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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경주(慶州)사림(士林)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B.1839.0000-20170630.Y175010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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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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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상서
내용분류: 국왕/왕실-보고-상서
작성주체 이연상, 경주사림, 경주부윤
작성시기 1839
형태사항 크기: 116.5 X 67.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안내정보

1839년 경주(慶州)사림(士林) 상서(上書)
1839년 2월 13일에 경주 서악서원에서 옥산서원 강당인 구인당의 중건과 관련하여 경주 사림이 향회를 가진 후 경주부윤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고자 손영록, 한공익, 최원복 외 71명이 연명한 상서이다. 본문을 보면 서원이라는 것은 상서의 유산이며, 상서[학교]의 흥하고 쇠함은, 사문의 흥하고 쇠함과 관계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 화재의 전말은 이미 옥산서원 사림들이 문서로 전부 보고하였고, 그에 대하여 감영에 보고한다는 제음도 받았다고 밝혔다. 나아가 현인을 존경하고, 도를 지키는 곳이 재앙에 이른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사림들이 재화를 모으는 뜻을 도탑게 하였다고 밝혔다. 그것은 상서를 올린 당일인 2월 13일에 서악서원에서 있었던 향회에서의 결의를 말하는 것이다. 경주 사림들은 옥산서원이 이전 시대의 현인을 제향하는 곳이자 많은 선비가 강학하는 곳으로서 지금까지 300년을 이어왔지만 하루아침에 다 타버렸으니, 이것은 경주의 선비라면 지키고 보존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래서 옥산서원을 하루빨리 영건하기 위하여 움츠릴 겨를도 없이 모든 사림들이 논의하고 기획하기 위하여 향회에 나온 것이라고 했다. 사림들은 옥산서원의 규모에 대하여 말하며 어떤 것도 조종조에서 비상한 특전이 아닌게 없으며 하나의 서까래, 하나의 통 모두 당시 이름난 관리와 명석한 신하를 포함하여, 고을의 선비와 수령, 감영의 관계자들이 온 힘을 다하여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경주의 사림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각기 재앙에 대하여 규명하고 있지만 그 마음이 어떠할 지는 짐작도 못하겠다고 밝혔다. 경주 사림들은 옥산서원의 건립 과정에서 지방관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음을 실례를 들어 말하고 있다. 이는 당대 경주부윤의 협조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옥산서원은 문원공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는 곳으로 만력 임신년인 1572년에 관찰사 임설의 장계로 청원하고, 다음해인 1573년(계유)에는 황강 김계휘가 계달하여 사액이 내려졌다. 힘써 재물을 모으는데 이르러 그 때에 있었던 부윤 이제민과 박승임이 서로 연이어 녹봉을 내어 부담을 줄이고 서로 기반을 지키고 성하도록 반드시 몸소 실천하였다. 경주 내 人士의 모범이 되어 선비라는 자는 ㅤㅉㅗㅈ아서 일을 하고, 장인이라는 자들은 기교를 다하여 일을 하였다. 民等은 벽지에 거주하고 있어서 비록 넓게 끌어들일 수 없어서 멀리서 살펴서 듣고 본 것을 기록하여 곧 위에서 인도하고 아래에서 ㅤㅉㅗㅈ는 것이 백록동 고사와 같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백독동 서원과 옥산서원이 다른 것은 이미 옥산서원은 사림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그것은 감영과 경주부와 관련되어 있어서 보통 기와와 담이 깨지고 금이 가는 것은 의당 감영과 본부에 달려가 알려야 한다고 했다. 하물며 소실된 강당 내에 있었던 국왕의 글씨나 국왕이 준 현판 즉 사액판 같은 것이나 선조대의 비망기, 숙종대 경연석상에서의 전언, 정조대 친필 사제문 등의 편액으로 걸려있기에 더욱 사림보다는 관에 관련되어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역대 국왕들의 글과 연계하여 감영과 경주부의 협조를 받고자 이것들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300년 동안 많은 사림이 도를 논하고 강학하며 우러러 보고 공경하는 의식이 남았 있던 강당이 하루아침에 소실되었는데 그것은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사문에서도 큰 변고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악록서원의 남헌과 백록동서원의 고정 또한 일찍이 한 번씩 소실되었지만, 그 중건에 당시 省의 우두머리인 수령이 힘을 다하여 두루 글을 내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옥산서원은 우리나라의 악록서원이라고 말하며 한번 소실된 건물을 중건하는데 수령의 역할이 크고, 이전에 전례도 있음을 알렸다. 나아가 가까이에는 경주에서도 그러한 사례가 있다고 하였다. 사림들은 서악서원의 강당 개건과 이후 재사액을 받은 사연을 말하며 자신들의 말은 경주부에 그와 관련된 장부가 있다고 했다. 또한 옛날의 의리를 끌어다가 지금의 사례에 헤아려서 옥산서원이 흥하고 폐하는 것도 경주부윤의 책임이며, 부윤의 일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서원에 있어서 하루라도 강당의 역할이 없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조속히 건물을 중건하여 강당의 기능을 살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공사는 감영과 경주부와 관련 없다는 듯이 사림들만이 오로지 일을 할 수는 없기에 여럿이 성주에게 하소연하니 특별히 생각하시어 감영에 글로 보고하여 정해진 기한에 중창할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다고 했다. 경주부윤은 14일 제음에서 강당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사림의 요구대로 감영에 보고하고, 나아가 사림들이 강당 중건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 관에서도 그 때를 맞춰 도울 것이라고 판결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 」,『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39년 2월 13일에 慶州 西岳書院에서 玉山書院 講堂인 求仁堂의 重建과 관련하여 慶州 士林이 鄕會를 가진 후 慶州府尹에게 그 결과를 보고한 上書
1839년 2월 13일에 慶州 西岳書院에서 玉山書院 講堂인 求仁堂의 重建과 관련하여 慶州 士林이 鄕會를 가진 후 慶州府尹에게 그 결과를 보고한 上書이다. 옥산서원에서는 1839년 1월 말에 구인당인 강당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300년 이상 원형을 유지해오던 강당의 소실은 서원 내외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옥산서원『求仁堂重建日記』에는 당시 강당의 화재에서부터 낙성식까지 1년 간의 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참고가 된다. 본 상서와 관련한 전후의 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옥산서원은 화재이후 堂會와 齊會를 열어 舊院任을 벌하고, 새로운 원임을 선발하였다. 또한 조속히 공사를 시작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서원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공사자금을 수합하였다. 나아가 공사에 필요한 材木을 구하기 위한 伐木을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화재 사실에 대하여 관에 보고하고, 향내에는 2월 13일 西岳書院에서 鄕會 개최한다고 알렸다. 향회를 개최한 것은 건물 중건에 막대한 물력이 소모될 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에 이를 성사하기 위해서는 경주부내 각 처의 도움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향회에서 결정된 公議를 토대로 道內에 통보하여 도내 각처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월 13일 서악서원에 모인 수백 명의 경주부 유생들은 향회를 개최하기에 앞서 옥산서원 원임으로 천거된 원장 進士 李海祥과 齋任 李翊儉, 刊任 李彛祥을 인준하고, 曹司에 孫永德·崔濟寧을, 公事員에 李泰元·韓公琦·權致福·李殷錫 등을 圈出한 후 강당 중건과 助錢을 논의하였다. 경주부 사림들은 옥산서원의 변고를 부내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에 중건을 실질적으로 관장할 여러 任司를 각 가문에서 고루 선발하였는데, 이들은 당시 경주부를 대표하는 사족들로서 그들 가문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기 위한 조처였다. 우선 전체 공사를 관장할 도도감에는 孫鍾遠·生員 南鴻陽·前正言 李凝祥 등 3명이 선출되었다. 손종원은 양동 서백당의 경주손씨 종손이었으며, 남홍양은 순천부사와 옥산서원 원장을 지낸 寓菴 南九明의 손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이응상은 정조대에 사환하여 명망있는 전직 관료였다. 또한 이들 경주손·영양남·여주이씨 가문이 옥산서원의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도도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강당 중건을 감독할 成造都監에 李奎說·韓文起·崔瑋·孫鍾述·權致發 등을 임명하고, 실제 공사를 주관한 成造有司에 李泰元·辛學成·曺宅仁·權周煥·前參奉 李鍾祥·생원 崔世麟·李耆祥·李晦慶·李樹文·徐夏俊·任楷·鄭好儉·李在佰·孫星壽·생원 李在伋·李殷錫·李泰壽 등 17명을 선출했다. 기와를 제작하는 瓦窑有司에는 蔣周胤·金熙大·金仁器·李升鉉 등이, 기와를 운반하는 運瓦有司에는 崔思漢·孫永敏·權致根 등이 임명되었다. 공사 기간 중 인부와 원유들에게 제공하는 음식을 담당하는 穀物有司에는 韓有元·李錫輔·柳光扚 등이, 공사 비용를 담당하는 錢物有司에는 陳羲宅·李復殷·鄭志誠 등이 선출되었다. 향회 이전부터 옥산서원 당회의 결정으로 벌목과 運木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이를 관장할 伐木有司에는 權致敏·白光祿·朱宗海 등이, 運木有司에는 徐有仁·黃宅麟·鄭來元·權致福·孫志魯 등이 임명되어 중건 업무를 분장하도록 했다. 이들 임사들은 대부분 옥산서원이 있는 부북의 안강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자들이었는데, 그것은 공사기간 중 수시로 이를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향회에서는 공사를 담당하는 자들을 선발한 후 중건 비용을 마련하는 방법과 收錢을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다. 중건 비용은 향내 향교·서원·사우와 옥산서원과 서악서원의 院錄에 있는 각 문중들의 多少와 貧富를 고려하여 排錢을 책정하고, 경주부를 西面·南面·東面·江西·江洞 등의 5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각 都廳을 두고 기일에 맞춰 옥산서원으로 배전을 거둬 보내도록 했다. 이어서 수전을 총괄하는 都都廳에 전 승지 이연상을 권점하고, 5개 지역으로 구분한 각 도청의 담당자로 任致權·李樹文·崔思得·韓公翼·徐星政 등을 선출하여, 배전을 감독하여 거두어들이도록 하였다. 이후 공의로서 결정된 사안을 도내에 통문으로 알리는 한편 경주부에 呈訴하였는데, 경주부에서는 감영에 보고하여 중건하는 일에 관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을 도모하겠다고 답변이 왔다. 이때 경주부에 올리는 상서의 소두는 孫永祿·韓公翼·崔元復 등의 3명으로 하고, 상서를 들고 갈 유생은 李益脩·李在海로 정하여 향회 당일인 13일에 경주부에 제출하였다. 또한 도내의 보낼 통문은 李公祥과 辛學成이 짓고, 이를 李在昇과 李益脩이 등서하여 도내에 두루 알리도록 했다. 그 외에 李在衍과 李在海을 直日로 선발하여 당일의 사실을 기록하고, 중건하는 일의 始終과 排錢의 收議 등에 관한 모든 사실을 기록하도록 했다. 본 상서는 이처럼 향회 당일에 작성하여 경주부윤에게 발송된 것이며, 부윤은 다음날인 14일에 제음을 써서 주었다. 실제 상서에 연명한 사림들은 손영록, 한공익, 최원복 외 71명이다. 상서의 내용은 옥산서원이 사액서원이자, 강당 내에 列聖朝의 글들이 많이 남아있었던 특별한 곳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서원의 중건에 감영과 경주부의 협조를 요청하면서 중국의 故事를 인용하고 있다. 결국 옥산서원은 관청에서 더욱 신경쓰고 관리해야 할 重地라는 것과 사림들이 솔선하여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경주부윤은 제음에서 놀라운 심경을 표현하며 사림들의 요구대로 감영에 文報하고, 나아가 사림들이 중건과 관련하여 상의하여 진행하는 대로 관에서도 협조할 것이라고 했다. 옥산서원 구인당은 향회 이후 향내 사림들의 적극적인 부조와 수개월 후 도회를 통해 도내 사림들의 협조를 받아 원활히 공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경상감사의 적극적은 후원으로 물력을 보조받고, 재사액도 이루어졌다. 결국 공사한지 1년이 지난 1840년 3월 초에 낙성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낙성식에는 경상감사와 경주부윤 및 인근 12개 고을의 수령과 약 1만명의 유생들이 참여하였고, 당일의 백일장에는 7천여 명이 응시하는 등 도내의 관심이 매우 컸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20세기 초반 옥산서원 강당인 구인당의 화재와 관련하여 향촌사회의 대응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 」,『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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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慶州士林幼學孫永祿韓公翼崔元復等謹齋沐上書于
城主閤下伏以院者庠序之遺也庠序隆替斯文之興喪係焉本鄕玉山書院火變顚末已悉於本院士林文報而至蒙傷痛報 營之 題旣有以仰見尊賢衛道
吊災哀禬之摯意矣 先正妥靈之所多士講學之地盖三百年於玆而一朝灰燼此莫非本州爲士者不謹典守之責而使本院營建盡出於士林之經劃猶
自惶蹙之不暇而况院宇之次第營表何莫非 祖宗朝非常之特典而一椽一桶皆自當時名卿碩輔綰郡章莅營關者之苦心殫力則今此鬱攸之災雖天非人而
闔州士林聚首相吊各自咎責尤不知所以爲心者矣伏惟本院卽 文元公晦齋李先生尸祝之所而萬曆壬申道伯任相公狀請而刱建之翼年癸酉黃江金尙書
達而 宣額焉至於辦物鳩材又有其時本尹李公齊閔朴公承任相繼而捐廩以至相基調丁必躬必親本州之人士則爲士者趍事而已爲工者殫巧而已民等居在僻鄕雖不
能廣引遠諦而以耳目之所覩記則上倡下從一如白鹿洞故事者恐無如此院者本院旣非士林之所專輒而係是營府之所幹當則雖尋常瓦墁之毁畫義當奔告於
營府而矧玆講宇 御書於是 御額於是 宣廟朝備忘記在焉 肅廟朝筵說在焉 正廟朝親製賜祭文揭板在焉三百年多士論道講學之餘瞻望而敬
式者不啻如曲阜之履烏墮之弓而一朝蕩然依仰無所又豈非主斯文莅玆土者之所當惕念處耶嘗考 大明一統志南軒之嶽麓考亭之鹿洞亦嘗一經灰燼而其重建
之役亶出於當時省伯守臣之竭蹶周章則今此本院卽吾東之嶽鹿而且以本邑近例言之西岳書院亦嘗有是?改建堂宇改請 恩額專籍州家之句管則援古義
揆今例此院之興廢亦 閤下責也 閤下事也有院則不可一日無講堂有役則無一事不關於 營府故玆敢齊聲仰訴于 城主閤下伏乞特軫 盛念轉報營門
以爲剋期重刱之地千萬祈懇之至
己亥二月 日
幼學崔瑥
李奎說
辛學成
承旨李淵祥
幼學李泰元
李鼎修
李基昌
曺宅仁
生員李耆祥
幼學孫永壽
李樹文
蔣周胤
權賁煥
正言李凝祥
李晉祥
幼學柳在淳
韓公琦
孫志魯
韓有元
崔思萬
鄭師儉
李奎魯
郭柱漢
參奉李博祥
李鍾祥
注書崔斗錫
幼學南有龜
韓公揆
朴祥五
崔漢臣
徐芝俊
孫永獻
崔世伯
崔翰起
朱陽鳳
李殷錫
李在野
李述祥
孫星冕
金仁器
權度運
權致福
崔濟寧
李龜錫
崔晶壽
孫星壽
南有炳
任弼俊
孫賢采
李文彬
生員李在伋
幼學李寀祥
柳元龍
李在昇
金熙大
李在潤
孫永德
李在衍
曺心海
辛宅義
李大源
李復殷
李在海
李宗彬
李佑祥
李圭淳
孫宅祚
曺玉海
權啓運
李能寬
李汝久
講堂所重雖與正堂
有異驚心則極矣?
?措辭報營而重
刱之方多士想應從
速區劃當於伊時
官亦圖助向事
十四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