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1882년 慶尙道 尙州牧 玉洞書院 院生 130명의 성명을 기록해 놓은 명부
丙子 己卯 壬午 院錄
자료의 내용
1876~1882년 慶尙道 尙州牧 소재 玉洞書院의 院生 명부다. 자료는 ‘丙子 己卯 壬午 院錄’이라는 제목으로 엮여져 있다. 옥동서원에는 현재까지 4종의 원록이 전한다. 1714년 건립 때부터 19세기 후반까지의 원생 명부인데, 본 원록은 그 중에서도 가장 후기에 작성된 것이다. 명부는 입학한 원생의 성명만 기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록은 해당 연도의 享禮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입록은 1876~1882년 사이 3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모두 130명의 원생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1876년에는 44명을 입록하였는데, 이들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李氏 8명, 金氏·鄭氏·黃氏 각 6명, 曺氏 5명, 趙氏 4명, 姜氏·權氏·廉氏·柳氏·朴氏·宋氏·申氏·蔡氏·河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1879년의 원생 입록은 추향 때 이루어졌다. 모두 36명의 원생이 입록되었는데, 이 중 4명은 追錄된 원생이다. 이들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趙氏 14명, 金氏 4명, 黃氏 3명, 姜氏·康氏·南氏·王氏 각 2명, 高氏·李氏·邊氏·孫氏·全氏·鄭氏·許氏 각 1명 순이다. 마지막 명부는 1882년 추향 때 입록된 원생의 명부다. 모두 50명이 입학하였으며, 성씨별로는 李氏 12명, 金氏 7명, 盧氏·趙氏 각 5명, 姜氏·申氏 각 3명, 高氏·柳氏·孫氏 각 2명, 康氏·呂氏·閔氏·宋氏·鄭氏·丁氏·曺氏·韓氏·洪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한편 본 원록에 수록된 총 원생 130명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趙氏 23명, 李氏 21명, 金氏 17명, 黃氏 9명, 鄭氏 8명, 姜氏·曺氏 각 6명, 盧氏 5명, 申氏 4명, 康氏·高氏·孫氏·南氏·柳氏 각 3명, 宋氏·王氏 각 2명, 權氏·廉氏·朴氏·邊氏·呂氏·閔氏·全氏·丁氏·蔡氏·河氏·許氏·韓氏·洪氏 각 1명 순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서원의 인적 구성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원생은 서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학생을 뜻하는데, 서원의 인적 구성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원생의 분포와 성격을 통해 해당 서원의 주도 세력과 향촌 사회 내에서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옥동서원에는 원생 입학과 관련된 별도의 규정은 확인되지 않기에, 입록자의 성씨 분포와 성격을 통해 대략적인 양상을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성씨별 분포를 보았을 때, 18~19세기 동안 배향자의 후손인 長水黃氏·沃川全氏를 비롯하여, 豊壤趙氏·義城金氏·商山金氏·晉州姜氏·興陽李氏·廣州李氏·廣州盧氏 등의 가문이 많은 원생을 입학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가문은 옥동서원을 매개로 지역 사회 내에서의 지위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또한 다양한 가문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역 내에서 공론을 형성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8세기에 작성된 원록과 비교하면, 전반적으로 옥동서원 원생의 권위는 낮아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 원록과는 달리, 본 원록에서는 관직 역임자나 과거 급제자가 단 한명도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후기 서원의 門中書院化와 남설, 그리고 향촌 사회 내에서의 재지사족 지위 약화라는 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