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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호서유생(湖西儒生)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906.0000-20170630.Y17510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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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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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옥산서원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108 X 34.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906년 호서유생(湖西儒生) 통문(通文)
1906년 8월 20일 호서유생 송인헌 등이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우재실기』를 두찬한 손씨들을 성토하고, 손씨를 두둔한 이만도, 이만규, 이병호 등 3인에 대하여 유안에서 삭적하길 요청하는 통문이다. 호서의 유림들은 지금 소문에 경주의 손씨가 회재 선생의 학문이 그 선조인 우재에게 나왔다고 하고, 도맥을 적수했다고 지어 냈는데 근거도 없고, 비교할 글도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손씨들이 방자하게 앞장서서 계승하였다고 변명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만도, 이만규, 이병호가 손씨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 선조의 매우 중요함을 잊고서 ‘후학’이라는 두 글자를 일컬어서 거짓으로 지어냈다고 말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아울러 회재의 학문은 정조가 친히 제문을 지어서 사승의 연유가 없고 직접 민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으며, 퇴계 선생은 연원이라 부를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고 했다. 또한 이것은 사문의 가장 큰 단안으로서 성인이 다시 소생해도 이 말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두 가문의 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사문에 관계되기에 반드시 깨뜨려야하는 것이 명백하다고 했다. 그래서 통문이 도착하는 날에 즉시 옥산서원으로부터 한 목소리로 함께 처벌하여 손씨들과 세명의 이씨를 사적에서 영원히 깍아 내고, 유생의 반열에서 덜어내 버림으로써 사문을 지키고 그릇되고 간사한 말이 없어진다면 천만 다행이겠다고 전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8월 20일 湖西儒生 宋仁憲 등이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愚齋實紀』를 杜撰한 손씨들을 성토하고, 손씨를 두둔한 李晩燾, 李晩煃, 李炳鎬 등 3인에 대하여 儒案에서 削籍하길 요청하는 通文
1906년 8월 20일 湖西儒生 宋仁憲 등이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愚齋實紀』를 杜撰한 손씨들을 성토하고, 손씨를 두둔한 李晩燾, 李晩煃, 李炳鎬 등 3인에 대하여 儒案에서 削籍하길 요청하는 通文이다. 본문을 보면 옛날부터 내려오면서 聖賢이 계속 나셔서 道로써 서로 전하거나 혹은 직접 배워서 그 종통을 얻었다고 했다. 혹은 私淑하여 계통이 떨어진 것을 이었는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자세히 살펴보면 전후에 일관된 법칙이 있으며, 일시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학문 연원과 관련하여 학통을 계승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혹은 서로 마주보고 논의하여 갑작스레 스승에게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하지만 옛날에 孔子가 老子에게 禮에 대하여 질문하거나, 師襄에게 거문고를 배웠다고 공자의 道가 노자나 사양에게 얻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이것은 곧 도통을 자신에게 전수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사사로운 뜻으로 망령되이 윤리가 아니라고 헤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분명한 것은 지금 소문에 경주의 손씨가 회재 선생의 학문이 그들의 선조인 우재에게서 나왔다고 하고, 道脈을 的受했다고 지어 냈는데 근거도 없고 비교할 글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손씨들이 방자하게 앞장서서 계승하였다고 변명하고, 또한 퇴계의 후손인 이만도, 이만규, 이병호 등이 손씨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 先祖의 중요함도 잊고서 ‘後學’이라는 두 글자를 일컬어서 杜撰했다고 말한다고 비판하였다. 나아가 진성이씨 3인이 비록 손씨들의 편을 들고자 하나 ‘후학’이라고 말한 것은 한 세대의 공정한 안목이며, 그것이 어찌하여 백 년 전에 이미 金石으로 새겼겠으며, 어찌하여 破板하는 牌에 이르렀겠는가 반문하였다. 호서의 유생들은 더욱 모골이 송연한 것은 손씨와 퇴계의 후손들이 그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교남의 추노지향에서 이와 같은 일종의 도깨비 무리가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고 있는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의 방자함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호서의 유생들은 회재의 학문 연원에 대하여 오랜 세월 전하지 않던 학문을 스스로 얻음으로써 탁월한 지위를 세워서 도덕으로 존경받고, 백세의 사표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런 까닭에 정조가 친히 제문을 지어서 師承의 연유가 없고 직접 閩洛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하였으며, 퇴계 선생은 淵源이라 부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고 보았다. 또한 이것은 사문의 가장 큰 斷案으로 성인이 다시 소생해도 이 말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저들이 비록 더욱 그들의 선조를 미화하려고 할수록 스스로 선조를 무고하고, 현인을 무고하는 부류에 빠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그 또한 가히 불쌍하다고 했다. 이러한 문자시비는 두 가문의 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사문에 관계되기에 혼란과 한탄이 극에 달하여서 반드시 깨뜨려야하는 것이 명백하다고 보았다. 그런 이유로 호서의 유생들은 통문이 도착하는 날에 즉시 옥산서원에서부터 한 목소리로 함께 처벌하여 손씨들과 세 명의 이씨를 士籍에서 영원히 깍아 내고 章甫의 반열에서 덜어냄으로써 斯文을 지키고 그릇되고 간사한 말이 없어진다면 다행이겠다고 전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 20세기 초반 영남의 3대 시비 가운데 하나인 손이시비와 관련한 것이다. 시비에 대한 호서사림들의 의견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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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諭事自古以來聖賢繼作以道相傳或親炙而得其宗或私淑而繼墜緖溯考淵源前後一揆有非以一時或相論議質辨而
遽謂之以師受也故孔子問禮於老子學琴於師襄而未聞以孔子之道得於老子師襄云爾則道統傳授自有其人而不可以一人之私意妄
擬於不倫也明矣今聞 貴郡孫氏以 晦齋先生之學出於其先祖愚齋的受道脈做出無根無稽之文肆然唱說繼又李晩燾李晩烓李炳鎬
營護孫氏忘其先祖以莫重後學二字謂之曰杜撰縱欲右袒於孫氏其於一世之公眼何其於百年已刻之金石何至若破板之牌尤不覺
毛骨之俱竦不意嶠南鄒魯之鄕乃有一種怪鬼輩之跳踉自恣至於此極也恭惟我 晦齋先生得千載不傳之學卓然自立道德之尊
爲百世之師故 正廟朝親製祭文曰不由師承直溯閩洛退溪先生曰罔有淵源之徵此是斯文之一大斷案聖人復起不易斯言也噫彼雖
欲溢美其先祖自不覺陷於誣先誣賢之科其亦可哀也已此非但兩家之私相是非實關斯文故生等駭惋之極不得不明白卞破敢此
仰諭通到之日卽自 貴院齊聲共討諸孫及三李永刊士籍損棄章甫之列以衛斯道以熄邪說之地千萬幸甚
丙午八月二十日 湖西儒生 宋(仁)憲 宋(東)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