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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대구 유학(幼學) 최영진(崔永鎭)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B.1839.0000-20170630.Y1750107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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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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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상서
내용분류: 국왕/왕실-보고-상서
작성주체 박이탄, 순상
작성시기 1839
형태사항 크기: 94.2 X 66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안내정보

1839년 대구 유학(幼學) 최영진(崔永鎭) 등 상서(上書)
1839년 11월 대구유학최영진 외 21명이 순상에게 옥산서원 재사액과 관련하여 사액이 내려오면 그것을 맞이하기 위하여 미리 각 읍 향교와 서원에 통보해 주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옥산서원은 1839년 화재로 강당인 구인당이 소실되었다. 그 이후 향내와 도내 유림들의 논의하여 강당 중건과 재사액을 결의하였다. 이후 8월 말 경상감영 앞에서 도회를 개최한 후 500여 명이 연명하여 경상감사 김도희에게 재사액을 요청하였다. 경상감사는 이러한 사실의 전말을 예조에 품의하고, 묘당의 결정을 기다렸다. 9월 말에 내려온 예조의 답변은 재사액을 결의하고, 나아가 어제제문판의 복각도 명령하였다. 재사액 결정 통보가 경주 옥산서원과 도내로 전달된 후 대구 유학 최영진 등은 11월 5일 감사에게 상서를 올려 사액 행렬의 일정을 알려주길 요청하였던 것이다. 본 상서를 이때 작성된 것이다. 감사의 답변을 받은 다음날이 11월 6일에 예조서리가 사액판을 만드는 글씨를 가지고 왔고, 경주부에서 사액판을 판각한 후 11월 30일에 옥산서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사액판은 이듬해인 1840년 3월 7일의 낙성식때 게액례를 행하여 사액현판과 어제제문판을 함께 걸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39년 11월 大丘幼學崔永鎭 외 21명이 巡相에게 玉山書院 재사액과 관련하여 賜額이 내려오면 祗迎하기 위하여 미리 각 읍 校院에 통보해 주길 요청하는 上書
1839년 11월 大丘幼學崔永鎭 외 21명이 巡相에게 玉山書院 재사액과 관련하여 賜額이 내려오면 祗迎하기 위하여 미리 각 읍 校院에 통보해 주길 요청하는 上書이다. 경주 옥산서원은 1839년 1월 말에 강당이 求仁堂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2월에 경주 서악서원에서 鄕會를 가지고, 도내의 校院 및 문중에 그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후 4월부터 도내에서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재사액을 논의하기 위한 道會 개최를 통보하는 안동 호계서원과 성주 회연서원 등의 통문이 도래하였다. 이처럼 도내 유생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새로운 감사인 金道喜가 부임하면서 옥산서원 중건과 사액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8월 24일 감영 앞 관풍루에서 열린 도회 직후 안동 이수응, 류진흥, 예안 이휘병 등을 소두로 도유 500여 명이 감영에 상서를 올려 옥산서원 재사액을 요구하였다. 이후 감사는 9월 6일에 예조로 옥산서원의 화변과 전후 사실을 전말을 알리고, 옥산서원 유생 李淵祥이 보내온 글을 廟堂에 올려 의논에 붙였다. 9월 24일 예조에서 순영으로 관문을 보내어 재사액은 밀양 예림서원의 사례에 따라 시행하며, 어제제문판의 재판각은 이전의 사례에 따라 감영에서 맡도록 하였다. 옥산서원은 9월 28일 감영으로부터 예조의 결정을 전해듣고 10월 14일에 경주 구강서원에서 인근 사림들과 齊會하여 祗迎의절과 서원에서의 迎額과 揭額의절을 의논하였다. 이후 11월 5일에 대구 유생 최영진, 박이단 등이 감영에 상서를 올려 사액이 도착하는 시간을 통보해주면 그때에 맞춰 열읍 사림이 지영하려 한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본 상서는 바로 11월 5일 올렸던 상서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인 11월 6일에 예조 서리 홍우기 일행이 額書를 가지고 11월 6일 감영에 도착하였다. 이에 감사는 서리 일행을 며칠 머물도록 한 후 곧바로 沿路에 있는 해읍 사림들에게 관문을 내어 儀仗을 갖추고, 유생은 건복을 갖춰 지영하라고 명령하였다. 옥산서원에서도 경주부 서쪽 서진교에 유생 여러 명을 보내어 서리 일행을 기다렸다. 11월 14일 서리 일행이 경주부의 경계에 도착하였지만 경주부에서 의장 행렬을 보내지 않아서 기다렸다가 경주부 관아에 들어가 액서를 봉안하였다. 이후 각수를 불러 판각을 시작하여 11월 30일에 액판을 가지고 서원에 오기로 하였다. 옥산서원 측은 1792년 당시의 어제제문판을 봉안할 때를 참고하여 29일 93명의 향내외 유생이 참석한 가운데 영액시 집사를 분정하고, 11월 30일 67명의 유생이 더 참여한 가운데 영액의례를 진행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20세기 초반 옥산서원 강당인 구인당의 화재와 관련하여 향촌사회의 대응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大丘幼學崔永鎭等謹齋沐再拜上書于 初五日午時[官印]
巡相國閤下伏以慶州玉山書院火變之後 閤下轉報春曹而自
上更有宣額之命 生等仰頌 閤下尊賢之意衛道之誠出尋常萬萬而第伏念 額號 宣賜之時自 營門奉送之除不可無多士祗迎隨護之儀伏望前期
行關於所遇諸邑校院使無臨時不知之獘事謹冒昧以 陳
己亥十一月 日
進士朴履坦
都珩魯
幼學李浚
朴基亨
朴基莢
李瀗
崔孝述
蔡沁
孫養學
朴履周
崔瀗
郭孝達
柳應衡
崔觀述
朴履基
孫廷煥
趙泰龍
都冕珪
都章珪
郭泰魯
蔡{氵+奎}
待其自春曹
賚近爲先到
委向事
初五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