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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섬학소안(贍學所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1893.4721-20160630.Y162190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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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주체 풍기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작성시기 1893
형태사항 크기: 30.5 X 28.5
수량: 5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893년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풍기향교(豊基鄕校) 섬학소안(贍學所案)
1893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에서 교육 장려를 위해 결성된 섬학계(贍學?)의 계원 명부다. 자료는 ‘섬학소안(贍學所案)’이라는 표제로 엮여져 있는데, 1893년 7월 풍기군수(豊基郡守) 이범선(李範善)이 작성한 「섬학계서(贍學?序)」, 1893년 11월 풍기군의 사족 황범린(黃範鱗)이 작성한 「섬학계서」, 같은 달 풍기군의 사족 황종하(黃鐘夏)가 작성한 「서섬학소명첩후(書贍學所名帖後)」, 그리고 계원의 명부인 계안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풍기군수 이범선풍기군 사족 황범린·이범선의 글에는 섬학계의 결성 경위와 의의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90년 12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제수된 이헌영(李??永)은 교육·교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특히 도내 각 고을에 지시를 내려 향교를 중심으로 선비들을 교육시키고, 그 성과를 시험케 하였다. 1893년 3월 임기를 마치고 경상도를 떠나게 된 이헌영은 자신의 교육 정책이 지속적으로 실시되기를 기원하며, 강학 활동의 재원을 보조하기 위해 자신의 녹봉 3,500냥을 도내 각 고을에 기부하였다. 이에 풍기군에도 50냥의 돈이 내려졌고, 다시 풍기군수 이범선이 자신의 녹봉 50냥을 여기다 보태었다. 풍기군의 재지사족들도 각 문중(門中)별로 자금을 기부하니, 이렇게 모인 돈이 200여 냥에 달했다. 그리고 이 돈을 운영하기 위해 ‘섬학계’를 결성하였다. 아울러 운영을 위한 과조(科條)를 제정하였고, 모인 돈은 이자를 놓아 증식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성실한 자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관리케 하였다.
계안에는 섬학계에 간여하는 계원의 성명이 자(字)·출생 간지(干支)·본관과 함께 기재되어 있다. 모두 175명의 계원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을 성관(姓貫)별로 나열하면 창원황씨(昌原黃氏) 48명, 평해황씨(平海黃氏) 25명, 순천김씨(順天金氏) 16명, 영양남씨(英陽南氏)·진성이씨(眞城李氏) 각 9명, 순흥안씨(順興安氏) 8명, 안동권씨(安東權氏)·풍기진씨(豊基秦氏) 각 7명, 평산이씨(平山李氏) 4명, 상산김씨(商山金氏)·영천김씨(永川金氏)·선성김씨(宣城金氏)·일직손씨(一直孫氏)·인천채씨(仁川蔡氏) 각 3명, 현풍곽씨(玄風郭氏)·경주김씨(慶州金氏)·함창김씨(咸昌金氏)·풍산류씨(豊山柳氏)·여산송씨(礪山宋氏) 각 2명, 예천권씨(醴泉權氏)·안동김씨(安東金氏)·의성김씨(義城金氏)·청풍김씨(淸風金氏)·선산길씨(善山吉氏)·고령박씨(高靈朴氏)·평산신씨(平山申氏)·영월신씨(寧越辛氏)·단양우씨(丹陽禹氏)·선성이씨(宣城李氏)·인동장씨(仁同張氏)·청주한씨(淸州韓氏)·남양홍씨(南陽洪氏)·제안황씨(齊安黃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풍기군을 대표하던 재지사족들이 섬학계에 참여했던 만큼, 이들 가문이 당시 풍기군 지역 향론(鄕論)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敬窩集略』,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93慶尙道 豊基郡에서 교육 장려를 위해 결성되었던 學契의 명부
자료의 내용
1893慶尙道 豊基郡에서 결성된 贍學?의 계원 명부다. ‘贍學所案’으로 표제 되어 있으며, 豊基鄕校에 전해지고 있다. 섬학계는 慶尙道觀察使 李??永이 지원해 준 자금을 바탕으로 풍기군 지역 교육 장려를 위해 결성된 일종의 學契다. ‘섬학소안’은 豊基郡守 李範善黃範鱗의 「贍學?序」, 黃鐘夏의 「書贍學所名帖後」, 그리고 계안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풍기군수 이범선의 서문은 1893년 7월 작성되었다. 해당 서문에는 섬학계 결성 경위와 의의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는데 그 대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라에서 유학을 숭상하고 있기에 나라에는 學이 있고 郡에는 序가 있으며, 이곳에서 先師를 제향하고 그들의 학문을 絃誦한다. 그 결과 嶺南 지역에서는 安珦·李滉과 같은 名賢이 배출되어, 동방의 ‘鄒魯之鄕’라는 칭호를 들었으나, 근래 士風이 날로 쇠퇴해져 ?堂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閭閻에서는 邪說이 恣行되고 있으니 매우 개탄스럽다. 이는 모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聖上께서 팔도에 영을 내려 儒冠을 쓰고 儒服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유학을 크게 일으키게 하였다. 이때 이헌영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헌영경상도에 많은 폐단이 있는 것을 보고, 興學에 뜻을 두게 되었고, 科條를 만들어 고을의 講長과 몇몇 任員들로 하여금, 학문 능력을 시험 치게 하는 등 講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고 돌아갈 때, 3,500냥의 돈을 녹봉에서 내어 경상도 71개 고을에 나누어 주었으며, 이것을 勸學錢으로 사용케 하였다. 이로써 각 고을에 50냥의 돈이 지급되니, 풍기군도 그 혜택을 받았다. 풍기군의 선비들은 이 돈이 오랫동안 전하기를 도모하며, 각기 돈을 내었고, 나도 힘을 보태어 200여 냥에 달하는 돈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섬학계를 설립하였으니, 많은 선비들이 모여 강학하고 매달 익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옛 도가 일어나 다시는 쇠퇴해지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여기 小白山 남쪽 고을에서는 문학하는 선비가 많이 배출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성상의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면, 나는 모두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의 공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범선의 서문에서 확인되듯이 섬학계는 경상도관찰사 이헌영경상도 列邑에 나누어 준 50냥과 풍기군수 이범선이 기부한 돈, 그리고 풍기군 사림들이 모은 돈 200여 냥을 바탕으로 결성되었다. 이어 수록된 황범린의 서문은 1893년 11월 下澣에 작성된 것이다. 황범린풍기군의 유력 사족 가문인 平海黃氏 출신으로, 일찍이 풍기향교 都有司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황범린의 서문도 이범선의 서문과 마찬가지로 섬학계 결성 경위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는데, 풍기군수 이범선이 이때 50냥의 돈을 녹봉에서 지원해 준 것과 殖利를 통해 섬학계의 자금을 증식할 것이라는 운영 방안이 추가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풍기군의 儒士들은 그렇게 형성된 돈을 영구히 하고자 殖利하기로 의논을 모았으며, 養士所를 설립하였으니, 이름을 ‘贍學’이라 했음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풍기군의 각 門中이 약간의 돈을 내어 섬학계의 재원을 형성했다고 한다. 황범린의 서문 후반부에서는 경전과 여러 선현의 故事를 인용하여 교육과 교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놓았다. 즉 섬학계의 결성이 北宋胡瑗湖州蘇州敎授가 되어 名公을 배출시킨 것, 당나라李渤廬山에 학교를 창설하여 文敎가 울창하게 일어나게 한 것과 같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황범린이 교육과 교화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은 黃俊良(1517~1563)이 작성한 「紫陽書堂記」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황준량풍기군 출신으로 황범린의 顯祖로 알려져 있다. 한편, 서문 말미에는 ‘三不朽’에 비유하며, 경상도관찰사 이헌영풍기군수 이범선의 공을 칭송해 놓았다.
1893년 11월 下浣에 황종하가 작성한 「서섬학소명첩후」에서도 섬학계 결성 경위와 ‘섬학소안’ 편찬 의의가 언급되어 있다. 황종하는 평해황씨와 더불어 풍기군이 대표적인 사족 가문인 昌原黃氏 출신으로, 1880년 풍기향교 도유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서섬학소명첩후」에서는 먼저 三代의 제도와 『小學』의 구절, 송나라朱子程子가 마련한 학문의 절차 등을 거론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피력하였으며, 우리 東方도 여러 儒賢이 배출되어 송나라의 풍습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래 도가 점점 떨어지고 儒風이 날로 투박해져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는데, 다행히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이 학문에 뜻을 두었기에, 경상도에 처음 부임할 때 外邑에 布告하여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月朔에 강학을 하게 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養士를 위한 비용을 劃付했음을 밝혀 놓았다. 여기다 풍기군수의 지원과 고을 선비들의 모금으로 섬학계 재원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根幹한 자를 특별히 뽑아 재원을 관리케 했으며, 이를 잘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科條를 세웠음도 추가로 언급하였다.
계안에는 계원의 성명, 출생 干支, 字, 본관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모두 175명의 계원이 확인되는데, 이들을 姓貫별로 나열하면 昌原黃氏 48명, 平海黃氏 25명, 順天金氏 16명, 英陽南氏·眞城李氏 각 9명, 順興安氏 8명, 安東權氏·豊基秦氏 각 7명, 平山李氏 4명, 商山金氏·永川金氏·宣城金氏·一直孫氏·仁川蔡氏 각 3명, 玄風郭氏·慶州金氏·咸昌金氏·豊山柳氏·礪山宋氏 각 2명, 醴泉權氏·安東金氏·義城金氏·淸風金氏·善山吉氏·高靈朴氏·平山申氏·寧越辛氏·丹陽禹氏·宣城李氏·仁同張氏·淸州韓氏·南陽洪氏·齊安黃氏 각 1명 순이다.
한편, 자료 말미에는 尊聖廳儒生으로 金思永韓明洙 2인이 기재되어 있다. 자료가 성책된 후 부기된 것 같은데, 섬학계와 존성청과의 관계는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지방 교육 정책의 실태와 풍기군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치된 국립교육기관으로 지방관과 재지사족들이 합심하여 운영하였다. 특히 ‘興學’에 관심을 둔 지방관은 향교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지방 교육을 장려하기도 했다. 1890년 12월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어, 1893년 3월까지 재임한 이헌영도 그 중 한명이다. 이헌영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교육과 교화를 위해 鄕約 시행과 강학 실시를 도내 각 고을에 지시하였다. 특히 매월 향교에서 강학을 실시케 하였으며, 그 성과를 考課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녹봉을 각 고을에 지원하여 지속적인 강학 시행을 도모하였는데, 이시기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의 활약은 그의 日錄인 『敬窩集略』 수록 「嶠蕃集略」을 통해 상세히 살펴 볼 수 있다.
풍기군에서의 강학 활동은 경상도관찰사 이헌영풍기군수 이범선과 같은 관권에 의해 장려되었기에, 풍기군의 재시사족 가문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강학 활동의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여러 가문들이 기부금을 납부하였으며, 이를 운영하기 위한 섬학계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운영에 간여하는 계원 명부를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당시 풍기군 지역을 대표하던 재지사족 가문이 망라되어 있다. 즉, ‘섬악소안’의 계안에 다수를 등재시킨 창원황씨·평해황씨·순천김씨·영양남씨·진성이씨·순흥안씨·안동권씨·풍기진씨 등의 가문이 당시 풍기군 지역 향론을 대표하였던 것이다.
『敬窩集略』,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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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崇禎後上之三十年癸巳月▣…▣贍學所案

贍學?序
國朝崇儒學人誦家傳
?人材作成之美蔚然相望有
可以光前裕後何其盛也國有
學郡有序所以尊先師而?來
學也于以俎豆于以絃誦而
之地自安文成李文純
之於前諸賢輩出號爲東方

之鄕挽近士風日諭?
堂之上講聲不聞閭閻之間邪
說恣行邪說所自職由於講聲之
不聞此誠有志之士寤言興歎息
欲回瀾之秋也天道好環
聖上因湖匪之廓平大興儒學宣
旨八路使冠儒服儒者有是以感動
者陽壯陰?其肇於是歟李公
??永氏
讀書人也按察是道修
廢典擧隱?百?俱興乃慨然
有挽古興學之志浸犯科條州實
講長幾員月課考能卓終獻續
井井不紊講學賴以勸矣歲滿將
歸捐俸金三千五百分隷七十一州鄕
校中爲勸學錢每州爲五十金而

亦興一節其宣
聖化而鼓士氣可謂至矣之士相
與感頌圖久傳各出力聚錢設
贍學之?余參是郡亦出不?
之勖共爲二百餘金乃定爲永式
使濟濟靑衿會講有所苟能課月
隸習久而不替磨?成就則向患
乎古道之不復頹波之雜挽哉異
日者聞文學之士多出於小白之南
則吾必曰
聖上之化也李公之力也吾方拭目而
俟之二三子
昭陽大荒落孟秋下澣
知郡李範善
夫右文興學在上者掌敎之

道修文講學爲儒者當行之
事以此爲勸之敦如是焉又之篤
舜時孩提之性文武時壯
大之儀向物於古鄕惟未之今也
耶今癸巳
巡相李公??永遞歸時將爲
儒生費萬貫錢於道內列邑
而本邑劃付滿五十錢且我侯
李公範善隨有十金之惠俱
是勸勉儒生講學盛眷也
一鄕儒士盛其賜愧無成將議
所以永久遵施之道莫設所爲
傳衍便殖若也玆設養士所曰
贍學資而贍無以成興勸之
聖是以一鄕各門中從衆寡出

力以添之其他孤寓者盡誠以
勖之潤爲累百金之聚動動滋殖
略略節用終是謂養士有所古胡
安定
設敎而名公輩出
?學廬山爲文敎蔚興蓋講
學所以明道明道所以致用隱居以
求其志行義以達其道此士君子
抱負之重而寄托之大也今之爲儒
者多反是矣徒以?拾箋註記
誦口耳爲學而於聖人入孝出悌餘
力學文之義茫然不察徒以雕篆
靑黃吟弄飛走爲文而於所謂英
華別發經緯天地之文漠然不思
處窮而無自守之行措世而無適
用之實況望其推中和位育之切

使民物蒙至治之澤乎學而始
此將賤吏夫干祿射利之資固
非設所貯養之意而亦豈非斯文
之大可憂者乎噫吾鄕以有先賢
遺風素稱文獻之邦挽近敎養
不專學習不篤前所稱無自守之
行無適用之實爲有識者興歎久
矣玆道伯優觀風之任使君
聖分憂之職?爾講學有資多
士深感其意甘實曰時哉而
不自紙其興起也反性回頭祛靡
陋而稍爾雅此皆二公所化之也
由玆以至道險事切文章則古
之所謂三不朽者是啓佑我
王朝儒化使群賢皆盛於?

偏邦四美於而中有傑然
者與不待文王鑄吳於一身
而家而國而天下則此豈非士君
子抱負之重而寄托之大也耶日
新?所有司向序於余余作而言
曰於多士培養乎何辭而抑不
?今老禿翁?言不足以華
奈何屢辭請益懇收神證慮
卒?顚末如右
聖上卽祚三十年癸巳南至月下澣
箕城後人黃範鱗
書贍學所名帖後
學之規尙矣蓋自三代設爲庠
立之師司徒敎三物樂正崇四
術窮理修身斯學之大要也齊

家治國斯學之極切也降自
以下直是說夢?乎?
賢講究法制努力啓開涵詠
乎性理葺乎心近間架以庸
學階梯以六經吾道之寄不越
乎言語文字而家塾鄕序規
模極廣矣亦?我東方儒賢
輩出上溯淵源下垂名敎典章
文物炳然與代同風挽近以來
師道漸下儒風日?至如經訓便
屬套語爰及切令全付?籬過
?學校蕩析莫可?拾其於?
進之方實有憂歎者久矣何幸
巡相李公??永氏合下學問中
聞見到之初布告外邑多士

試以月朔之講停解之日劃付
養士之資凡在敎化中物不
興感而守宰承流繼捐月俸
於是鄕人士斂?而賀因公歸式
?敢忘嘉惠遂與二三同志?
圖贍學廣招諸儒鳩聚數百
?創設特選勤幹者句當嚴
立科條不自案成?歟
之風度可復見於今日矣詩書而
絃誦之義理而講確之何憂乎
?學何患乎外攘不獨吾儒之
幸而抑亦
朝家之幸嗟哉吾黨士勉之哉勉之哉
癸巳陽復月下浣
檜山黃鐘夏謹書

贍學所案
黃輝幹壬申德懋】平海
黃洛周庚辰龜?】平海
黃宇鱗己卯來應】平海
黃範鱗癸未穉九】平海
黃秉周壬午養善】平海
金相順甲申國輔】商山
黃壽夏丙戌伯兪】昌原
黃鐘夏丁亥應賢】昌原
黃基鎬丁亥周京】昌原
黃鯉周己丑致璜】平海
黃肇夏甲午念禹】昌原
黃在弘己丑毅叔】昌原

黃中鎭壬辰邦叔】平海
金芝應壬辰景先】義城
李中喜甲午公厚】眞城
禹性淵庚寅允天】丹陽
權璟安東
黃基遠乙未汝近】昌原
黃迪夏戊戌惠卿】昌原
黃宇鎭己亥魯卿】平海
朴敎仁壬辰景善】高靈
黃中憲丁亥叔度】昌原
黃宗銖甲午景五】昌原
黃在厚壬寅德休】昌原
黃胤夏庚子承彦】昌原

黃基鐘己亥致應】昌原
黃五鱗癸卯景九】平海
權在經乙未元淑己亥出】安東
宋源星己亥大中】礪山
宋寅勉丙午致賓】礪山
李建鎬壬寅時伯】眞城
金輝璹庚子琢汝】宣城
黃道周乙巳明汝】平海
黃在冀乙巳遇伯】昌原
權基宇癸巳魯源】安東
金文熙甲午慶州
黃在松乙巳心?】昌原
黃基寅丙午敬賓】昌原

黃在錫癸丑應休】昌原
黃樂成庚申凡顯】昌原
黃永八丙午聖演】平海
蔡相述庚戌舜祖】仁川
孫錫基戊申德受】一直
黃鏞夏乙巳商賢】昌原
金鎭泓壬辰孟彦】咸昌
辛元集辛丑景館】寧越
黃起南庚子汝慶】齊安
李宗植甲午東善】平山
金義善庚申成浩】淸風
秦載淑丁亥致淸】豊基
張宗鉉辛巳君五】仁同

李鼎鎬壬子應三】眞城
黃基敎丙辰敬博】昌原
黃靖夏庚戌致?】昌原
李中進乙丑慶瞻】眞城
黃基鎭庚戌自卿】平海
黃文周戊午稷汝】平海
黃基憲己未章彦】昌原
黃在惇丙辰仁休】昌原
洪極均丁丑南陽
蔡弼相戊戌仁川
郭章憲己酉雉文】玄風
金鎭泳咸昌
黃炳欽乙亥晦老】昌原

黃序欽庚申齒達】昌原
李?鎬丙辰友三】眞城
黃學銖丙午聖習】昌原
黃世鎭乙卯聖緖】平海
黃永一乙卯聖淸】平海
申錫謨辛酉允中】平山
李興植戊申詩仲】平山
李彙春庚午士元】眞城
黃泰夏庚申聖登】昌原
黃益欽癸丑士彦】昌原
李基仁丙午德元】宣城
柳榮琇己酉致璇】豊山
金弘錫甲辰毅伯】慶州

黃宅周庚申聖都】平海
黃永燾丙辰天應】平海
黃道鱗甲申景集】平海
黃斗欽庚申元七】昌原
黃道欽癸丑學甫】昌原
秦錫斗丙午景七】豊基
李夏植乙卯公武】平山
金輝璟辛酉景璉】宣城
金容璣丁未幾玉】商山
李重煥甲戌舜華】平山
黃海鎭辛酉四兼】平海
黃敎欽甲戌孝文】昌原
韓宅洙【汝强】淸州

金鎭源乙巳季眞】咸昌
孫錫敎一直
金輝琇癸酉秀玉】宣城
李珍煥全州
孫瀅謨一直
黃永萬平海
黃哲欽昌原
黃性欽昌原
權宇淵安東
秦相顯甲辰平叔】豊基
權用鎰癸卯致達】安東
李基和眞城
黃在軾癸亥汝瞻】昌原

黃在哲【汝明】昌原
黃基世辛未士顯】昌原
安瓊?丙午守汝】順興
南周翼庚戌致勳】英陽
秦相?庚戌公汝】豊基
黃在轍甲子汝由】昌原
安基淵丁卯丕卿】順興
南世永癸亥顯哲】英陽
黃懋夏戊午德可】昌原
黃元夏庚申善之】昌原
權相殷安東
秦在軾庚子士心】豊基
黃在?庚申昌原

黃昌銖癸亥而遠】昌原
權羲夏安東
黃基益辛酉壽汝】昌原
李寅鎬壬申眞城
黃聖欽癸卯聖東】昌原
黃若欽庚申景弼】昌原
秦璧洙壬子子文】豊基
黃在禹【治洪】昌原
金容九甲子商山
黃述欽甲子景曾】昌原
郭敦相【舜五】玄風
金震淵丙申孟寅】順天
南基炯甲午元伯】英陽

金商賚戊子致夢】順天
南永錫癸巳學祚】英陽
蔡弘祚丙申應休】仁川
金相說戊戌殷老】順天
安潤璣甲申德甫】順興
金溥淵辛丑而出】順天
南基斗庚寅箕彦】英陽
安聖璣戊子順甫】順興
金浩淵癸卯孟道】順天
黃軫夏甲辰聖甫】昌原
金商濬己酉景弼】順天
南基世戊午德明】英陽

金鐘善庚戌百祥】永川
金悳淵丙午道卿】順天
黃達鱗壬子聖源】平海
金福淵戊申正叔】順天
安奎復丁巳德咸】順興
南基國辛丑聲遠】英陽
柳道鶴辛酉天可】豊山
金喆淵甲寅竝吉】順天
權東周壬子春汝】醴泉
金益淵丁巳友三】順天
金鐘采丁巳舜彰】永川
黃極周己未建七】平海
金達淵戊申德三】順天

秦錫禮丁卯士綱】豊基
金道淵丁巳孟浩】順天
安鐘煥甲子士彦】順興
黃基榮癸亥景達】昌原
李喆和丙辰重吉】眞城
金沃淵丁巳汝心】順天
安魯煥乙丑道彦】順興
黃鎬周壬戌輔京】平海
金商哲乙卯景猷】順天
吉興周乙酉德哉】善山
金秀潑辛酉治活】順天
安敎煥庚午大彦】順興

金鐘樂庚申聖三】永川
金泰淵庚申魯瞻】順天
南基喆辛丑兩吉】英陽
南德洙癸亥景一】英陽
金學奎甲戌時五】宣城
金瑞圭辛酉聖輯】安東
黃台夏己酉聖佐】昌原
黃漢鎭庚申養極】平海
黃永九己卯汝範】平海
尊聖廳儒生
金思永【敬九己未】本安東【居履洞
韓明洙【泰州庚午】本淸州【居果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