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0월 15일 李鍾壽 등의 방해로 焚香禮를 거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慶州府尹에게 보고하는 牒呈
1883년 10월 15일 李鍾壽 등의 방해로 焚香禮를 거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慶州府尹에게 보고하는 牒呈이다.
이 첩정은 옥산서원 원임직을 두고 발생하였던 嫡庶간의 是非와 관련한 것이다. 이 시비는 18세기 말부터 있었지만 19세기 들어오면서 점차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1883년 이후의 적서시비는 이전까지 이언적의 庶子인 李全仁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었다면, 이때부터는 경주부내의 서파와 신광면 우각리에 살던 회재의 庶孫인 五宜亭 李宜澤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었다. 한편 이때의 시비는 監營의 적극적인 개입과 庶派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로 인하여 시종 적파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1884년 9월 이의택의 9대손 道庵 李能模의 상소로 옥산서원 원임직 허통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본 첩정은 적서간의 시비가 점차 가열되던 가운데 향사를 맞이하여 서로 대립하였던 상황에 대하여 당시 원장을 겸하고 있던 경주부윤에게 보고를 한 것이다. 본문을 보면 嫡派에서는 先祖인 文元公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배움은 보잘 것 없고, 아는 것이 얕은 사람들이라 선현의 서원을 지켜내기에 부족하며, 말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하여 여러 번 오늘과 같은 이런 변고를 불러 들였으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냐고 한탄하였다.
향사가 있던 날의 상황을 보면 우선 적파의 3~4명과 서원의 首席이신 성주가 다시 임명한 有司와 나란히 나아가 서원에 이르렀는데, 庶派의 우두머리가 되는 孫星煥 등이 이전의 습관을 버리지 않고 정한 기일에 앞서 이미 수십 명을 모아 빙 둘러앉아서는 무섭게 을러대어 끝날 줄을 몰랐다고 전했다. 그리고 향례를 거행할 쯤에 다다라 이른바 서파에서 임명한 齋任 李鍾壽라는 자가 고함을 치며 위협해서 말하기를 이번 焚香에서는 당연히 절을 행할 때 자신들도 齊服[검은 옷]을 가지도록 기용해야 한다고 했다. 즉 제복을 입는 집사에 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세가 장차 일렬로 늘어서고 건너편에도 역시 일렬로 늘어서서, 한번 절을 하면 건너편 역시 한번 절을 하려했다. 또한 순서에서 나중이 되는 것을 사양하는 의지가 강하여서 이것을 빼앗아하려고 하였다고 전했다. 결국 양쪽이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고집하다가 날이 이미 저물어 시간이 지났기에 향례를 지내지 못하였다. 적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무릅쓰고 서파와 가지런히 자리하는 것이 너무도 온당치 못하여서 개인의 처소로 물러나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후에 벌어진 일의 상태는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적파에서는 분쟁으로 인해 향사를 지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성주에게 알리고 처분을 기다린다고 말하였다. 이에 慶州府尹 金元性은 題音에서 분향 때마다 이렇게 서로 고집하는 사단이 있으니, 욕됨이 적지 않아 극히 개탄스럽다고 하였다. 이 사건의 전후한 일들은 『玉院事實』에서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옥산서원에서는 이미 10월 1일의 분향을 앞두고 적파와 서파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여 쌍방이 경주부와 감영에 억울함을 상서하고, 경주부에서는 감영의 제음과는 별개로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대질 심문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5일에 재차 두 세력이 대립하여 분향이 진행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경주부윤은 15일 궐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았다. 다만 1일의 분향에서 양측의 무력을 동반한 대립이 있었고 감영에 보고까지 된 사안이기에 16일부터 재차 양측을 초치하였다. 감영과 경주부의 판단은 서파의 입장을 옹호하며 그들의 폭력 등에 대해서는 큰 질책을 하지 않고 사안을 무마시켰다. 이에 적파들은 11월 5일 감영에 나아가 道會를 개최하여 6일에 감사에게 상서를 올렸지만, 만나지 못하였고 내려진 판결문 또한 서파를 두둔하는 듯하자 재차 상서를 올려 결국 경주부에 일러서 단속하라는 관문을 내릴 것이라는 답변을 얻고서야 도유들이 물러났다. 그러나 9일에 관문이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한 유생들이 재차 감영에 호소문을 올렸다. 그 결과 감사는 12일에 경주부로 관문을 보내었다.
이처럼 옥산서원의 적서시비는 단순히 한 서원의 문제만이 아닌 영남지역 전체 舊儒들의 사회적 위상과 직결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분쟁에 가담하였지만, 당시에도 慶州孫氏들은 도회에 전원 불참하여 공분을 사기도 했다. 옥산서원은 내부적으로 적서시비가 극에 달해 있었고, 손이시비의 불씨도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원군 훼철이후 존치된 사액서원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제고되었지만, 그만큼 대내외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첩정은 옥산서원의 원임직 소통을 두고 발생하였던 적서시비에 관한 것이다. 당시 시비의 진행 상황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