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윤5월 4일 趙基百 외 49명의 趙氏家門 인사들이 연명하여 통문을 발의한 安東 泗濱書院의 주도자를 儒案에서 삭제하고,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공정한 필적을 쫒길 당부하는 通文
1906년 윤5월 4일 趙基百 외 49명의 趙氏家門 인사들이 연명하여 통문을 발의한 安東 泗濱書院의 주도자를 儒案에서 삭제하고,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공정한 필적을 ㅤㅉㅗㅈ길 당부하는 通文이다.
조씨 가문에서는 손이씨의 시비가 도내로 확산되어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우는데, 이들이 살펴보니 풍문을 ㅤㅉㅗㅈ아서 일이 더욱 커졌다고 진단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대저 회재 선생이 나아가 배웠다는 것은 우재선생의 연보에서 대개 증명되는 것이며, 제문에서 대략을 서술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묘갈문에 이르러서도 이미 그렇게 말했다고 하였다. 그런즉 오랜 세월 덕망과 인품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은 한결 같아서 손이씨의 양 가문의 사이에 허물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당초 慶州誌 가운데 우재의 조항 아래에 회재의 事實을 한 단락 말한 것을 완전히 파낸 것으로 단지 손씨가 한을 품은 것이 아니라는데 사림은 한 푼의 괴이하거나 의심을 갖는 것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하여 양쪽의 잘잘못을 논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량문 가운데 ‘淵源’의 두 자는 비록 깍아서 고치는 가운데 취하였기에 손씨들이 사사로이 지은 것이 아니다. 곧 그것은 본손들이 사는 곳에 있었다는 것에 다른 견해가 없이 받들고 주선함으로써 숨겨진 덕을 열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통문에서는 손씨들에 대하여 일부 옹호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조씨들은 그러한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후대의 사람들이 사사로이 列聖朝와 先賢의 글을 수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어서 주장하고 있다. 조씨들은 열성조 祭文 가운데 濂洛의 구절로 거슬러 올라가고, 퇴계의 행장 가운데 淵源이라는 말이 없다는 이러한 진실은 백세를 기다려도 의혹이 되지 않을 것이다. 뒤의 성인들이 일어나 바꾸지 않은 것은 아주 먼 옛적의 謹嚴한 글로써 오로지 말학이 감히 헤아려 도달할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한 것인 즉 비록 양가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결단하여 사사로이 그 사이에 넣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어서 조씨들은 손이시비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도내 사림으로부터 논의하여 공적으로 조정하는 방법을 따르는 것이 지당하다고 보았다. 즉 공론에 따라 결정하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면서 최근에 泗濱書院 유생들이 보내온 통문에 대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사안을 판단한다고 비판하였다. 조씨들은 사빈서원 유생들 스스로 세상의 도리가 변화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사문의 재앙이라고 하였다. 조사하여 살펴보라는 그 한편의 명령하는 뜻은 자기 견해를 주워 모아 이리저리 꿰어 맞춰 일반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 뒤에 스스로 고상한 척 표방하며 자기의 의사대로 멋대로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가문이 계획하여 만들고 소굴에서 오로지 나와서 회재와 퇴계 두 선생을 무고하고 핍박하고서 듣지 않고 말 하는 것이 그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글자가 닮았다고 글자를 가벼이 서술하고, 작은 단서로 사방으로 상대를 헐뜯고 배척하고, 마음대로 논하여 임의로 법을 적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사문을 해치는 자를 무찌르는 것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으며, 향촌에서는 오로지 군자의 악한 것만을 해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빈서원의 말처럼 한다면 장차 이전 국왕의 글과 퇴계의 행장을 존경하고 신임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사빈서원의 의견이 공자의 가르침보다 나을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사빈서원이 손씨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퇴계와 정조가 회재에게 스승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하여 부정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사빈서원은 퇴계의 연원이 있는 곳, 즉 안동에 위치한 곳으로서 그렇게 비판한 것에 대하여 더욱 비난의 강도를 높였다.
조씨들은 사빈서원이 연원을 존경하고 받드는 곳으로서 감히 퇴계가 논한 것을 꾸짖고, 퇴계에게 죄를 얻게 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들이 죄를 짓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퇴계에 대한 도리라고 말하면서 반대로 가까이에서 퇴계를 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빈서원 유생들 또한 先賢의 후예로서 노인들 중에는 퇴계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사빈서원의 통문은 필경 주도하여 통문을 지은 자가 스스로 현인을 誣告하는 함정에 빠졌음을 알지 못하여서 그러한 통문을 보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러한 습속이 커져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지 못한다면 거짓된 이름만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통문을 주도한 우두머리를 선현을 무고한 죄로 다스려야 조선 유학의 본산인 안동 즉 伊川의 명예가 회복 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손씨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이한 유언비어로서 그것이 사문을 모함하고 해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후인들에게 이미 회재와 퇴계의 두 夫子는 大賢이기에 지금도 또 침노하여 업신여기려고 했으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아서 유언비어로는 해하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홍수와 맹수의 우환이 그치지 않듯이 이미 그것을 마음에서 감추고 속여서 자취를 속이고 바꿔서 한꺼번에 뽑아서 잘라 내는 것은 천지간에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씨들은 보다 근본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유학의 쇠퇴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조짐이 바로 선현의 말씀을 부정하고, 연원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조짐이 영남학파 내지 퇴계학파의 본산인 안동에서 나왔다는 것에 더욱 우려를 표현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손이 양성의 시비도 보았다. 즉 두 가문이 서로의 허물만을 헐뜯기를 고집하다가는 유학의 쇠퇴라는 거센물결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주장했다. 조씨들은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한 동네에서 한 우물을 마시며 다져왔던 오랜 정분이 금일에 이르러 한 구절, 한 문구로 인해 깨졌지만 서로 의논하여 정중하고 바른 지경으로 되돌리도록 힘쓰면 이를 이간하려는 무리가 있어서 기교를 부려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지금 두 가문에서 잘못인줄 알면서 저지른 과실의 서로 모순되는 것을 트집 잡기에 여념이 없어서 홀연히 풍랑이 침노하여 전체 도내에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또한 밖에서는 이처럼 분열된 모습을 보며 비아냥거리며, 퇴계의 글을 마음대로 찢어내고 지어내면서 말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옛날에 朱子가 江東을 다스릴 때 성인의 말씀을 희롱하고 모욕하는 자 한 두명을 신문하고, 사람들에게 명하여 전한 말씀에서 어두운 풍속을 경계하였다고 했다. 그것은 예로부터 성인을 속이고 현인을 헐뜯는 무리가 어느 시대에도 없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자는 반드시 속된 것을 경계하고 제거하는데 힘쓰고자 했으며, 실제 세상의 도리를 깊이 근심하여 돕기 위해 나아갔다고 했다. 그것은 맹자가 사악하고 그릇된 말을 물리치는 것도 같은 뜻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무고하는 통문을 지은 자를 옥산서원에서 빨리 도내에 성토하도록 말하여 儒案에서 영원히 삭적한 후 두 집안에서 논의하여 公筆을 ㅤㅉㅗㅈ는데 힘쓴다면 모두 大道에 이를 것인즉 사문에 다행이며, 世道에 다행이라고 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 20세기 초반 영남의 3대 시비 가운데 하나인 손이시비와 관련한 것이다. 시비에 대한 조씨 가문의 의견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조씨들이 비판하는 사빈서원은 청계 김진을 비롯한 그의 다섯 아들을 제향하는 의성김씨 가문의 서원이다. 의성김씨가 퇴계학파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연원 문제에 대하여 퇴계를 비판했던 사빈서원의 주모자를 처벌하라는 강경 발언은 곧 조씨가문이 의성김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모두를 비판한 것이 아닌 점 등을 고려하면 이들 趙氏는 영양 주곡의 한양조씨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