·20명·5명이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 명부 앞에는 ‘完文’이라는 글자가 기재되어 있으나, 그 경위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원속 중 車今錄의 성명 아래에는 ‘故’라는 글자가 부기되어 있는데, 본 유생안이 작성된 후 어느 시점 도동서원 측이 보유 원속을 점검하는 가운데 기재한 듯하다. 자료 말미에는 도동서원 측의 원속 보유를 승인하는 玄風縣監의 着官과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서원의 경제적 기반 가운데 하나인 원속의 존재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원속은 자신이 속한 서원에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일정량이 물력을 바치는 양인이며, 그 대가로 국가에 져야 하는 軍役을 면제받았다. 서원 입장에서 원속의 증가는 재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에 17세기 이후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한 노비 대신 원속을 확보해 나감으로써, 서원 재정을 확충해 나갔던 것이다. 반면, 양인들은 원속이 상대적 歇役이었기에, 원속 입속을 통해 피역을 도모하였다. 또한 원속 입속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도동서원에는 자비안·모입안이라는 원속 명부도 있으나, 원생안·유생안이라 불리는 원속 명부도 전한다. 이 가운데 원생안과 유생안은 원속 입속을 통해 신분 상승의 도모하던 양인들의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명부로 여겨진다. 실제 본 「정묘8월 일 도동유생안」에 수록된 徐時業은 도동서원의 원생안에 수록된 인물인데, 정묘년에는 유생으로 분류되어 있다. 도동서원 측도 서시업과 같은 양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서원에서의 실질적인 대우는 다르나 유생이라 호칭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원과 양인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존재한 원속의 증가는 조선후기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를 초래하였다. 피역자가 증가함으로써 군액이 감소하였고, 국가 재정이 악화되어 갔던 것이다. 더구나 피역자의 증가로 인해, 다른 양인의 군역이 가중되어 軍政의 문란을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는 서원의 격에 따라 원속의 수를 제한하거나, 법으로 원속의 정원을 규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