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906년 경남촌유회소(京南村儒會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906.1111-20170630.Y1751010112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경남촌유회소, 경주향교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종로구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90.5 X 59.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경주향교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906년 경남촌유회소(京南村儒會所) 통문(通文)
1906년 11월 경남촌유회소에서 이병기 등 45명이 연명하여, 손씨측의 입장을 옹호하며 6개 조항의 결의안을 경주향교로 보낸 통문이다. 경남촌유회소 측은 회재가 우재에게서 학문을 전수 받았다는 단서는 회재집 어람본이나 여주이씨 집안에서 나온 장문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대산 이상정이 처음 학문연원을 언급한 이래로 입재 정종로와 같은 선배들도 기존의 퇴계 선생이 말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이상정의 의견을 따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퇴계가 회재의 행장을 쓰면서 학문 연원에 대하여 우재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스스로 도학의 적통을 이었다는 것은 퇴계가 행장을 쓸 당시 모든 자료를 못보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나아가 여주이씨들이 자신들의 힘과 재주로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혹 그들의 잘못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맞서지 못한다고 보았다. 경남촌유회소에서는 6개 조항의 결의문을 만들어 경주향교로 보내면서 향내와 도내에 돌려 알리도록 당부하였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 우재와 회재 양선생의 연원상의 시비는 오로지 김대진의 「정와변록」으로 바로잡을 일. 하나. 가장은 이 이씨의 세고 가운데 문자로 있은 즉 『회재집』에도 마땅히 붙여서 간행해야 할 일. 하나. ‘후학’이라는 2자는 사사로이 첨입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에 이에 숨겨두었다. 본향과 본도로부터 의견을 받아서 글을 정리하여 바로잡을 일 하나. 『우재실기』를 간행하는 전후의 소위 책판을 부수자는 통문은 본향으로부터 일제히 거두어 통문을 낸 곳으로 돌려보낼 일. 하나. 옥산서원은 곧 많은 선비들이 주선하는 곳이다. 근래에 들으니 양동이씨가 보합을 칭하여, 사사로이 멋대로 처단하여 체모에 큰 손상을 주었으니, 본향으로부터 나란히 의논하여 검속하여 문란하는 일에 이르지 않도록 할 일. 하나. 지금 이 통문의 글은 즉시 향교의 종을 붙여서 향촌과 도내에 돌려서 알릴일.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11월 京南村儒會所에서 李炳耆 등 45명이 연명하여, 孫氏측의 입장을 옹호하며 6개 조항의 결의안을 慶州鄕校로 보낸 통문
1906년 11월 京南村儒會所에서 李炳耆 등 45명이 연명하여, 孫氏측의 입장을 옹호하며 6개 조항의 결의안을 慶州鄕校로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여타의 통문과 달리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손씨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 남촌의 유 회소에서 이병기 외에 전·현직 관료들이 연명하여 보내었다. 이들은 통문에서 경주의 손이시비에 대하여 大山 李象靖이 退溪 李滉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처음 발견하고, 晦齋가 愚齋를 제사지내는 글을 근거로 요점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문제가 되는 글들은 오로지 당일에 억측으로 한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선배들이 서술한 바가 점점이 남아있다고 했다. 李晩燾의 跋文에는 이상정 이후 여러 선배들이 회재를 위하여 지은 글에서 모두 원류를 언급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立齋 鄭宗魯의 사례를 들면서 그들이 퇴계를 존경하지 않아서 다른 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퇴계가 회재의 행장을 지을 때에 이 祭文을 보지 못하여서 학문을 전수 받았다는 표현을 안 한 것이라고 했다. 본 통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퇴계의 행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60년 전에 문자를 勘斷하면서 지금의 사태가 다시 일어나서 시끄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가라고 하면서 당시 사실을 왜곡한 것에 대하여 한탄하였다. 그런 가운데 양동이씨가 400년 동안 깊이 보관해오던 家狀을 胄孫이 직접 내놓고, 아울러 간행하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이후 孫海翼, 孫最秀 등의 두 손씨가 분주히 간행을 계획하였으며, 李晩燾·李炳鎬·李晩煃 등 세 명의 진성이씨가 구구절절 흠탄하며 진실로 조상과 존형의 정성을 널리 퍼지게 간행하였다고 명시했다. 그렇기에 여주이씨들이 반대로 강하게 샘을 내어 헐고 꾸짖어 물리치려는 것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기에 지극히 破板하자고 말하는 뜻이 있었다고 보았다. 즉 이씨들이 회재의 연원과 관련한 기존의 설이 바뀌게 되자 강하게 반발하여 전국에 성토하는 통문을 돌렸으며, 종래는 우재실기의 판목을 깨자는 이야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씨들이 스스로의 기량과 힘을 믿고 멋대로 재량하는 것을 서원의 많은 선비들이 함께 지적하고 탓하는 것을 잃고 따르며, 스승의 뜻이라고 신임을 얻고 공평한 것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말한다고 비판하였다. 또 後學이라는 글자의 판본이 있다. 판본이 없다의 실제 증거는 처음 간행한 御覽本에 이미 판본에 없다는 흔적이 분명하게 있으며, 지금 손으로 쓴 글이 현재 나타난 지경에 누가 감히 그 사이에 雌黃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여주이씨들이 사사로이 첨부한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나 알지 못하며, 속히 釐正을 하기 위하여 손씨가 넣은 2字를 毁破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입을 막아서 가두려고 한다고 보았다. 이들이 풍문에 들으니 경주의 여러 군자들은 의리를 갖추어 바르게 보고, 그것을 낮추었다 높였다 취했다 버렸다는 방법은 모두 실제로 보고 있다고 했다. 나아가 그들이 巨室인 여주이씨들에게 반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겨우 남의 불행을 가엾게 여기는 정도라고 했다. 이에 경남촌유회소의 회원들은 6개 조항의 결의안을 지어서 경주와 도내의 사림들이 이를 시행하길 요청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 愚齋와 晦齋 양선생의 淵源上의 시비는 오로지 金岱鎭의 「訂窩卞錄」으로 바로잡을 일. 하나. 家狀은 이 이씨의 世稿 가운데 문자로 있은 즉 『晦齋集』에도 마땅히 붙여서 간행해야 할 일. 하나. 後學이라는 2자는 사사로이 첨입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에 이에 숨겨두었다. 본향과 본도로부터 의견을 받아서 釐正할 일 하나. 『우재실기』를 간행하는 전후의 소위 破板의 통문은 本鄕으로부터 일제히 거두어 통문을 낸 곳으로 돌려보낼 일. 하나. 옥산서원은 곧 많은 선비들이 周旋하는 곳이다. 근래에 들으니 양동이씨가 保合을 칭하여, 사사로이 멋대로 처단하여 체모에 큰 손상을 주었으니, 본향으로부터 나란히 의논하여 檢束하여 문란하는 일에 이르지 않도록 할 일. 하나. 지금 이 통문의 글은 즉시 校隷를 붙여서 향촌과 도내에 돌려서 알릴일. 즉 여주이씨 종가인 무첨당에서 나온 회재의 輓詞 즉 제문을 회재집에도 첨부하고, 경주와 경상도내에서는 後學이라는 글자에 대하여 의논하고 글을 바로 잡고, 우재실기를 파판하자는 통문은 모두 거두어 그것을 발급한 이씨측에 돌려보내며, 옥산서원의 여주이씨들을 단속들을 단속하여 더 이상 문란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경남촌유회소의 통문을 등출하여 경주와 도내에 돌려서 알리라고 했다. 이 통문이 도내에 발송된 것인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다만 경주향교로 왔던 경남촌유회소의 통문이 여주이씨 종가인 무첨당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보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비록 전·현직 관료들이 연명하고 있지만 이미 도내와 타도의 대부분의 여론이 이씨 측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 20세기 초반 영남의 3대 시비 가운데 하나인 손이시비와 관련한 것이다. 여주이씨의 일방적 우세 속에서 전개되었던 시비였지만, 이 통문은 손씨 측을 옹호하는 세력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通文
右敬通事伏以大賢之心目一定亘百世標凖自在後生之尊奉有常非私志絲毫可于今 貴鄕孫李氏是非事以言乎淵源則 大山李先生始得見 退陶所未及見之 晦翁愚翁文據
有的論固非當日臆量且諸先輩所述傡皆班班故己有六十年前勘斷文字則今以此事起鬧更未知有何別樣見識乎至若家狀一款李氏之四百年深藏而不出者其心必有可惜之端今其胄孫
親手出給幷許識刊知是天誘之衷而二孫氏之汲汲謀刊三李氏之節節欽歎亶出於闡祖尊賢之誠而李氏反妬毁詆斥無所不到以至有破板之說意此板果可爲若爾人心斧舌鋒所能容易破去
復有如鑿樑手段者乎李氏從前伎倆自謂有良平賁育之智力者則竊非鄙等湔綿所敢誰何而眞李氏之從而助虐又何義諦也其云何代無之不幸近出等語已失全院多士之所共指斥
其云斟量秤尺服信師旨等語尤非本家僉員之所可擧論始也欲歸其未安之端於先生父老終乃直說其未安之端於不敢言之地實未知果誰有何等大力量大包含也此不覺令人爽膽竪髮而驪李氏
之得負此隅亦足矣又乃從事疎遠夸張聲勢以示其烏敢當我之意者雖是遠交近攻之妙策而在其人則或無鄕隣被髮之惑耶且後學字之本有本無實證昭在初刊之 御覽本旣是本無之跡
而况今手筆現出之地誰敢雌黃於其間哉李氏私添之跡無所逃焉則不知卽速釐正之爲是徒以孫氏二字毁破之說擧重捃摭輒欲遮羅人口掩閣已失者萬不成說豈非欲秘而彌彰者乎仄聞 貴
鄕僉君子具以義理正見其於低昂取舍之道皆有實見而其或有畏熖隨波不能自樹者祗自哀憐而已何足云爾也然驪李氏卽吾東巨室也終不可置諸遂非之科而不謀所以勸勉匡救之誼則雖非鄙等
蔑劣所敢如何而區區悃愊不能自已帖錄如左伏願 僉尊恕其愚而採其誠千萬千萬
愚晦兩先生淵源上是非一以金訂窩卞錄爲正事
一家狀旣是李氏世稿中文字則 晦齋集亦宜附刊事
一後學二字私自添入不可因仍掩置自本鄕本道收議釐正事
一愚齋實紀刊行前後所謂破板通文自本鄕一傡收還于通出處事
玉山書院卽多士周旋之所而近聞良李氏稱以保合私自擅便大損體貌自本鄕齊議檢束無至紊亂事
一今此通章卽付校隷輪告鄕道事
右文通于
慶州鄕校
丙午十一月 日京南村儒會所幼學李炳耆
議官李文和
判事尹庚圭
監役洪藝模
參奉鄭運和
進士洪達周
主事李熙泰
參判姜反馨
敎官趙彦植
郡守申鉉哲
主事丁萬燮
幼學李應達
進士韓養源
參判鄭顯英
主事金履鎬
博士崔在民
參判李明翔
議官丁若臨
承旨金弼鉉
進士蔡丙錫
幼學柳冀樂
承旨丁文燮
主事李浚九
博士李義學
丁大夏
府使洪佑謙
外事局長李建春
參奉李鶴淳
博士李得寧
幼學尹啇鉉
進士趙鍾奭
幼學金啇協
許燮
進士金鎬達
主事韓弼愚
進士金周益
參奉張志永
主事李慶秀
參奉崔英浩
敎官丁奎寅
幼學尹弘淳
蔡正黙
權五永
沈祜慶
許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