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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수급(收給) 답통문(答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906.0000-20170630.Y17510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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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경주향교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89.5 X 59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906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수급(收給) 답통문(答通文)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옥산서원으로 보내온 발행처 미상의 답통문이다. 연도 역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손이시비가 본격화되었던 1906년으로 추정된다. 통문의 내용은 한 동네의 오랜 세교를 이어온 손이 두 가문이 대립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첨언을 하자면 정조의 글이 해와 별처럼 빛나고, 퇴계가 지은 행장이 금석과 같이 견고하여 천세의 공안으로 이미 밝혀졌다. 또한 두 글자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도 손씨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런 즉 요사이 양송의 일로 다시 분주히 떠드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울러 양 선생이 당일에 끼치는 뜻을 생각하여 양 문중에서 수개월간의 분란과 우려를 해결하길 바란다고 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옥산서원으로 보내온 발행처 미상의 답통문
손이시비와 관련하여 옥산서원에서 보낸 통문에 대한 발행처 미상의 답통문이다. 연도 역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손이시비가 본격화되었던 1906년으로 추정된다. 통문의 내용은 한 동네의 오랜 세교를 이어온 손이 두 가문이 대립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었다. 그러면서 『東京誌』를 편찬할 당시에도 우재의 항목 아래에 회재를 넣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의견이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심사숙고하여 그것을 뺏으며, 손씨들도 역시 독실하게 믿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재의 심오한 학문은 백세의 사표가 되며, 사림이 진심으로 깊이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한 것은 容齋 李荇의 墓誌銘와 默齋 洪彦弼의 墓碣銘에도 잘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날 외삼촌과 조카가 자리한 곳에서 義方을 제시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淵源이라는 두 글자는 한 갈래로 내려온 도통을 말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자신들이 판단하는 것에 조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러나 첨언을 하자면 正祖의 글이 해와 별처럼 빛나고, 퇴계가 지은 행장이 金石과 같이 견고하여 천세의 公案으로 이미 밝혀졌다. 또한 두 글자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도 손씨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런 즉 요사이 樑頌의 일로 다시 분주히 떠드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손씨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더욱 불필요하고 놀랍고 탄식이 난다고 하였다. 아울러 양 선생의 영광을 당일에 끼치는 뜻을 생각하여 양 문중에서 수개월간의 분란과 우려를 해결하길 바란다고 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 20세기 초반 영남의 3대 시비 가운데 하나인 손이시비와 관련한 것이다. 두 가문의 화해를 바라는 내용이지만, 이씨측의 주장이 옳다고 보고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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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答通文
右文爲回諭事伏以斯文之莫重者的脉也世道之難誣者公論也不幸嶺運近否鄕鬪相繼而有之士趨不正者多矣此生等之所以
夙夜憂歎積而莫泄者殆將數十年有許矣仄聞 貴鄕有此孫李氏兩家相持之端而自是同室之事合有纓冠之相救庶見
氷雪之自解矣卽伏承兩度來諭則生等雖在遠外而亦不覺凜然失圖矣噫嘻 兩先生當日敎誨之養育之至誼則 僉尊之書略
已悉焉生等又不必張皇疊架而且念十世之居則南隣北舍也二姓之好則我子爾(女)也曰兄曰弟信誼均摯則不同者姓字也同田同井
憂樂共濟則差間者門戶也其相愛之情固當何如相恃之道亦復何如也大嶺以南許多門族之守先誼講世好者滔滔俱是而未
有如兩家是若則此豈非 兩先生當日之貽謨遺澤愈久而愈篤者耶然則當初州誌之創役也 愚齋條下之不可無 晦翁一款語者
僉尊必講之熟矣孫氏亦信之篤矣而緣他兩家子孫之疵毫分數較計大重幷與其據實當書之事而一齊刪却者此豈非玆誌之一大
欠缺而子孫之責亦似有歸矣第伏念 愚老之邃學盛德足當爲百代之師表吾黨之冠冕窮理盡性容齋之誌也內外咸宜默齋
之銘也則當日舅甥之席其所以義方之提撕者固何可窺測而至若淵源二字則統緖甚的關係莫大以若生等之膚見蔑識顧何敢
議到於高峯白沙之所未敢添語者而
正廟侑文炳如日星 退陶撰狀堅如金石則千載之公案昭然已著而二字過重之說亦發於孫氏之口則固不必更爲紛騷近日樑頌之事
則爲孫氏地者尤不勝其驚歎而且惑矣本院是士林之所而尊閣是士林之文也則設有當改而改之亦士林事也縱有當補而補之亦士
林責也而徑庭擇日私自擅改者實非尊祖衛道底道理也然而 僉尊旣許以婺源之後生五夫之餘徒則絃誦之鄕不可使戈戟相尋
表式之閭不可使藤葛終萎各相勉勵務循調停之責以光 兩先生當日之遺意以釋兩門中累月之紛擾則斯文幸甚吾道幸甚
右文答
玉山書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