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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경약소(京約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906.0000-20170630.Y17510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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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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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경약소, 경주향교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91.5 X 59.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경주향교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906년 경약소(京約所) 통문(通文)
1906년 10월 21일 경약소 회중에서 33인이 연명하여 경주손씨의 『우재집』 두찬과 『회재집』파판에 대하여 비판하고, 여주이씨와 더불어 양 가문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내의 유생들이 힘써 노력해주길 당부하며 경주향교에 보낸 통문이다. 경약소 회중에서는 같은 마을에 사는 양반들끼리 다투는 것을 모른 체하고, 구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통문을 보낸 이유를 말하였다. 시비가 발발한지 1년이 지나면서 경상도내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 시비가 전해졌던 것이다. 경약소 측은 염락의 적통을 전수한 자는 오로지 회재선생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두 선생의 후손으로써는 마땅히 여러 대를 이어 지켜온 법식을 계승하는 것이 옳지만, 책 상자에서 나온 옛날 유묵이 진짜이니, 가짜이니 라고 서로 각을 세우고 대립하며 점점 유언비어가 왕래하고 있다고 전했다. 회재가 지었다는 우재에 대한 행장과 만사를 일컫는 것이다. 경약소 측에서는 두 집안에서 하는 말들이 서로 모순되지만 합쳐지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즉 이들이 현재 각자의 입장차이로 다투지만 결국 한 마을에 살아오면서 두 집안의 인연이 길고도 끈끈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형제 같은 두 집안이 서로 다투는 것을 두 선생이 지금의 사태를 본다면 한탄하며 평안하지 못할 것이라고 두 가문을 꾸짖었던 것이다. 또한 오래 동안 살아온 노인들로부터 손이시비가 이전에도 있었으며, 당시 경향의 유생들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음을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갑자년인 1864년에 조화하는 논의가 서울에서부터 지방까지 있어서 양가가 질긴 사단을 해결한지 40여 년이 지났다고 했다. 그러나 1905년의 상황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자신들이 근거로 들었던 문서가 이씨측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 가문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이에 대해 경약소 측은 묵패가 횡행하고, 사대부의 연수인 지역의 우두머리가 당을 나누어 다투는 것은 손이 양 가문의 불행만이 아니며, 크게는 전체 사람의 불행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지금 온 나라의 형편을 헤아려 제각기 나누어 다투는 것을 그치고 진실로 양가가 스스로 바르게 되돌리길 요청하였다. 다음으로 『회재이선생문집』이 간행한지 수백 년의 오래된 일이어서, 어느 본의 어느 글자가 두찬한 것인지 손씨들이 어찌하여 가벼이 말하는 것인지 반문하였다. 또한 요즘에 거마가 분주히 달려서 전하는 글의 반에 책판을 깨자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뒤이어 몇 구절의 시를 믿고 무고하지 않다고 하며, 싫어하는 것을 취한다고 한 점을 보면 이는 손씨들 측의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구절의 시는 진성이씨 3인이 지은 것을 일컫는 것으로, 이를 근거로 손씨들은 이씨들의 회재집 두찬과 회재의 학문 연원이 우재에게서 나왔음을 주장했기에 무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회재 가문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타인의 말을 근거로 사용하니 이씨 측으로서는 싫어했을 것이다. 싫어하는 것을 취한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경약소 측에서는 이처럼 양선생의 가볍고 무거움을 나누는 것이 옮은 것인지 반문하며, 진실로 경중을 나눈다면 후학들의 마음이 더욱 송구스러울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나아가 자신들이 주제넘게 경계를 넘어 간섭하는 것은 도내의 군자들께서 지난 갑자년의 조화론이 극발한 것처럼 양가에 편지를 보내어 이전처럼 같은 동네에서 다투는 것을 구제한다면 천만다행이겠다고 전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10월 21일 京約所 會中에서 33인이 연명하여 慶州孫氏의 『愚齋集』 杜撰과 『晦齋集』破板에 대하여 비판하고, 驪州李氏와 더불어 양 가문이 서로 調和를 이룰 수 있도록 道內의 儒生들이 힘써 노력해주길 당부하며 慶州鄕校에 보낸 通文
1906년 10월 21일 京約所 會中에서 33인이 연명하여 慶州孫氏의 『愚齋集』 杜撰과 『晦齋集』破板에 대하여 비판하고, 驪州李氏와 더불어 양 가문이 서로 調和를 이룰 수 있도록 道內의 儒生들이 힘써 노력해주길 당부하며 慶州鄕校에 보낸 通文이다. 먼저 손이시비가 재발된 원인을 살펴보면, 1904년 이씨 종가인 無忝堂에서 이언적이 쓴 손중돈에 대한 行狀과 輓詞가 발견되면서 손씨 측에서는 『景節公實紀』를 중간에 착수하였다. 이후 1905년 4월에 중간을 하면서 이 행장과 만사를 삽입하고, 여기에 추가로 회재 이언적의 諱를 直書하고, 또 그전에 시비가 일었던 李象靖이 지은 東江書院 上樑文의 ‘淵源道脈’구절을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眞城李氏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의 詩와 跋文을 얻어 싣고 이를 반포하면서 시비가 본격화 되었다. 경약소 회중에서는 같은 마을에 사는 양반들끼리 다투는 것을 모른 체하고, 구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통문을 보낸 이유를 말하였다. 시비가 발발한지 1년이 지나면서 경상도내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 시비가 전해졌던 것이다. 경약소 측은 舅甥간인 愚齋 孫仲墩과 晦齋 李彦迪이 연이어 나온 것은 우리나라의 행운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손중돈이 이룬 학문이라는 것은 濂洛이 전한 글이며, 손중돈이 이룬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염락을 접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염락의 嫡統을 傳授한 자는 오로지 晦齋先生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學과 問이라는 것을 글자 그대로 본다면 회재선생이 손해를 본다고 하였다. 이는 회재 이언적이 염락의 학문을 계승한 동방오현의 지위를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두 선생의 후손으로써는 마땅히 여러 대를 이어 지켜온 법식을 계승하는 것이 옳지만, 책 상자에서 나온 古墨이 진짜이니, 가짜이니 라고 서로 각을 세우고 대립하며 점점 遊言이 왕래하고 있다고 전했다. 회재가 지었다는 우재에 대한 행장과 만사를 일컫는 것이다. 경약소 측에서는 두 집안에서 하는 말들이 서로 모순되지만 합쳐지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즉 이들이 현재 각자의 입장차이로 다투지만 결국 한 마을에 살아오면서 두 집안의 인연이 길고도 끈끈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형제 같은 두 집안이 서로 다투는 것을 두 선생이 지금의 사태를 본다면 한탄하며 평안하지 못할 것이라고 두 가문을 꾸짖었던 것이다. 또한 오래 동안 살아온 노인들로부터 손이시비가 이전에도 있었으며, 당시 京鄕의 유생들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음을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갑자년인 1864년에 調和하는 논의가 서울에서부터 지방까지 있어서 兩家가 질긴 사단을 해결한지 40여 년이 지났다고 했다. 그 일에 참여하고 그 말한 것을 아는 노인들이 근래 영남 밖에서 소문을 듣고서 다시 과거의 조화지론을 부추겼으나, 이미 先父老들의 겸손하고 사양하는 풍속이 사라졌다고 했다. 40여 년전의 문제는 『우재실기』를 증보하면서 이상정이 지은 동강서원 상량문을 삽입 문제를 일컫는 것이다. 당시 손씨 측은 도내의 여론에 굴복하여 상량문를 삽입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1905년의 상황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자신들이 근거로 들었던 문서가 이씨측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 가문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이에 대해 경약소 측은 墨牌가 횡행하고, 사대부의 淵藪인 지역의 우두머리가 당을 나누어 다투는 것은 孫李 양 가문의 불행만이 아니며, 크게는 전체 사람의 불행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두 가문의 분쟁으로 나라 안의 멀고 가까운 곳에서 비웃고, 모욕한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온 나라의 형편을 헤아려 제각기 나누어 다투는 것을 그치고 진실로 양가가 스스로 바르게 되돌리길 요청하였다. 아울러 점잖은 군자들로서 다툼을 두려워하고 그친다면 능히 양가의 시비에 대한 그간의 책임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다음으로 『晦齋李先生文集』이 간행한지 수백 년의 오래된 일이어서, 어느 本의 어느 글자가 杜撰한 것인지 손씨들이 어찌하여 가벼이 말하는 것인지 반문하였다. 이는 진성이씨 3인에게서 퇴계가 지은 晦齋 行狀에 退溪가 後學이라고 한 것은 李氏가 杜撰한 것이라는 설이 나오고, 이에 근거하여 孫氏 측에서는 晦齋集의 판본을 파기해야 한다는 설까지 나오기에 이르게 된 것을 일컫는다. 이에 이씨 측을 지지하는 측에서도 이일에 관계되는 자를 施罰하고, 나아가 영구히 儒籍에서 삭제하고, 손씨의 실기를 私刊으로 간주하여, 모두 환송하고 나아가 破板하자는 등 압박을 강화해 나갔다. 경약소에서 이와 관련하여 두 가문을 모두 비판하였다. 먼저 문제가 되었던 狀文에 대하여 家狀草는 대를 물려 전해지는 보물일 뿐만 아니라 쇠와 돌과 같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것은 그만큼 믿을만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나아가 이미 준 것을 강력하게 새기는 것을 멈추도록 하는게 어찌 근본적인 것이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즉 이씨종가에서 나온 家狀을 우재집에 싣는 것을 막는 것은 근본적 해결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통문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家狀의 내용을 손씨 측에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장의 내용을 기재한 것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서 손씨들의 말은 尊衛에 흠이 있어서 그것은 반드시 분노와 원망을 발생하니 옳은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요즘에 車馬가 분주히 달려서 전하는 글의 반에 책판을 깨자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뒤이어 몇 구절의 시를 믿고 무고하지 않다고 하며, 싫어하는 것을 취한다고 한 점을 보면 이는 손씨들 측의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구절의 시는 진성이씨 3인이 지은 것을 일컫는 것으로, 이를 근거로 손씨들은 이씨들의 회재집 두찬과 회재의 학문 연원이 우재에게서 나왔음을 주장했기에 무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회재 가문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타인의 말을 근거로 사용하니 이씨 측으로서는 싫어했을 것이다. 싫어하는 것을 취한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경약소 측에서는 이처럼 양선생의 가볍고 무거움을 나누는 것이 옮은 것인지 반문하며, 진실로 경중을 나눈다면 후학들의 마음이 더욱 송구스러울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나아가 자신들이 주제넘게 경계를 넘어 간섭하는 것은 도내의 군자들께서 지난 갑자년의 調和論이 극발한 것처럼 양가에 簡書하여 이전처럼 같은 동네에서 다투는 것을 구제한다면 천만다행이겠다고 전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 20세기 초반 영남의 3대 시비 가운데 하나인 손이시비와 관련한 것이다. 또한 경약소 측의 손이시비를 바라보는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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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告事伏以誦詩讀書而 先正之學不可不知被髮纓冠而同室之鬪不可不救也竊惟 晦齋李先生高明道學卓然爲斯文宗匠而昏衢秉燭之始抑豈無私淑諸人之事乎施於政則愼
怒之要聞諸舅氏著於狀則義方之賜賴諸舅氏 先生之舅卽 愚齋孫先生也以愚齋而爲舅以晦齋而爲甥歷數我東先儒孰有如兩先生之幸也就舅氏而學學而及濂洛傳授之書就舅氏
而長長而接濂洛傳授之統者一晦齋先生也烏可以學其可學問其可問有所損於 晦齋先生也哉以兩 先生之后承宜可世守式好而巾衍古墨之其眞其贋圭角漸成往來遊言之曰是曰
非矛盾不合嫁女納婦之鄕秦楚相殘如兄若弟之家魯衛交爭推兩 先生當日之事而觀之則豈不慽慽不自安乎所以甲子間調和之論自京而鄕解兩家執拗之端迄爲四十有餘
載矣知其事預其論者其乎老耄而近聞嶺外風聲更吹一種旣熄之火以先父老遜讓之風墨牌撗行士大夫淵藪之地赤幟分黨是豈徒孫李兩氏家不幸之大者耶實惟全省士林之不幸而
適足貽笑於遠近受侮於一國之中矣以今日宇內形便揆之肯爲區區爭辨而止予苟使兩家自反而思之恐非雍容君子之爭則不能無兩是雙非之責於其間也噫 晦齋李先生文集
刊行果幾百年之久而第幾本第幾字杜撰之說何其輕發也家狀草傳世寶不啻金石之重而旣以授之强使停鋟亦何義諦也李氏之擧不能體先孫氏之語有欠尊衛其必發於
憤懥不得其正者也且又車馬奔馳於日下半行文破板說藉以爲重足跡荒忙於溪畔數句詩信不誣取以爲嫌此可以輕重於兩 先生分上而然耶眞若以是而有輕重之別則於後生末學之心
尤爲悚汗處也鄙等所以不顧涉越有此通告伏望一道內 僉君子以往在甲子調和之論亟發簡書于兩家俾修前好以救同室操戈之地千萬幸甚
右文通
慶州鄕校
丙午十月二十一日京約所會中 幼學李時德
公事員幼學姜在馨
曺司幼學盧載鉛
羅晟熙
製通幼學趙尙衍
主事姜夏馨
寫通幼學韓昇源
姜壽文
會員前承旨蔡奎駿
主事羅尙卨
參奉趙昇衍
丁仁燮
副尉蔡章默
幼學趙斗源
金鍾應
鄭東弘
李斗和
主事蔡光默
參奉姜來熙
趙南潤
幼學洪禹源
李時郁
柳重植
張相轍
參奉申亨雨
議官申相雨
主事權重熙
盧載淵
參書曺喜永
幼學安永一
高道林
主事許{土+秉}
金鍾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