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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조기백(趙基百) 등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906.0000-20170630.Y17510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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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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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옥산서원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100.5 X 119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906년 조기백(趙基百) 등 통문(通文)
1906년 윤5월 4일 조기백 외 49명의 조씨가문 인사들이 연명하여 통문을 발의한 안동 사빈서원의 주도자를 유안에서 삭제하고,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공정한 필적을 ㅤㅉㅗㅈ길 당부하는 통문이다. 조씨 가문에서는 손이씨의 시비가 도내로 확산되어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우는데, 이들이 살펴보니 풍문을 ㅤㅉㅗㅈ아서 일이 더욱 커졌다고 진단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대저 회재 선생이 나아가 배웠다는 것은 우재선생의 연보에서 대개 증명되는 것이며, 제문에서 대략을 서술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묘갈문에 이르러서도 이미 그렇게 말했다고 하였다. 그런즉 오랜 세월 덕망과 인품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은 한결 같아서 손이씨의 양 가문의 사이에 허물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한편 안동 사빈서원 유생들이 소문을 ㅤㅉㅗㅈ아서 퇴계와 회재를 무고하는 통문을 발송한 것은 유학이 쇠퇴하는 시절을 맞이한 결과로 판단하였다. 아울러 그러한 일이 영남학파의 본산이 안동에서 나온 것에 더욱 우려를 표현하였다. 나아가 두 가문의 잘잘못을 떠나 오랜 세월 한 동네에 살면서 돈독한 정분을 이어온 곳이 서로 대립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조씨들은 선현의 글을 마음대로 지우고 지어낸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며 또한 그 일로 도내가 소란스러우니 두 가문이 회의하여 공인된 필적을 ㅤㅉㅗㅈ아서 일을 해결하길 요청하였다. 아울러 분란을 키우는 통문을 발송하였던 사빈서원의 주모자를 유안에서 삭적하여 기강을 바로 세우길 옥산서원에 요청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윤5월 4일 趙基百 외 49명의 趙氏家門 인사들이 연명하여 통문을 발의한 安東 泗濱書院의 주도자를 儒案에서 삭제하고,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공정한 필적을 쫒길 당부하는 通文
1906년 윤5월 4일 趙基百 외 49명의 趙氏家門 인사들이 연명하여 통문을 발의한 安東 泗濱書院의 주도자를 儒案에서 삭제하고,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공정한 필적을 ㅤㅉㅗㅈ길 당부하는 通文이다. 조씨 가문에서는 손이씨의 시비가 도내로 확산되어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우는데, 이들이 살펴보니 풍문을 ㅤㅉㅗㅈ아서 일이 더욱 커졌다고 진단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대저 회재 선생이 나아가 배웠다는 것은 우재선생의 연보에서 대개 증명되는 것이며, 제문에서 대략을 서술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묘갈문에 이르러서도 이미 그렇게 말했다고 하였다. 그런즉 오랜 세월 덕망과 인품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은 한결 같아서 손이씨의 양 가문의 사이에 허물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당초 慶州誌 가운데 우재의 조항 아래에 회재의 事實을 한 단락 말한 것을 완전히 파낸 것으로 단지 손씨가 한을 품은 것이 아니라는데 사림은 한 푼의 괴이하거나 의심을 갖는 것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하여 양쪽의 잘잘못을 논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량문 가운데 ‘淵源’의 두 자는 비록 깍아서 고치는 가운데 취하였기에 손씨들이 사사로이 지은 것이 아니다. 곧 그것은 본손들이 사는 곳에 있었다는 것에 다른 견해가 없이 받들고 주선함으로써 숨겨진 덕을 열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통문에서는 손씨들에 대하여 일부 옹호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조씨들은 그러한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후대의 사람들이 사사로이 列聖朝와 先賢의 글을 수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어서 주장하고 있다. 조씨들은 열성조 祭文 가운데 濂洛의 구절로 거슬러 올라가고, 퇴계의 행장 가운데 淵源이라는 말이 없다는 이러한 진실은 백세를 기다려도 의혹이 되지 않을 것이다. 뒤의 성인들이 일어나 바꾸지 않은 것은 아주 먼 옛적의 謹嚴한 글로써 오로지 말학이 감히 헤아려 도달할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한 것인 즉 비록 양가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결단하여 사사로이 그 사이에 넣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어서 조씨들은 손이시비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도내 사림으로부터 논의하여 공적으로 조정하는 방법을 따르는 것이 지당하다고 보았다. 즉 공론에 따라 결정하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면서 최근에 泗濱書院 유생들이 보내온 통문에 대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사안을 판단한다고 비판하였다. 조씨들은 사빈서원 유생들 스스로 세상의 도리가 변화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사문의 재앙이라고 하였다. 조사하여 살펴보라는 그 한편의 명령하는 뜻은 자기 견해를 주워 모아 이리저리 꿰어 맞춰 일반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 뒤에 스스로 고상한 척 표방하며 자기의 의사대로 멋대로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가문이 계획하여 만들고 소굴에서 오로지 나와서 회재와 퇴계 두 선생을 무고하고 핍박하고서 듣지 않고 말 하는 것이 그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글자가 닮았다고 글자를 가벼이 서술하고, 작은 단서로 사방으로 상대를 헐뜯고 배척하고, 마음대로 논하여 임의로 법을 적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사문을 해치는 자를 무찌르는 것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으며, 향촌에서는 오로지 군자의 악한 것만을 해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빈서원의 말처럼 한다면 장차 이전 국왕의 글과 퇴계의 행장을 존경하고 신임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사빈서원의 의견이 공자의 가르침보다 나을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사빈서원이 손씨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퇴계와 정조가 회재에게 스승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하여 부정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사빈서원은 퇴계의 연원이 있는 곳, 즉 안동에 위치한 곳으로서 그렇게 비판한 것에 대하여 더욱 비난의 강도를 높였다. 조씨들은 사빈서원이 연원을 존경하고 받드는 곳으로서 감히 퇴계가 논한 것을 꾸짖고, 퇴계에게 죄를 얻게 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들이 죄를 짓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퇴계에 대한 도리라고 말하면서 반대로 가까이에서 퇴계를 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빈서원 유생들 또한 先賢의 후예로서 노인들 중에는 퇴계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사빈서원의 통문은 필경 주도하여 통문을 지은 자가 스스로 현인을 誣告하는 함정에 빠졌음을 알지 못하여서 그러한 통문을 보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러한 습속이 커져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지 못한다면 거짓된 이름만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통문을 주도한 우두머리를 선현을 무고한 죄로 다스려야 조선 유학의 본산인 안동 즉 伊川의 명예가 회복 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손씨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이한 유언비어로서 그것이 사문을 모함하고 해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후인들에게 이미 회재와 퇴계의 두 夫子는 大賢이기에 지금도 또 침노하여 업신여기려고 했으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아서 유언비어로는 해하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홍수와 맹수의 우환이 그치지 않듯이 이미 그것을 마음에서 감추고 속여서 자취를 속이고 바꿔서 한꺼번에 뽑아서 잘라 내는 것은 천지간에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씨들은 보다 근본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유학의 쇠퇴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조짐이 바로 선현의 말씀을 부정하고, 연원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조짐이 영남학파 내지 퇴계학파의 본산인 안동에서 나왔다는 것에 더욱 우려를 표현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손이 양성의 시비도 보았다. 즉 두 가문이 서로의 허물만을 헐뜯기를 고집하다가는 유학의 쇠퇴라는 거센물결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주장했다. 조씨들은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한 동네에서 한 우물을 마시며 다져왔던 오랜 정분이 금일에 이르러 한 구절, 한 문구로 인해 깨졌지만 서로 의논하여 정중하고 바른 지경으로 되돌리도록 힘쓰면 이를 이간하려는 무리가 있어서 기교를 부려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지금 두 가문에서 잘못인줄 알면서 저지른 과실의 서로 모순되는 것을 트집 잡기에 여념이 없어서 홀연히 풍랑이 침노하여 전체 도내에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또한 밖에서는 이처럼 분열된 모습을 보며 비아냥거리며, 퇴계의 글을 마음대로 찢어내고 지어내면서 말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옛날에 朱子가 江東을 다스릴 때 성인의 말씀을 희롱하고 모욕하는 자 한 두명을 신문하고, 사람들에게 명하여 전한 말씀에서 어두운 풍속을 경계하였다고 했다. 그것은 예로부터 성인을 속이고 현인을 헐뜯는 무리가 어느 시대에도 없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자는 반드시 속된 것을 경계하고 제거하는데 힘쓰고자 했으며, 실제 세상의 도리를 깊이 근심하여 돕기 위해 나아갔다고 했다. 그것은 맹자가 사악하고 그릇된 말을 물리치는 것도 같은 뜻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무고하는 통문을 지은 자를 옥산서원에서 빨리 도내에 성토하도록 말하여 儒案에서 영원히 삭적한 후 두 집안에서 논의하여 公筆을 ㅤㅉㅗㅈ는데 힘쓴다면 모두 大道에 이를 것인즉 사문에 다행이며, 世道에 다행이라고 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 20세기 초반 영남의 3대 시비 가운데 하나인 손이시비와 관련한 것이다. 시비에 대한 조씨 가문의 의견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조씨들이 비판하는 사빈서원은 청계 김진을 비롯한 그의 다섯 아들을 제향하는 의성김씨 가문의 서원이다. 의성김씨가 퇴계학파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연원 문제에 대하여 퇴계를 비판했던 사빈서원의 주모자를 처벌하라는 강경 발언은 곧 조씨가문이 의성김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모두를 비판한 것이 아닌 점 등을 고려하면 이들 趙氏는 영양 주곡의 한양조씨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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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 貴鄕孫李氏相持▣▣誠吾黨之一不幸也竊謂▣關斯文事係同室兩家子孫終當有保合大和之日矣首尾累均轉成層激使道內章甫之
通交投競至甚至有因風縱燎謀禍斯文者噫噫甚矣此何擧措此何事變生等始也慨惑繼以憂歎玆敢略陳愚見伏惟 僉尊之諒察焉夫 晦齋先生之就學于
齋先生槩於年譜證之矣略於祭文叙之矣至於碣文亦已言之則百世景仰之心固無間於孫李氏兩家而當初州誌中 愚齋條下全闕 晦翁事實一段語者非但孫氏之所
憾而亦不無士林之一分訝惑也然旣往之事毋論齊楚得失而就樑頌中淵源二字雖在刪改之中旣非孫氏私撰則其在本孫地無異乎奉而周旋以闡潛德而若夫
列聖朝祭文中直溯濂洛之句 退夫子狀行中罔有淵源之語此誠竢百世不惑而起後聖不易者千古謹嚴之筆固非末學所敢擬到則雖兩家子孫斷不可
容私於其間矣今日兩家之是非也自道內士林論之祗當思從公調停之道而近觀泗儒之通自不覺世道之變而斯文之厄也試考其一篇命意便以已見摶量溱合撰出一般
說話高自標置任意跳踉其所做家計窩窟專出於誣逼 晦退兩先生而止耳如曰然也字似矣字輕述字其下語之際曾有所一分顧忌耶如曰何害字之累字不以加重字其措
辭之間抑有所毫末謹愼耶百端詆斥萬方侵侮橫論竪說任自低仰固知武叔之毁無損於日月之明而鄕愿之賊適足爲君子之所惡也若如彼通之言則將謂 聖朝侑文退陶狀行
不可爲尊信地乎抑彼有別般高見可以少仲尼之聞者乎又况泗院退陶淵源之地也其在遵奉淵源之所而敢詆 退爺之論者不惟得罪於 退爺而乃是重得罪於本院政所
謂夫子之道反害夫子者不幸而近之矣鳴乎彼泗儒亦先賢後裔也亦豈無老成識理之人而竟爲主製者之所使不知自陷於誣賢之科誠可矜而可哀也若使
此習滋長不自悔悟則鐵爐古步殆不免冒號之患而伊川百年烏得無識者之憂耶然而事貴去甚罪當治魁今此誣通不可以前日之非同歸溷
川之耻也此必有一種怪流隱然肆其蠆毒做出此等文字期於謀害斯文而後已以 晦退兩夫子之大賢而猶且侵侮之不有餘力末流之害不但止於洪猛之患而己其
包藏心迹譸幻扒括斷不可一日容息於覆載之間而若論其前後駭浪則孫李兩姓亦難免執其咎矣夫以兩家令裔十世同閈百年共井永修舊誼式至今日至或
一句一語鼎坐啇礭務歸鄭重亭當之地則世雖有伽倻餘黨章蔡舊徒庸詎敢窺其藩隙逞其沙蜮之機哉今日兩家做措容易起釁互相矛盾忽地風浪侵及於一
道之內而影外魍魎揶揄於白日之下遂使吾東 夫子之筆上下於撕啀輩唇吻之間是豈細故也哉昔朱夫子江東時嘗劾其戱侮聖言者一二人令人傳
誦以警昏俗盖自古詆聖毁賢之類何代無之而朱夫子之必欲除劾而警俗者實出於扶世道之深憂而鄒夫子距邪設不得已之意也噫彼製誣通者今方潛形秘
跡暗吹其毒觀乎其文其人可知晝出怪鬼難遁其形泥中鬪獸莫掩其迹此而不除越椒野心不但爲若敖氏之患而顧不爲吾黨百世之憂乎伏願 僉尊亟諭
道內聲討其主製誣通者使不得永厠於儒案然後兩家論議務循公筆偕至大道則斯文幸甚世道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丙午閏五月初四日趙基百
趙榮璧
趙錫祐
趙基常
趙基宗
趙基敏
趙基昌
趙基明
趙基孚
趙升煜
趙基暹
趙基牧
趙基燦
趙基逸
趙基迪
趙基緖
趙基尹
趙基碩
趙基郁
趙基寧
趙基續
趙甲祜
趙基勣
趙龜祜
趙世祜
趙碩祜
趙增祜
趙邦祜
趙應祜
趙文祜
趙庚祜
趙襄祜
趙遠祜
趙基弼
趙鎭祜
趙震祜
趙宇祜
趙賮祜
趙思祜
趙璧祜
趙命祜
趙暹祜
趙得祜
趙性元
趙性道
趙性述
趙性毅
趙性恒
趙性直
趙性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