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대구 유학(幼學) 최영진(崔永鎭) 등 상서(上書)
1839년 11월 대구유학최영진 외 21명이 순상에게 옥산서원 재사액과 관련하여 사액이 내려오면 그것을 맞이하기 위하여 미리 각 읍 향교와 서원에 통보해 주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옥산서원은 1839년 화재로 강당인 구인당이 소실되었다. 그 이후 향내와 도내 유림들의 논의하여 강당 중건과 재사액을 결의하였다. 이후 8월 말 경상감영 앞에서 도회를 개최한 후 500여 명이 연명하여 경상감사 김도희에게 재사액을 요청하였다. 경상감사는 이러한 사실의 전말을 예조에 품의하고, 묘당의 결정을 기다렸다. 9월 말에 내려온 예조의 답변은 재사액을 결의하고, 나아가 어제제문판의 복각도 명령하였다.
재사액 결정 통보가 경주 옥산서원과 도내로 전달된 후 대구 유학 최영진 등은 11월 5일 감사에게 상서를 올려 사액 행렬의 일정을 알려주길 요청하였던 것이다. 본 상서를 이때 작성된 것이다. 감사의 답변을 받은 다음날이 11월 6일에 예조서리가 사액판을 만드는 글씨를 가지고 왔고, 경주부에서 사액판을 판각한 후 11월 30일에 옥산서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사액판은 이듬해인 1840년 3월 7일의 낙성식때 게액례를 행하여 사액현판과 어제제문판을 함께 걸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