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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사림(士林) 김최선(金最宣)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B.1825.0000-20170630.Y1750107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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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상서
내용분류: 국왕/왕실-보고-상서
작성주체 이해상, 이정익, 옥산서원 유생, 순상
작성시기 1825
형태사항 크기: 123.5 X 70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안내정보

1825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사림(士林) 김최선(金最宣) 등 상서(上書)
1825년 8월 경주 옥산서원 사림 유학 김최선, 손영수, 이해상 외에 104명 이 순상에게 성손 이식의 산송과 같은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옥산서원 주변의 네 개의 산[화개산·자옥산·무학산·도덕산]과 계곡[紫溪]에서 어떠한 행위도 일체 금지하여 보호하는 구역으로 설정하는 완문을 내려주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후손 이식과의 산송이 3개월 이상 이어져오면서 신임 부윤과 이전의 겸직 수령이 모두 옥산서원 사림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신임 부윤은 무덤을 파내어 옮기는 기한을 정하기도 했지만, 이식의 반발이 심하였다. 이에 경상감사 즉 순상이 판결하여 이식의 산송이 마무리가 되었다. 그 후 다시 옥산서원 사림들은 순상에게 본 상서를 올려서 다른 자들이 이식처럼 옥산서원 주변에 무단으로 일을 벌여 새로운 송사가 발발할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내었다. 그래서 향후 그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장 큰 공신력을 가진 순상의 완문을 성급하여 주길 요청하였다. 옥산서원 사림들은 완문을 요청하면서 옥산서원 주변의 보호구역을 서원 주변의 네 개 산으로 까지 범위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순상은 어떠한 근거로 어디까지 지정할 것이라는 근거가 필요하다고 보고, 옥산서원 사림들이 요구하는 대로 지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결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25년 8월 慶州 玉山書院 士林 幼學 金最宣, 孫永壽, 李海祥 외에 104명 이 巡相에게 姓孫 李埴의 山訟과 같은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옥산서원 주변 四山의 협곡을 일체 禁護하는 完文을 내려주길 요청하는 上書
1825년 8월 慶州 玉山書院 士林 幼學 金最宣, 孫永壽, 李海祥 외에 104명 이 巡相에게 姓孫 李埴의 山訟과 같은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옥산서원 주변 四山의 협곡을 일체 禁護하는 完文을 내려주길 요청하는 上書이다. 옥산서원 사림들은 후손인 이식의 산송이 3개월 이상 오래되었고 兼官이 처음 성급한 제음으로 애써 붙잡아 가두고 무덤을 파내는 기한을 새로운 부윤이 거듭 정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식이 저항하였으나, 순상에게 의뢰하여 다행히도 은혜를 입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순상은 한 번 듣고는 일을 헤아려서 이식의 편의 말을 엄히 처단한 결과로써 빠르게 서원 내에서 무덤을 파서 없애자고 들고 일어나서 많은 선비들일 위로 받고 거주민들의 원망도 해소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지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거듭 엎드려 생각해보면 세상의 도리가 점차 더러워지고, 인심이 더욱 달라져서 금일의 이식과 같은 송사가 비록 언제나 온당한 첩지가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다른 때에 종종 이식과 같은 무리가 거듭 몇 번이고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들어서 이러한 등의 訴訟의 事端이 없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즉 이식의 송사가 전체 사림의 뜻에 부합되도록 결론이 났지만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을 것을 염려한 것이다. 옥산서원 사림들은 儒宮을 빙자한 힘은 公家 즉 관아의 文字를 넘을 수 없으며, 공가의 문자의 중요함은 監營의 흔적보다 높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애석하게도 한 장의 완문이 없으니 발급을 요청하고 더하여 서원의 엄숙함을 만들어서 지금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사림들은 옥산서원 주변의 하나이 골짜기와 네 개 산의 안에서 멀고 가까움과 보이고 안 보이는 것을 논하지 말고, 무릇 朝家에서 그린 그림의 경계에 연계하여, 先賢이 시를 읊은 곳과 名勝를 아울러 일체 禁護하여 영원히 막도록 꾀하여 점검함으로써 백세의 무궁한 폐단을 막도록 해주길 요청하였다. 조가에서 그린 그림은 영조대에 옥산서원과 주변의 경치를 그려서 바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옥산서원과 그 주변의 자계천 골짜기와 계정, 독락당 및 자옥산, 도덕산, 화개산, 무학산 등은 회재가 생전에 거닐면서 시를 읊고 학업을 하던 곳으로 회재는 「玉山十四詠」,「玉山十六詠」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옥산서원 사림들은 이처럼 서원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을 설정하여 일체의 무덤, 벌목, 채집 등을 금지하여 서원의 위엄이 서도록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상은 禁護지역을 지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즉 어떤 것을 따라서 어디까지 할 것인지 근거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19세기 초반 옥산서원 주변의 산송과 관련한 내용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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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玉山書院士林幼學金最宣孫永壽李海祥等謹再拜上書于
巡相公閤下伏以本院姓孫李埴山訟事端恰至三數月之久侤案始成於兼官而費經滯囚掘限屢定於新府而猶事抵賴幸蒙 閤下一聞洞燭片言嚴斷果於晷刻之內便有掘撥之擧多士之慰望居民之洩怨
當復何如仍伏念世道漸汙人心益渝今日李埴之訟雖或幸而妥帖安知無異時幾李埴輩復做出幾番此等訟端也儒宮憑藉之力莫過於公家文字公家文字之重莫尙於 營門卽蹟更乞 閤下毋惜
一紙完文俾作院莊從今以往則一壑四山內無論遠近見不見凡係 朝家盡圖中境界 先賢題詠處名勝幷爲一切禁護永絶窺點以爲一副不刊之案以杜百世無窮之獘事千萬祈懇無任之至
乙酉八月 日
進士李鼎益
幼學孫星渭
金宅鎭
李洛祥
權德煥
李鼎宖
進士李鼎儼
幼學孫鍾遠
鄭來永
李奎鎭
承旨李鼎秉
幼學鄭來萬
陳東軫
蔣逸彦
李牧祥
李福祥
李奎說
李培元
辛學成
曺昌翊
金永錫
蔣師赫
孫鍾漢
進士任{牧/木}
幼學李在亨
李在愚
孫永祿
孫志曾
孫星近
蔣世春
權致殷
權賁煥
正言李淵祥
幼學孫星遠
鄭天一
徐行一
徐有仁
李觀永
李蓍祥
李義祥
李在發
進士南鴻陽
崔祈永
幼學李孝永
李昊祥
李升元
李舜祥
李岐祥
金時益
蔣世榮
進士崔濟宅
幼學任致永
李鼎三
李在貞
李春祥
李家祥
李宗祥
李在暉
李馥祥
孫鍾寀
孫鍾任
鄭來興
崔世鳴
李穆祥
李彛祥
進士李耆祥
幼學李在根
李在野
李凝祥
陳義民
孫鍾泰
孫志魯
孫星政
權濟煥
李錫燦
進士李博祥
幼學李烱祥
李在睦
李禾祥
李善祥
金永祜
金永龜
李在誠
李在星
李瑜祥
李堯祥
李民祥
李賢祥
南有麟
李在玉
朱采若
南龜陽
黃履瓚
曺心海
李復祥
李在心
李能安
孫冕祚
孫宅祚
李鼎揵
李田祥
金時晉
李在晉
李咸永
此事有難硬定以
從某至某之事
初九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