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 대구도회소(大邱道會所) 통문(通文)
본 통문은 공사원 진사 권택하를 포함하여 28개 읍, 81명의 유생들이 연명하여 보내온 것이다. 이들이 달성의 서원에서 모여 통문을 내게 된 것은 1월에 있었던 옥산서원 모임에서 여러 유생들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보다 앞서 옥산서원에서 모임을 갖기로 한 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옥산서원의 향례가 장기간 폐궐되고, 강회 또한 옥산이씨들로 대표되는 서파들에 의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논의하기 위하여 수개월 전에 발문하여 1월 25일에 옥산서원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당일에 이르러 많이 모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上道의 3개 고을에서 여러 유생들이 황급히 모임에 나아갔으나 여러 번 진퇴하면서 도리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당시 각 가문마다 어떤 의향인지, 어떤 사단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당일에 모임에 참석했던 유생들이 서파들에게 모욕을 당한 일은 매우 통탄할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2월 16일 달성의 서원에서 좌우상하도의 유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 날에 다시 통문을 내어서 장차 8월에 날을 정하여 옥산서원에서 함께 모이기로 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모두 함께 서파들의 죄를 성토하여 예법이 바르게 돌아가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한을 넘겨서 모임에 도착하여 저번과 같이 문을 닫고 남의 일인 것처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