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24년(1887) 작성된 함창향교(咸昌鄕校) 교임록(校任錄)
자료의 내용
조선시대 향교에는 운영을 총괄하고 담당했던 직임 즉 교임(校任)이 존재했는데 바로 그 명부가 교임록이다. 현재 함창향교에 현전하는 교임록은 모두 14책으로 그 명칭을 청금임록(靑衿任錄)・임원록(任員錄)・향교임안(鄕校任案)으로 쓰고 있다. 고종 연간에 들어오면서 교임록이지만 청금록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하기도 했다.
교임의 명칭과 직제는 지역마다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교장(校長)・장의(掌議)・색장(色掌)을 두었는데 남부지방에서는 수임을 도유사(都有司)로 명칭 했다. 도유사 선출은 대체로 봄의 석전제(釋奠祭) 종료 후 헌관(獻官)과 유림들이 천거로 수령에게 삼망(三望)하여 택임하는 방법을 취했고, 장의와 색장은 도유사의 천거로 삼망하고 관의 택임을 받는 형태를 취했다. 함창향교도 이러한 방식을 따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함창향교 교임의 명칭과 직제는 수임(首任)은 상재(上齋)・도유사, 차임(次任)은 장의, 말임(末任)은 유사(有司)・재임(齋任)・재유사(齋有司) 등으로 불렸다.
본 자료는 14책 가운데 하나로 작성연대 정해(丁亥) 12월로 기재되어 있는데 정확한 작성연대는 고종 24년(1887)이다. 본 임원록은 고종 24년(1887)부터 고종 28년(1891)까지 5차례에 걸쳐 총 117명이 수록되어 있는 명부이다. 표제에는 청금록으로 내지에는 임원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좌목에는 직책과 성명, 간지가 기재 되어 있다. 교임의 체제에 있어서는 도유사 1명, 장의 1명, 재유사 1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유사는 향교운영의 총책임자로 향중의 명망 있는 인사가 장의와 유사는 도유사를 보조하는 유생들이었다.
먼저 함창향교 도유사 36명과 상재 3명 총 39명이며, 상재는 현존하는 향교 임원록 중 처음으로 입록이 확인 되는 함창현감 조원식(趙元植)이다. 조원식의 본관은 한양. 자는 인백(仁百)으로 고종 24년(1887) 2월 27일 부임하여 다음해 1월 28일 양산군수로 이배했으며, 이임 후 고종 33년(1896) 3월 관내 선정비가 건립되었다.
이를 중복 포함하여 성씨별로 나누어 분류하면 신씨 13명, 남씨 8명, 류씨 4명, 이・조(趙)・채씨 각 3명, 권씨 2명, 곽・홍씨 각 1명 순이다. 이중 중복 역임한 횟수는 2회 4명, 3회 2명, 4회 2명, 9회 1명으로 확인 되었다. 9회 역임한 인물인 평산신씨 신관희(申觀熙)는 후일 국채보상운동 함창지역 회장을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다.
좌목에는 본관이 기입되어 있지 않아 입록자의 성관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지만 주요 인물과 함창 지역 지리지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 신씨는 평산신씨, 남씨는 의령남씨, 류씨는 진주류씨 등의 가문들로 19세기 후반 함창향교 수임직을 역임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차임 장의를 역임한 39명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살펴보자. 중복 포함하여 성씨별로 나누어 분류하면 김씨 11명, 채씨 9명, 남씨 6명, 이씨 5명, 류씨 3명, 전씨 2명, 권・신・홍씨 각 1명 순이다. 이들은 위의 도유사 가문 성씨들과 비슷하다. 이중 중복 역임한 횟수는 2회 4명, 3회 1명, 4회 2명, 5회 2명으로 확인 되었다.
마지막 말임인 재유사(齋有司)를 역임한 39명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중복 포함하여 성씨별로 나누어 분류하면, 김・이씨 각 8명, 신씨 5명, 권・홍씨 각 4명, 정・채씨 각 2명, 강・반・안・인・임(任)・표씨 각 1명 순이다. 이중 중복 역임한 횟수는 2회 4명, 3회 2명, 4회 1명, 5회 1명으로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직임 표시가 없는 1인 김흥길(金興吉)은 유곡찰방(幽谷察訪)으로 1891년(고종 28) 6월 25일 함창현감 직을 겸한 인물이다.
이상 한말 함창 향촌사회를 주도해 오던 가문들도 평산신씨, 의령남씨, 전주류씨, 인천채씨 등 큰 변동이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자료에서는 함창현감 2명의 입록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여전히 한말까지 관의 통제하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한말 작성된 임원록으로 함창향교의 도유사・장의・유사를 역임하였던 인물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함창향교 주도 가문의 추이와 교임의 인적 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향교의 주도 가문이 큰 변화가 없던 것은 조선후기 함창지역에는 유력한 서원이 없었던 관계로 재지사족들은 향교를 중심으로 그 기반을 유지했음을 본 자료가 일정정도 증명하고 있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韓國의 鄕校 硏究』, 강대민, 경성대출판부, 1992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尙州市史』, 상주시, 2010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