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병술년 10월 慶尙道 玄風縣 道東書院이 보유하고 있던 院生 院屬의 성명을 기록해 놓은 명부
丙戌十月 日 道東書院院生案
자료의 내용
조선후기 병술년 10월 慶尙道 玄風縣 소재 道東書院의 院生案으로 표제는 「丙戌十月 日 道東書院院生案」이다. 이 자료의 표제는 ‘院生案’이나, 실제 기재된 사람들은 병술년 10월 당시 도동서원이 보유하고 있던 院屬들이다. 원속은 서원에 소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일정한 物力을 바치는 대신 軍役을 면제받는 良人을 뜻한다. 현재 도동서원에는 본 자료를 비롯해 모두 7책의 원생안과 募入案·資費案·儒生案이란 제목으로 엮여진 여러 종의 원속안이 전하고 있다. 「병술10월 일 도동서원원생안」은 크게 원생 원속의 명부, 完文, 그리고 도동서원 측의 원속 보유를 승인하는 玄風縣監의 着官과 署押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병술10월 일 도동서원원생안」에 기재된 원생 원속은 21명이다. 그런데 앞선 18명과 달리 명부 말미에 수록된 3명은 추가로 기재된 듯하다. 또한 3명 가운데 葛達秀는 ‘儒生入案次’라는 명기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도동서원에서는 원속을 원생 또는 유생이라고도 지칭했던 것으로 보아, 원속 입속이 단순히 피역의 목적을 넘어서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앞선 18명 중 4명의 성명 아래에는 ‘故’라는 부기가 있다. 이는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 도동서원 측이 원속을 점검하면서 사망한 원속 성명 아래에 부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같이 사고가 발생한 원속에 대해서는 代定의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부 다음에는 4개조의 節目으로 구성된 完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완문은 본 자료에서 도동서원 측이 원속을 원생이라 지칭한 연유를 대략적으로 보여준다. 4개조의 절목에 앞서 본 완문이 작성된 사유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官의 侵犯 때문이었다. 이에 따르면 도동서원에는 원래 원생이 있는데, 새로 서원에 入院한 新進士子를 지칭하며, 서원을 扶護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에 원생이 많이 없어져, 서원 有司가 籩豆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三稅와 公納 때문에 관에서 원생을 侵逼해 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도동서원 측은 관의 원생 침핍을 막기 위하여 4개조의 절목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절목 4개조는 첫째, 院生의 명부를 작성한 뒤 踏印하여 準考 자료로 삼을 것, 둘째, 護院生은 본 서원을 받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檢督의 名色으로 절대 그들을 침범하지 말 것, 셋째, 본 고을의 이서 무리들 또한 이 規式을 경계하고 따를 것, 넷째, 원생 또한 儒者이니, 때때로 儀禮를 講習할 것이며, 이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서원의 경제적 기반 가운데 원속의 존재 양상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원속은 서원에 소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일정량의 물력을 바치던 양인이었다. 또한 이들은 원속으로 입속하는 대신 군역을 면제받기도 했다. 원속은 시대·자료·서원에 따라 仰屬·投屬·募入·資費·원생·守直軍·下典·匠人 등 다양하게 지칭되었다. 그런데 본 자료에서 원속은 원생이라 표시되어 있으며, 절목에는 원생도 ‘儒者’라고 하였다. 이는 피역의 목적뿐만 아니라, 원속 투속을 신분 상승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원속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절목에 이들을 ‘護院生’이라고 표기한 것이며, 실제로는 籩豆의 의무, 즉 도동서원에서 거행되는 각종 의례의 재용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한편, 서원 원속의 증가는 여러 문제를 초래하였다. 대체로 17세기 이후, 노비의 가치 하락에 따라, 각 서원들도 노비대신 원속을 점유해 나감으로써 원속의 수는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상대적 歇役인 원속으로 피역함에 따라, 軍額이 감소하고 국가 재정이 악화되는 문제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원속의 피역 문제는 다른 양인에게 군역을 전가시킴으로써, 軍政 문란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서원의 격에 따라 원속의 수를 제한하거나, 그 정원을 법으로 규정하기도 했지만, 상당수의 서원들이 규정 외이 원속을 불법적으로 점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방지해야 하는 지방관은 서원의 장려가 守令考課의 ‘興學校’ 및 지역 재지사족의 위무와 관련되어 있어, 서원의 원속 점유를 묵인하기도 했다. 본 자료의 절목에 따르면 현풍현은 三稅와 公納, 즉 부세의 확충을 위해 도동서원이 점유하고 있던 원속을 침범한 사실이 나타난다. 이에 도동서원 측은 현풍현감에서 청원하여, 원속의 침범을 금지하는 본 완문을 발급받았다. 여기에는 도동서원이 文廟從祀者를 배향한 賜額書院이라는 사회적 위상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