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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대구도회소(大邱道會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845.4717-20170630.Y17510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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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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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권택하, 대구도회소, 경주진 각읍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45
형태사항 크기: 105 X 65.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845년 대구도회소(大邱道會所) 통문(通文)
본 통문은 공사원 진사 권택하를 포함하여 28개 읍, 81명의 유생들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이다. 이들이 달성의 서원에서 모여 통문을 내게 된 것은 1월에 있었던 옥산서원 모임에서 여러 유생들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보다 앞서 옥산서원에서 모임을 갖기로 한 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옥산서원의 향례가 장기간 폐궐되고, 강회 또한 옥산이씨들로 대표되는 서파들에 의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논의하기 위하여 수개월 전에 발문하여 1월 25일에 옥산서원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당일에 이르러 많이 모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上道의 3개 고을에서 여러 유생들이 황급히 모임에 나아갔으나 여러 번 진퇴하면서 도리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당시 각 가문마다 어떤 의향인지, 어떤 사단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당일에 모임에 참석했던 유생들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한 일은 매우 통탄할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2월 16일 달성의 서원에서 좌우상하도의 유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 날에 다시 통문을 내어서 장차 8월에 날을 정하여 옥산서원에서 함께 모이기로 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모두 함께 서파들의 죄를 성토하여 예법이 바르게 돌아가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한을 넘겨서 모임에 도착하여 저번과 같이 문을 닫고 남의 일인 것처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45년 2월 16일 大丘道會所에서 慶州鎭 各邑으로 玉山李氏들의 講會를 武斷으로 정지시킨 것을 聲討하며, 오는 8월에 날을 정하여 玉山書院의 廟宇 아래에서 모임을 갖고 이를 다시 성토하여 바로 잡고자 하니 참석해주길 요청하는 통문
1845년 2월 16일 大丘道會所에서 慶州鎭 各邑으로 玉山李氏들의 講會를 武斷으로 정지시킨 것을 聲討하며, 오는 8월에 날을 정하여 玉山書院의 廟宇 아래에서 모임을 갖고 이를 다시 성토하여 바로 잡고자 하니 참석해주길 요청하는 통문이다. 본 통문은 公事員 進士 權宅夏를 포함하여 28개 읍, 81명의 유생들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이다. 이들이 달성의 서원에서 모여 통문을 내게 된 것은 1월에 있었던 옥산서원 모임에서 여러 유생들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보다 앞서 옥산서원에서 모임을 갖기로 한 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옥산서원의 향례가 장기간 廢闕되고, 講會 또한 玉山李氏들로 대표되는 庶派들에 의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논의하기 위하여 수개월 전에 發文하여 1월 25일에 옥산서원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당일에 이르러 많이 모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上道의 3개 고을에서 여러 유생들이 황급히 모임에 나아갔으나 여러 번 進退하면서 도리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당시 각 가문마다 어떤 의향인지, 어떤 사단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당일에 모임에 참석했던 유생들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한 일은 매우 통탄할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2월 16일 達城의 서원에서 좌우상하도의 유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 날에 다시 통문을 내어서 장차 8월에 날을 정하여 옥산서원에서 함께 모이기로 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모두 함께 서파들의 죄를 성토하여 예법이 바르게 돌아가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한을 넘겨서 모임에 도착하여 저번과 같이 문을 닫고 남의 일인 것처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였다. 옥산서원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이언적의 庶子인 李全仁의 후손인 玉山李氏들의 入薦과 通任요구에 맞서 치열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특히 官에서 이들 庶派의 손을 들어주면서 적서간의 분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향전으로 인해 옥산서원 향사가 장기간 폐궐되고, 薦講도 무산되면서 수부임이 투단하고, 新儒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講會에 난입하여 薦錄을 탈취하는 등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본 통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道儒들이 이를 바로 잡고자 나섰지만 많은 유생들이 모이지 않아서 오히려 庶派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嫡派로서도 서파들의 요구대로 同薦을 하는 것은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로서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하였던 도유들 또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일이기에 擧道적인 움직임을 통하여 서파에게 맞서려고 통문을 내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9세기 이래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적서간의 향전의 한 사례이다. 발단은 옥산서원 내부의 원임직 소통 문제였지만 당시 新儒로 대표되는 서파들의 사회적 성장과 기존 양반사족간의 기득권 다툼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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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斯文重地不可任一家白廢道內大擧不可使一儒不參玆庸廣告之典敢冀同聲之義恭惟我玉山書院卽海東俎豆之首嶠南衣冠之會
先賢建規已經三百年遵守本鄕講會亦爲七十州矜式遠近章甫孰不延頸接武以爲齋誠依仰之地哉近因事變出於玉李輩非分之覬斥逐儒林沮敗院規讐視
嫡宗扶曳冠裳求仁堂上奉踢不息亦樂門外絃誦文絶 文元公香火已多闕朔 老先生規模可謂掃地爲裔孫忝先之恥姑付渠輩體貌而在士林衛道之賣當有全
嶺共憤肆以今正月二十五日定會于本院將爲爛議事宜極歸停當使道內之圓冠方領無一人不知無一員不參而發文幾月來會無多至今上道數三邑赴會諸儒遑?累
進退無據反被彼輩之無限詬辱此豈吾嶺尊道之義所望於平日哉雖未知各家意向之如何事端之如何而其爲痛歎則深矣今於達城禮圍之日左右上下道齊會一
席更發通文將以今八月定日同會于玉山 廟下以爲同聲討罪修禮歸正之計伏願 僉尊趂期濟濟來會無至如前閉戶越視之地千萬幸甚
右文通
慶州鎭各邑
乙巳二月十六日大邱道會所公事員進士權宅夏
幼學姜鳳海
製通進士成鎭敎
幼學鄭墧
寫通幼學張翼遠
金鎭愚
孫鍾瑜
李仁錫
曺司生員康起元
安琇重
會員尙州幼學柳會春
柳贊祚
安東幼學權秉淵
鄭雲逵
裵善源
進士金邁銖
李奎應
幼學金鎭昌
李相聖
李奎悳
權載衡
金鎭{忄+申}
金應喆
李秀覺
李相行
金鎭球
柳進禮
星州幼學鄭周永
崔宅翰
鄭晉德
善山幼學金洛疇
李章立
漆谷幼學李以學
進士李以鼎
幼學裵益壽
李鎭沃
李勉運
禮安進士李殷淳
幼學琴誠述
李彙絅
金斗相
大邱幼學崔元述
崔{氵+寬}
孫廷珏
都世亨
趙泰龍
李秀秉
朴鍑基
玄風幼學金祐東
寧海幼學李相儒
權養直
南崑壽
永川幼學權{火+贊}
鄭裕默
曺胤敬
孫宗龜
李浩龍
金鼎銖
密陽幼學李鍾元
孫亮述
義城幼學金在裕
朴秀學
仁同幼學張一魯
趙鉉周
靑松幼學趙重祜
趙邦祜
眞寶幼學申性欽
申復欽
新寧幼學曺晦敬
盈德幼學申斗錫
蔚山幼學李鼎和
河陽幼學金永履
醴泉幼學鄭昇洛
龍宮幼學鄭昌德
咸安幼學李有楨
高靈幼學金學振
草溪幼學李命祿
軍威幼學李秀學
義興幼學朴顯章
慈仁幼學崔道彦
淸道幼學李致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