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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좌수행임록(座首行任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1861.4773-20160630.Y1632509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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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861
형태사항 크기: 36 X 30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신유(1861)년 4월에 좌수들의 인명과 차임 연월을 기록한 〈좌수행임록〉이다. 총 124명의 좌수들이 등재되어 있는데, 문서 중반부까지 좌수의 인명만이 기록되어 있다가 문서 말미에 가서 잠깐 좌수들의 체임과 관련된 연대 간지가 언급되고 있다. 성관의 분포는 김 32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이·박 각 21명, 장 17명, 변·우 각 8명, 정·권 각 4명, 류·조 각 2명, 곽·임·강·홍 각 1명으로 총 15개 성관이 나타나고 있어 좌수를 역임한 성관이 앞선 시기보다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辛酉(1861)년 4월에 좌수들의 인명과 差任 연월을 기록한 〈座首行任錄〉
자료의 내용
辛酉(1861)년 4월에 좌수들의 인명과 差任 연월을 기록한 〈座首行任錄〉이다. 총 124명의 좌수들이 등재되어 있는데, 문서 중반부까지 좌수의 인명만이 기록되어 있다가 문서 말미에가서 잠깐 좌수들의 체임과 관련된 연대 간지가 언급되고 있다. 성관의 분포는 金 32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李·朴 각 21명, 張 17명, 卞·禹 각 8명, 鄭·權 각 4명, 柳·趙 각 2명, 郭·林·康·洪 각 1명으로 총 15개 성관이 나타나고 있어 좌수를 역임한 성관이 앞선 시기보다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향청의 좌수와 별감은 지역 사족 중에서 선발되어 위로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동시에 아래로 鄕吏를 단속하고 향촌 사회를 규찰하며 사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향임 중 최고 직임인 좌수를 담당하는 인물은 가문의 위세, 개인의 인품, 관직 역임여부 등이 모두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좌수를 배출한 가문이 별감까지 많이 역임하고 있어 좌수가문을 중심으로 향촌사회가 운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안향교에 소장된 여타의 명단, 향안이나 유안, 청금록, 직임 관계 案類 등에서도 비안현의 주도적 성관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다른 문서에서 드러나는 바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이후의 비안현의 주도성관은 크게 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기존의 성관에서 소수의 새로운 성관이 지역사회의 운영, 관리에 참여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본 문서에 등재된 총 124명의 인물들의 성관을 살펴보면 金 32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李·朴 각 21명, 張 17명, 卞·禹 각 8명, 鄭·權 각 4명, 柳·趙 각 2명, 郭·林·康·洪 각 1명 등이다. 비안 향청, 향교에 보관된 각종 자료들을 통해 살펴본 비안현의 성씨는 比屋에 박·손·장과 來姓으로 정·나씨가 있었고 安貞에 임·나·박씨와 續姓으로서 김씨가 있었다. 그리고 新坪에는 속성으로서 황·임씨외에 변·장·김·정·우씨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성관 분포는 17세기 중반 이후 비안현에서도 일반적으로 양반계층의 전반적 재산감소, 혼인에 있어서의 솔서혼속의 퇴조, 예학의 발달과 철저한 준수 등이 원인이 되어 대략 6개 성씨가 각종 案類에 등재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본 문서에서는 인명을 제외한 다른 사항이 부기되어 있지 않아 이들의 관직을 알 수 없지만, 영남 사림파의 중앙정계에서의 퇴보가 반영되어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관말직을 역임한 예도 극히 희소하게 나타나는 것이 비안향교에 소장된 각종 인명부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국적 추세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격변 속에서 양반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새로이 부를 축적한 계열이 기성의 양반가문과 함께 지역운영의 일선에 등장하였던 것이 좌수라는 직임에까지 반영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이후 사족은 향촌사회에서 통제력과 지도적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향반을 유지하면서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의 대소사에 관여하여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즉 향촌사회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소위 公論을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향교장의를 중심으로 향중 유림들이 협의하여 鄕論을 조성하여 처리하였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중앙집권력이 해이해지면서 수령과 결탁됨으로서 특권세력으로서의 지위를 향촌사회에서 구축하였다. 이것은 사족으로서 자신과 그들이 속한 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교의 고유한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향교는 존속할 수 있었다. 비안향교에 소장된 19세기 중반의 좌수안이 만들어지는 배경이기도 한 것이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으로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의 향촌사회를 이끌어 나갔던 이들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사족으로서 향촌사회에서 통제력과 지도적 지위를 상실해가는 과정에서도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의 대소사에 관여하여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비안지역의 인적구성원들을 볼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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座首行任案
辛酉四月日
李寅馨
李楨秀
禹尙忠
張光俊
朴履基
金宅漢
朴文周
金相元
金經漢
卞錫完
張東元
李楨鎬
張東宅
金聲彧
張邦麟
朴元德
金振奎
朴慶祐
鄭澤文
金履宅
張元錫
金振琥
朴仁德
金聲大
朴仁祐
金允章
金東洛
張守翼
鄭益魯
卞鴻陸
朴晉祐
李昇
卞㶅祚
禹相文
朴來信
金昌翼
李昇
禹文海
朴大根
金允章
張元錫
禹龜錫
金彛烈
李冕
張成奎
金度淳
金基洛
卞億祚
李燁
朴大根
卞宅潤
禹龜夏
朴大奎
朴潤萬
權大鉉
金德淳
金景烈
卞文榮
李昇
張星鎭
朴時麟
卞宅潤 曾經
金東璧
金濟根
朴能相
金昇淳
朴大根
張星鎭
李坤秀
張仁欽
朴章煥
全在裕
鄭錫圭
李■■
朴相潤
卞舊采 己未三月日
李春齊 己未六月日
張東鷹 庚申閏四月日
張東翼 辛酉四月日
禹尙忠 辛酉六月日
金德元 壬戌二月日
柳昱 壬戌五月日
朴昌德 癸亥三月日
張邦憲
禹相倫 癸亥五月日
李載新
趙友文
金振奎
李春建
柳晟
李德洪
郭必元
朴慶祐
禹鼎九
金炫
權相正
趙簡復
金聲大
張邦麟
李世燁
奉聖敎 金仁宅
金益虎
金允章
金聲瓚
李克忠
張昌洙
朴周祐
金德運
金振珏
李敏稷
金邦根
張東貞
朴廷祐
鄭益福
李仁培
林月根
權錫銓
李仁秀
金頊
康載滿
李靖稷
權聖吉
洪履儆
李文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