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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예안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907.0000-20170630.Y17510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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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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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산서원, 옥산서원
작성시기 1907
형태사항 크기: 102 X 87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907년 예안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1907년 10월 24일에 도산서원에서 옥산서원으로 손씨들이 멋대로 ‘연원’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질타하고, 두 가문이 분쟁을 조정하여 원만히 시비가 해결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통문이다. 본문을 보면 도산서원은 동강서원의 상량문과 관련된 일을 일찍이 경험하고는 통열히 분별하여 엄하게 배척하였다고 한다. 다만 생각건대 잘못을 바로잡은 것을 천천히 새겨 고치고 또한 억지로 하는 것이 어려운 바가 있기에 기다렸는데, 시대가 바뀌어 사세가 변하였으니 잠에서 깨어나듯이 손씨가 그 일에서 벗어나는 바가 있었다고 했다. 지금 옥산서원의 말씀을 받고서 손씨의 문자가 미치는 것을 막은 것이 옥산서원이라는 것과 상량문의 글은 대산이 이미 실수하였다 인정하여 수정한 것을 되돌려 수정 전 글을 증거로 하여서, 다시 『실기』를 간행하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차례대로 결정 난 것을 따짐으로써 서로 격하게 대립하고, 손씨들이 기존의 글을 변환하는 것이 심한 까닭에 이러한 말에 대하여 조사한 것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손씨들이 고집이 세고 어리석어서 발송한 것을 물리치고, 생각을 굳히고는 반드시 공의에 힘써 저항하고자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나아가 저 손씨은 동강서원을 자기 가문의 사묘로 보고 지었고, 『실기』한 책은 자기 가문의 사사로운 문자로 파악하고 지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렇기에 오직 뜻을 모아서 고치는 것만이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손씨들이 생각한다고 도산서원은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진실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도산서원은 우리 도학상에서 ‘연원’의 두 글자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마음대로 손씨들이 직접 그러한 어수선함을 일으키고 세계를 나누는 것은 옳지 않으며, 우리 무리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 측에 미혹한 것을 지적하고, 미혹한 것을 깨우쳐서 같은 동네에서의 일이 올바르게 조정되어 돌아갈 수 있도록 힘써주길 당부하였다. 만약 손씨들이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여 사사로이 자기 마음대로 고치려고 하더라도 즉시 결단하여 사림의 뜻으로 공포하지 말고, 먼저 윗사람으로써 가르침을 주신다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사림 전체의 문제로 시비가 커진다면 다 가문의 관계가 더욱 회복하기 어려워질 것이며, 특히 두 가문의 시비에 퇴계의 후손 3명이 연루되었기에 도산서원의 입장도 매우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7년 10월 24일에 陶山書院에서 玉山書院으로 孫氏들이 멋대로 ‘淵源’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질타하고, 두 가문이 분쟁을 조정하여 원만히 시비가 해결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통문
1907년 10월 24일에 陶山書院에서 玉山書院으로 孫氏들이 멋대로 ‘淵源’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질타하고, 두 가문이 분쟁을 조정하여 원만히 시비가 해결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통문이다. 본문을 보면 도산서원은 東江書院의 상량문과 관련된 일을 일찍이 경험하고는 통열히 분별하여 엄하게 배척하였다고 자신들의 입장을 전제하였다. 그러나 손씨들이 문제가 되었던 상량문을 새로 깎아내는 것을 강제하기 어려워 지켜보는 가운데 시대가 변하여 상황이 반전되었다고 하였다. 도산서원 측은 옥산서원에서 보내온 글을 보고 손씨들이 문제가 되었던 大山 李象靖의 상량문을 수정하기 이전의 것으로 실기를 편찬하면서, 임의로 문구를 변경한 것이 심하여 그에 대하여 자신들이 조사한 것을 발송하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손씨들이 고집이 세고 어리석어서 도산서원이 발송한 것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생각을 굳히고는 사림의 公義에 저항한다고 비판하였다. 나아가 손씨들이 동강서원과 實紀를 자기 가문의 일로 치부하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淵源’이라는 문제는 손씨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서원의 건립과 실기의 편찬 등은 손씨 가문의 조상을 선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모든 사림들과 관련된 부분으로서 사심을 버리고 공의에 따라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도산서원은 손씨들에 대하여 전 사림이 나서서 처벌하는 것 보다는 옥산서원이 나서서 분쟁을 조정하는데 힘쓰고 그래도 실기 편찬을 고집한다면 사림의 뜻을 내세워 다시 가르침을 주되 그 이후 사림에 손씨들의 죄상을 공포하여 처벌하자는 의견을 내고 있다. 즉 도산서원으로서는 孫李是非가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며, 가능하면 두 가문 간에 협의를 통하여 시비가 마무리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손씨들이 실기를 편찬하면서 眞城李氏 3인에게 시와 발문을 받음으로써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내지 驪州李氏들과 불편한 관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입장으로서는 퇴계 후손이 관여되어 있기에 동강서원의 손씨 측을 직접 질타하는 것도 어렵고, 강경한 입장의 옥산서원의 이씨 측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구책에서 이씨의 입장을 옹호하되, 서로 협의하여 완만히 일이 해결되길 바랬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 20세기 초반 영남의 3대 시비 가운데 하나인 손이시비와 관련한 것이다. 시비에 대한 도산서원의 의견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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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東江樑偉之變 鄙等頃嘗痛卞而嚴斥之矣第念肅淸之所旋旋鑿改亦有所難强者容
竢時移事遷從當有脫然得醒之日今承 尊諭幷及孫氏文字之抵 貴院者反以樑偉已失之擧復試於實
紀有若次第勘結者然▣▣相激轉甚故發此語以試之耶抑執迷▣堅必欲力抗公議而然耶噫彼孫氏以
東江一院看作自家私廟實紀一書把作自家私文字則惟意纂改只當任之而已苟非然也吾道上淵源二字何
等重大而任其擾攘於孫氏之手分世界者是豈吾黨之有人云乎哉伏願 僉尊指迷牗惑務歸調停自是同室間
事也彼若膠守謬見私自擅改則以無敢公布士林之意先事警咳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丁未十月二十四日陶山書院上有司李彙寧
齋有司李奎鉉
李彙敦
會員李龜泳
李師性
李老淳
李同淳
金永獻
李彙楨
琴鍾正
李進淳
李彙朝
朴致馥
李存淳
李畊淳
李彙璿
李彙圭
沈國樑
李勉淳
李學魯
李一相
李觀永
南基重
李宗愿
李殷淳
朴致雲
李彙炳
李彙元
李彙冕
金崗翰
李彙升
李彙絅
李彙選
金永耆
李肇淳
李彙益
李彙斌
琴書述
李彙祚
李彙春
朴致陽
李基永
李彙謨
李彙淵
任雲常
安行夏
李彙仁
李彙隣
吳載民
李彙秀
李鏞淳
權宗益
李義淳
任雨常
李初淳
李彙同
南基遠
李彙政
李彙祖
琴翼文
李彙{示+冕}
李晩德
李耆淳
李晩運
李質淳
琴元述
任秉凖
李晩蓍
李中誠
李中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