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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서목(書目)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C.1839.0000-20170630.Y1750107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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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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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첩관통보류-서목
내용분류: 정치/행정-보고-서목
작성주체 옥산서원 사림, 경주부
작성시기 1839
형태사항 크기: 57.5 X 44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안내정보

1839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서목(書目)
1839옥산서원 사림이 경주부윤에게 강당인 구인당의 화재 사실을 보고하고 감영에도 소식을 알려주길 요청하는 서목이다.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에서는 지난 1월 28일의 밤중에 실수로 불이 나서 강당이 모두 소실되고 가까이 있는 동재와 서재도 피해가 있었다. 또한 강당에 걸려 있던 사액 현판과 창건시의 비망기, 정조대에 내려온 사제문 편액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화재의 책임을 물어서 당시 원임과 숙직을 섰던 원예들을 처벌하였다. 아울러 서원의 건립과 사액 과정에 지방관의 역할이 컸음을 강조하며 옥산서원은 경주의 향인들 뿐만 아니라 도내 전체 유생들의 장소라고 하였다. 이후 화재의 사실을 경주부에 보고하며, 경주부에서 감영으로 해당 사실을 전달해주길 요청하였다. 이처럼 경주부와 감영에 보고를 하면서 지방관의 역할이 옥산서원 건립과 유지에 지대했음을 강조한 것은 막대한 물력이 필요한 건물 중건 과정에서 지방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변화 」,『한국학연구』,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39玉山書院 士林이 慶州府尹에게 강당인 求仁堂의 화재 사실을 보고하고 監營에도 소식을 알려주길 요청하는 書目이다.
1839玉山書院 士林이 慶州府尹에게 강당인 求仁堂의 화재 사실을 보고하고 監營에도 소식을 알려주길 요청하는 書目이다.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에서는 지난 1월 28일의 밤중에 失火로 인해 正堂인 강당 10칸이 全燒되고, 동서 兩齋 역시 많은 부분이 불에 탔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화재로 강당에 걸려 있던 사액 현판과 창건시의 備忘記, 정조대에 내려온 賜祭文 편액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알렸다. 그것은 斯文의 불행이며, 사림들로서는 의귀처를 잃은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화재가 발생한 후 긴급하게 齊會하여 화재의 책임을 물어 任司를 黜籍하고, 수직을 섰던 院隸 또한 죄를 헤아려 벌주었다. 옥산서원은 1572년에 건립되어 이듬해인 1573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여타의 국학과 비교하여 사체가 정중하고, 규모도 크고 엄숙하여 특별한 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창건 당시 관찰였던 任說의 청원과 부윤 李齊閔의 노력과 뒤를 이어 감사 金繼輝의 장계로 사액까지 내렸다고 밝혔다. 아울러 열읍의 수령들이 기부한 곡식이 창고에 쌓이고, 돈이나 토지, 속사, 속점, 속촌 등을 구획하였는데 모두 감영과 경주부에서 힘쓴 결과였다고 했다. 그렇기에 옥산서원의 건물은 一鄕 사림의 것이라 할 수 없고, 一道 유생들의 장소라고 말하였다. 그렇게 존경하고 숭배하며 200여 년을 지켜오다가 현재 일체의 일이 멈추게 되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없던 일이었나 하루 아침에 화재로 강당이 소실되면서 그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강당이 없는 것은 옳지 않기에 강당을 중창하려고 하였으나 사림들의 힘이 약하여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건립시 규모를 계획하는 것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감영과 본부의 힘을 받았었는데, 현재 일의 형세도 감영과 본부에서 헤아려 주길 바랬다. 그래서 이에 감히 사실을 ㅤㅉㅗㅈ아서 보고를 하니 옥산서원의 사체가 다름이 있고 院宇의 화변이 罔測하지만 감영에 轉報하여 방법을 지시 받고 기간내에 새롭게 중건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결국 옥산서원 사림들은 서원의 건립과 사액 과정에서 지방관의 협조가 컸으며, 또한 역대 왕들의 은혜로 중요한 현판들이 소실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다른 국학과 달리 특별한 옥산서원의 건물 중건에 경주부와 감영에서 중건에 따른 방법을 알려주어서 기한 내에 건물이 중건될 수 있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서원 건물을 짓던 초창기의 사례와 같이 중건을 할 때도 감사와 경주부윤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옥산서원 강당인 구인당의 화재와 관련하여 鄕會가 열리기 전에 화재 사실에 대하여 경주부에 보고한 서목이다. 옥산서원은 사액서원으로서 특별한 곳이며 조정의 관심이 컸던 곳임을 강조하여 지방관의 지원을 얻으려고 했던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변화 」,『한국학연구』,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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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玉山書院士林書目
本院以去月二十八日夜半失火正堂十間盡爲灰燼東西兩齋亦多燒燬而
御賜扁額及創建時備忘記揭板
正廟朝賜祭文奉 敎揭板俱未免虐熖中燒了斯文之厄會此極士林之依歸無所民等顚倒齊會罔知攸措而不謹典守之任司
已爲鐫黜當次守直之院隷亦爲勘罪是在果大抵本院創設在於萬曆壬申宣 額在於翼年癸酉而事體之鄭重規
撫之縝嚴實與他 國學自別矣當初創建之時道伯任相公狀請而首唱之府尹李相公效力而躬率焉繼以黃江金尙
之狀聞而 宣額列邑諸守宰之捐廩而同事其他一經理一區劃何莫非 營府之所援力則本院院宇不徒爲一鄕士林一道
章甫之所尊崇而止矣典守二百有餘年龍蛇兵燹之亦所不及而一朝盡入於灰燼之中書院之不可一日無講堂而講堂重創固
非士林綿力之所可擔夯創始規劃旣多營府之彈力則目今事勢亦係 營府之軫念玆敢從實仰報爲去乎幸伏望以本
院事體之有異院宇火變之罔測轉報 營門以爲指敎方略及期重新之地事狀
己亥二月日 玉山書院士林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