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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좌수임록(座首任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1886.4773-20160630.Y1632509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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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886
형태사항 크기: 31 X 29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병술(1886)년 10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소장 〈좌수임안〉으로 8명의 좌수들의 인명과 6명의 향장들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통상 좌수와 별감 등의 향임록을 작성하던 형식과는 달리 등재된 인물 수가 적고, 향장과 함께 기재되어 있어 비안 향청에서의 일시적인 일이 발생되어 그 일을 관장하는 좌수와 향장을 기록한 문서로 파악되나 여타 부기된 사항이 없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丙戌(1886)년 10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소장 〈座首任案〉
자료의 내용
丙戌(1886)년 10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소장 〈座首任案〉으로 8명의 좌수들의 인명과 6명의 鄕長들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통상 좌수와 별감 등의 향임록을 작성하던 형식과는 달리 등재된 인물 수가 적고, 향장과 함께 기재되어 있어 비안에서의 일시적인 향청에서 처리하는 문제가 발생되어 그 일을 관장하는 좌수와 향장을 기록한 문서로 의심되지만 여타 부기된 사항이 없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여지도서』에 나타나는 비안현 전체의 上下官職의 편제를 보면 縣監 蔭 6품, 座首 1인, 別監 2인, 人吏 62인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향청의 좌수와 별감은 지역 사족 중에서 선발되어 위로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동시에 아래로 鄕吏를 단속하고 향촌 사회를 규찰하며 사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향임 중 최고 직임인 좌수를 담당하는 인물은 가문의 위세, 개인의 인품, 관직 역임여부 등이 모두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좌수를 배출한 가문이 별감까지 많이 역임하고 있어 좌수가문을 중심으로 향촌사회가 운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안향교에 소장된 여타의 명단, 鄕案이나 儒案, 靑衿錄, 직임 관계 案類 등에서도 비안현의 주도적 성관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다른 문서에서 드러나는 바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이후의 비안현의 주도성관은 크게 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기존의 성관에서 소수의 새로운 성관이 지역사회의 운영, 관리에 참여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본 문서에 드러나는 인물의 수가 극소수이지만, 비안지역의 향청의 향임을 도맡아 오던 대표적인 성관 卞, 李, 張, 金, 禹씨가 등재되어 있어 당시의 좌수의 직책 운영에 있어 별다른 변동사항이 크게 작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안 향청, 향교에 보관된 각종 자료들을 통해 살펴본 비안현의 성씨는 比屋에 박·손·장과 來姓으로 정·나씨가 있었고 安貞에 임·나·박씨와 續姓으로서 김씨가 있었다. 그리고 新坪에는 속성으로서 황·임씨 외에 변·장·김·정·우씨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성관 분포는 17세기 중반 이후 비안현에서도 일반적으로 양반계층의 전반적 재산감소, 혼인에 있어서의 솔서혼속의 퇴조, 예학의 발달과 철저한 준수 등이 원인이 되어 김, 장, 변, 박, 정, 이, 우씨 등 대략 6개 성씨가 각종 案類에 등재되는 것으로 고착화된다. 본 문서에서는 인명을 제외한 다른 사항이 부기되어 있지 않아 이들의 前職이나 職任 등을 알 수 없지만, 영남 사림파의 중앙정계에서의 퇴보가 반영되어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관말직을 역임한 예도 극히 희소하게 나타나는 것이 비안향교에 소장된 각종 인명부에 반영된 것과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국적 추세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격변 속에서 양반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새로이 부를 축적한 계열이 기성의 양반가문과 함께 지역운영의 일선에 등장하였던 점 등을 미루어 보아 비안 지역의 향청 운영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좌수라는 향임은 기존의 재지적 기반을 유지해 오던 성관들이 대개 돌아가면서 맡고 가끔 새로운 성관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이후 사족은 향촌사회에서 통제력과 지도적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향반을 유지하면서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의 대소사에 관여하여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즉 향촌사회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소위 公論을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향교장의를 중심으로 향중 유림들이 협의하여 鄕論을 조성하여 처리하였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중앙집권력이 해이해지면서 수령과 결탁됨으로서 특권세력으로서의 지위를 향촌사회에서 구축하였다. 그리고 향청에서의 향임의 유지는 사족으로서 자신과 그들이 속한 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으로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의 향촌사회를 이끌어 나갔던 이들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사족으로서 향촌사회에서 통제력과 지도적 지위를 상실해가는 과정에서도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의 대소사에 관여하여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비안지역의 인적구성원들을 볼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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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丙戌十月日
座首任案
卞龍九
卞周默
康仁植
卞赫來
李奎炳
張光表 曾經
金在誠
禹準成
鄕長
張應燮
張光表
李鍾九
卞周默
金在誠
卞龍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