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8년(1784)부터 순조 1년(1801)까지 작성된 함창향교(咸昌鄕校) 교임록(校任錄)
자료의 내용
조선시대 향교에는 운영을 총괄하고 담당했던 직임 즉 교임(校任)이 존재했는데 바로 그 명부가 교임록이다. 현재 함창향교에 현전하는 교임록은 모두 14책으로 그 명칭을 청금임록(靑衿任錄)・임원록(任員錄)・향교임안(鄕校任案)으로 쓰고 있다. 고종 연간에 들어오면서 교임록이지만 청금록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하기도 했다.
교임의 명칭과 직제는 지역마다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교장(校長)・장의(掌議)・색장(色掌)을 두었는데 남부지방에서는 수임을 도유사(都有司)로 명칭 했다.
도유사 선출은 대체로 봄의 석전제(釋奠祭) 종료 후 헌관(獻官)과 유림들이 천거로 수령에게 삼망(三望)하여 택임하는 방법을 취했고, 장의와 색장은 도유사의 천거로 삼망하고 관의 택임을 받는 형태를 취했다. 함창향교도 이러한 방식을 따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함창향교 교임의 명칭과 직제는 수임(首任)은 상재(上齋)・도유사, 차임(次任)은 장의, 말임(末任)은 유사(有司)・재임(齋任)・재유사(齋有司) 등으로 불렸다.
본 자료는 14책 가운데 하나로 정조 8년(1784)부터 순조 1년(1801)까지 248명의 명단을 수록한 교임록이다. 겉표지에는 청금임록으로 되어있고, 좌목에는 직책・성명・간지(干支)・개명(改名) 등에 관한 사항을 기재해 두고 있다.
먼저 함창향교 상재・도유사를 역임했던 인물은 66명(도유사 62명・상재 4명)이다. 중복 포함하여 성씨별로 나누어 분류하면, 이씨 19명・채씨 12명・남씨 10명・신씨 9명・권씨 6명・류씨 3명・홍씨 3명・강씨 1명・남씨 1명・손씨 1명・정씨 1명・조씨 1명 순이다.
좌목에는 본관이 기입되어 있지 않아 입록자의 성관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지만 주요 인물과 함창 지역 지리지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 이씨는 월성・전주이씨, 채씨는 인천채씨, 남씨는 의령남씨, 신씨는 평산신씨, 권씨는 안동권씨, 류씨는 진주류씨, 홍씨는 부계홍씨, 강씨는 진주강씨, 손씨는 월성손씨, 정씨는 청주정씨, 조씨는 한양조씨로 가문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 함창향교 도유사를 역임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문 출신으로 추측 할 수 있다. 이중 중복 역임한 횟수는 2회 5명・3회 1명이다.
함창향교 차임인 장의를 역임한 74명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살펴보자. 중복 포함하여 성씨별로 나누어 분류하면, 채씨 22명・이씨 19명・권씨 10명・남씨 9명・신씨 5명・류씨 4명・조씨 4명・강씨 1명 순이다. 채씨・이씨・권씨의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도유사 가문 성씨들과 동일하며, 중복 역임한 횟수는 2회 9명・3회 2명・4회 1명・6회 2명・7회 1명・8회 1명이다. 이들 가운데 8회로 최다 역임한자는 의령남씨 가문의 남필량(南必亮)이다.
마지막 말임인 재임과 유사를 역임한 108명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중복 포함하여 성씨별로 나누어 분류하면, 이씨 30명・신씨 17명・채씨 14명・류씨 13명・강씨 9명・권씨 8명・남씨 7명・조씨 3명・김씨 2명・문씨 2명・곽씨 1명・안씨 1명・홍씨 1명 순이다. 도유사와 장의 가문 외 새로운 성씨들은 청주곽씨, 부계홍씨 등의 가문이다.
이중 중복 역임한 횟수는 2회 11명・3회 4명・4회 4명・5회 2명・8회 1명이다. 8회 최다 역임자는 진주류씨 가문의 류성탁(柳星倬)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후기 함창 향촌사회를 주도했던 의령남씨, 인천채씨, 평산신씨의 가문 비중이 높다. 이들 가문이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 함창향교의 교임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교임록 수록 인물 가운데 향안과 청금록에도 중복 입록자들이 다수가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청금록과 향안 및 교안이 독립적으로 작성·운영된 것이 아니라 모두 양반사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명부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함창향교 교임은 향교 운영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향안의 운영에도 동시에 참여하였던 함창의 재지사족 층 이었다.
자료적 가치
함창향교 교임록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 함창향교의 인적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를 통해 당시 교임록 현황과 주도 가문을 파악할 수 있으며 다른 안(案)과 비교를 통해 향촌 사회 내 사족의 동향과 향교와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함창지역에는 유력한 서원이 없었던 관계로 재지사족들은 향교를 중심으로 꾸준히 그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도 가문의 큰 변동이 없었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韓國의鄕校硏究』, 강대민, 경성대출판부, 1992
『朝鮮後期鄕校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尙州市史』, 상주시, 2010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