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玉山書院 士林이 慶州府尹에게 강당인 求仁堂의 화재 사실을 보고하고 監營에도 소식을 알려주길 요청하는 書目이다.
1839년 玉山書院 士林이 慶州府尹에게 강당인 求仁堂의 화재 사실을 보고하고 監營에도 소식을 알려주길 요청하는 書目이다.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에서는 지난 1월 28일의 밤중에 失火로 인해 正堂인 강당 10칸이 全燒되고, 동서 兩齋 역시 많은 부분이 불에 탔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화재로 강당에 걸려 있던 사액 현판과 창건시의 備忘記, 정조대에 내려온 賜祭文 편액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알렸다. 그것은 斯文의 불행이며, 사림들로서는 의귀처를 잃은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화재가 발생한 후 긴급하게 齊會하여 화재의 책임을 물어 任司를 黜籍하고, 수직을 섰던 院隸 또한 죄를 헤아려 벌주었다.
옥산서원은 1572년에 건립되어 이듬해인 1573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여타의 국학과 비교하여 사체가 정중하고, 규모도 크고 엄숙하여 특별한 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창건 당시 관찰였던 任說의 청원과 부윤 李齊閔의 노력과 뒤를 이어 감사 金繼輝의 장계로 사액까지 내렸다고 밝혔다. 아울러 열읍의 수령들이 기부한 곡식이 창고에 쌓이고, 돈이나 토지, 속사, 속점, 속촌 등을 구획하였는데 모두 감영과 경주부에서 힘쓴 결과였다고 했다.
그렇기에 옥산서원의 건물은 一鄕 사림의 것이라 할 수 없고, 一道 유생들의 장소라고 말하였다. 그렇게 존경하고 숭배하며 200여 년을 지켜오다가 현재 일체의 일이 멈추게 되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없던 일이었나 하루 아침에 화재로 강당이 소실되면서 그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강당이 없는 것은 옳지 않기에 강당을 중창하려고 하였으나 사림들의 힘이 약하여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건립시 규모를 계획하는 것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감영과 본부의 힘을 받았었는데, 현재 일의 형세도 감영과 본부에서 헤아려 주길 바랬다.
그래서 이에 감히 사실을 ㅤㅉㅗㅈ아서 보고를 하니 옥산서원의 사체가 다름이 있고 院宇의 화변이 罔測하지만 감영에 轉報하여 방법을 지시 받고 기간내에 새롭게 중건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결국 옥산서원 사림들은 서원의 건립과 사액 과정에서 지방관의 협조가 컸으며, 또한 역대 왕들의 은혜로 중요한 현판들이 소실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다른 국학과 달리 특별한 옥산서원의 건물 중건에 경주부와 감영에서 중건에 따른 방법을 알려주어서 기한 내에 건물이 중건될 수 있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서원 건물을 짓던 초창기의 사례와 같이 중건을 할 때도 감사와 경주부윤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옥산서원 강당인 구인당의 화재와 관련하여 鄕會가 열리기 전에 화재 사실에 대하여 경주부에 보고한 서목이다. 옥산서원은 사액서원으로서 특별한 곳이며 조정의 관심이 컸던 곳임을 강조하여 지방관의 지원을 얻으려고 했던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변화 」,『한국학연구』,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