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4월 15일 安東道會所에서 사액서원 훼철령에 대해 대처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28일에 義城鄕校에서 모이기로 했다는 내용으로 慶州鎭 各邑校院에 보낸 통문
1871년 4월 15일에 公事員 李中振을 비롯한 94명이 모인 安東道會所에서 慶州鎭 各邑 校院으로 大院君의 賜額書院 毁撤令에 반발하여 모임을 갖고 28일에 義城鄕校에서 모여 함께 상소를 올리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자는 통문이다.
대원군은 집권 초기인 1865년에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萬東廟와 華陽書院의 철폐를 단행함으로써 전면적인 서원 철폐에 앞서 노론세력의 약화와 민생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이어서 1868년에는 대원군 분부를 통하여 전국의 미사액 서원을 철폐하고, 서원의 토지는 屬公하거나, 유림들의 소유로 돌아가기도 했다. 미사액 원사의 훼철에 따른 전국 유생들의 반발이 매우 심했지만 대원군은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영남에서는 재지세력이 강성한 지역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하여 일시에 추진되지 못하고, 단계적으로 훼철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계속된 압력으로 결국 1868년 10월을 경과하면서 모든 미사액 원사의 훼철이 완료되었다. 그 이후 훼철 서원을 중심으로 훼철 반대소를 올리려는 여론이 형성되었으나, 훼철되지 않았던 사액서원에서는 혹시 모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로 인해 사액서원과 훼철 원사간의 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한편 조정에서는 미훼철된 사액서원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制約을 하였다. 그것은 원생의 정원을 준수하고, 서원의 신설을 금지하며 오직 사액서원에 추배하는 것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서원의 원장은 수령이 맡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전부 실행이 되었는데, 이는 1871년의 전면적인 서원 혁파의 전단계였던 것이다. 결국 대원군은 1871년 3월 전국의 47개 원사만 존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였다. 이때 영남에서는 紹修書院, 陶山書院, 屛山書院, 興巖書院, 玉洞書院, 金烏書院, 道東書院, 玉山書院, 西岳書院, 灆溪書院 등 10개의 서원과 東萊 忠烈祠, 固城 충렬사, 晉州 彰烈祠, 居昌 褒忠祠 등 4개의 사우가 존치되었다.
그러나 서원 훼철과 존치의 명분이 뚜렷하지 않아서, 높은 벼슬에 있던 후손이 있는 경우 존치될 수 있었다는 혐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은 당시 유림들의 극렬한 반발을 받았다. 그로 인해 영남에서는 서원의 훼철을 막기 위한 儒疏를 준비하였다. 각 지역마다 鄕會를 개최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는 사이 安東道會 명의의 통문이 각처에 전달되었다. 그것은 원사훼철 반대소 건으로 4월 28일 의성향교에서 도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경주진에 도착한 본 통문도 역시 같은 것이었다.
안동도회 통문에서는 비록 지엄한 왕명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도 列聖朝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을 훼철한다는 것은 작년에 末弊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훼철하였던 것과 다른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사액 서원의 훼철로 선현과 선배들을 볼 수 없고, 사풍도 더욱 쇠퇴할 것이라고 하면서 위로는 군부를 이롭게 하고, 아래로는 선사를 지키는 것에 義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이리저리 궁리를 해도 더욱 의지를 굳게 가져서 행장을 꾸려 궐문에 외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결국 훼철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많은 공론을 형성하기 위하여 의성향교 도회를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존치된 서원에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혹시 모를 불상사를 피하기 위하여 유소 참여에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기도 했다.
통문의 斜文에는 훼철되거나 미훼철된 서원이나 사우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함께 활동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各邑 各門中에서 정성껏 물력을 각출하여 보내주고, 각 문중 유생의 명첩을 成冊하여 보내주길 요청하였다. 이는 의성향교의 모임은 儒疏를 올리는 것을 전제로 疏首와 陪疏인원을 확정하는 자리였음을 알려준다.
결과적으로 의성향교 도회에서는 총 1,137명이 참여하여 소수로 尙州의 鄭民秉을 선출하고, 63읍에 疏儒를 배정하였다. 당시 각 문중에서 제출한 명첩의 인원은 모두 10,027명에 달했는데, 이는 영남의 대표적인 재지사족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정민병은 6월 1일에 幽谷道會所에서 서울로 출발하여, 15일에 서울에 들어갔다. 이날 雲峴宮에서는 疏儒의 명첩과 居住錄을 가져갔는데, 다음날 대원군은 疏儒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결국 사액서원의 훼철을 막기 위한 영남만인소는 실패하였으며, 14개 원사를 제외한 사액 서원에 대한 훼철이 집행되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대원군의 서원 훼철에 대한 영남 사림들의 인식과 대응을 확인시켜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