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7월 成均館의 東·書·南·北班首가 연명하여, 孫氏를 성토하며 『愚齋實紀』의 還送과 망령된 시와 발문을 지은 李晩燾·李晩煃·李炳鎬 등을 성토하도록 玉山書院으로 보낸 通文
1906년 7월 成均館의 東·書·南·北班首가 연명하여, 孫氏를 성토하며 『愚齋實紀』의 還送과 망령된 시와 발문을 지은 李晩燾·李晩煃·李炳鎬 등을 성토하도록 玉山書院으로 보낸 通文이다.
이 통문은 성균관에서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두 번째 보내는 통문이다. 첫 번째는 1906년 윤4월에 경주향교로 보낸 것이다. 윤4월의 통문에서 성균관은 손씨들이 사사로이 간행한 實紀는 곧장 파판하게 하고, 세 이씨가 망령되게 지은 시와 발문은 신속히 회수하게 하여 斯文에 학문의 연원을 두고 벌이는 시끄럽고 떠들썩한 是非의 弊端을 영원히 막을 것을 요청했었다. 이러한 성균관의 답변에 손씨들이 크게 반발했음은 자명하다. 실제 최고의 귄위를 가진 성균관의 답변을 도내에 돌린 이후 손씨 측에 우호적이었던 곳들이 등을 돌리는 등 손씨들은 더욱 궁지에 몰렸던 것이다. 본 통문에서 경주향교로 보낸 통문이후에 손씨들이 통문을 가지고 와서 서로 맞붙어 맹렬히 공격하며 말하였다는 것은 궁지에 몰린 손씨들이 거세게 반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반발에 대하여 성균관에서는 7월에 이전의 동서반수 만이 연명한 것보다 많은 동서남북의 반수가 연명하여 옥산서원으로 보냈다. 본문에서 자신들이 비록 식견이 부족하지만 오로지 義理만을 기준으로 삼고, 文蹟을 상세히 고찰하여 옳고 그름을 밝혀서 이에 공정한 진술을 발송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사이에 어떠한 의심이나 불만도 가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조사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손씨들의 패습이 더욱 심해지는데 그것은 사대부 가문의 행동거지가 아니라고 질책하였다. 이전 통문에 대한 손씨들의 행위들이 지나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공정하게 사안을 바라보고 판단했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편, 성균관에서는 조사한 바에 따라 향후 대처 방안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즉 도내에 배포한 『우재실기』를 손씨 본가로 되돌려 보내고, 망령된 시와 발문을 지어서 先正을 욕보인 이만도·만규·병호의 세 사람은 일체 성토하여 士氣가 바르게 되도록 요구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전개된 사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손이시비는 1773년(영조 49)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의 廟宇를 重建할 때 大山 李象靖가 작성한 廟宇重建上樑文 속에 회재가 우재의 도맥을 的授했다는 말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회재의 후손인 驪州李氏들은 강력히 항의했고, 그로 인해 이 상량문은 당일로 勘定되어 本家로 돌려보내지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손씨들이 1845년(헌종 11) 『愚齋實紀』를 증보하여 간행하면서 문제의 상량문을 다시 실으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자 이번에도 이씨들은 강력히 반발하며 나섰다. 이씨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鄕內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들을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三溪‧東洛‧洛峰‧南江書院 등에서 이씨들을 지지하는 통문을 보내왔으며, 虎溪書院에서는 양자를 중재하는 통문을 보내왔다.
이후 다시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1904년에 이씨의 宗家인 無忝堂에 所藏되어 있던 『驪江世稿』에서 회재가 우재에 대해 쓴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어 이를 계기로 손씨들이 『景節公實記』를 중간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손씨들은 새롭게 발견된 그 장문과 만사를 실기에 싣는 것은 물론 여기에 추가로 회재의 諱를 쓰고, 또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그 상량문의 ‘淵源道脈’이라는 구절에 附註하고, 이를 근거로 손해익, 손최수 등이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시와 발문을 진성이씨인 이만도, 이만규, 이병호로부터 얻어 싣고 1904년 4월에 배포하였다.
손씨들이 이 실기에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문을 받아 실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손씨들이 의도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씨들은 즉각 인근 향내 14개 문중에 回文하여 옥산서원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씨들은 이 문제가 학문적 연원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단순히 문중 차원의 문제가 아닌 사림 사회의 도맥과 관계된다는 점을 통문을 통해 향내와 도내 사림에 알렸다. 그 결과 이 두 문중 사이의 시비는 초기부터 곧바로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양측 간에 통문을 통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상량문을 쓴 이상정을 배향하는 고산서당에서도 ‘연원도맥’이라는 구절이 잘못된 것으로 손씨들의 처사를 비판하는 통문을 보내오는 등 대부분의 여론은 이씨들에게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시비가 마무리되어갈 쯤에 본 통문에서 말하는 세 이씨, 즉 이만도, 이만규, 이병호로부터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후학’이라고 한 것은 이씨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설이 나왔다. 이러한 설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론에서 수세에 몰린 손씨들은 이를 근거로 이씨들을 압박하려 하였다. 손씨들은 이러한 설을 패지에 담아 각 원사와 문중에 돌리면서 『회재집』을 파판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손씨들의 이러한 행동은 옛날의 잘못된 글을 깨닫지 못하고 세 이씨가 잘못 지은 글을 따른 꼴이 되어버렸다.
호남과 경기, 성균관 등에서 손씨를 성토하는 통문이 도래하고, 특히 성균관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씨들은 이 통문을 즉시 도내 전역에 돌려서 성균관의 통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당초 손씨들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조차 이씨들의 편으로 전향해왔다. 본 통문은 그 이후에 발송된 것으로 처음 발소 이후 3개월 사이에 손씨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 20세기 초반 영남의 3대 시비 가운데 하나인 손이시비와 관련한 것이다. 또한 성균관이 손이시비를 바라보는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