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2~1833년 慶尙道 尙州牧 玉洞書院에 입학하였던 53명의 院生 성명을 기록해 놓은 명부
壬辰 甲辰 乙巳 丙午 癸巳新錄 院錄
자료의 내용
1772~1833년 慶尙道 尙州牧 소재 玉洞書院의 院生 명부다. 자료는 ‘壬辰 甲辰 乙巳 丙午 癸巳新錄 院錄’이라는 제목으로 엮여져 있다. 현재 옥동서원에는 모두 4종의 원록이 전하고 있는데, 본 원록은 세 번째로 빠른 시기의 원록이다. 표제에는 壬辰(1772)·甲辰(1784)·乙巳(1785)·丙午(1786)·癸巳(1833)가 명기되어 있지만, 실제 본문에는 1772·1782·1784·1833년의 원생 명부만 수록되어 있다. 명부는 각 연도의 원생 성명만 기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원생 중 관직 역임자나 과거 급제 사실이 있을 경우, 그 내용을 성명 위에 부기하고, 해당 원생을 명부 가장 앞에다 수록해 놓았다. 각 해의 명부는 春享 때 작성된 것으로 나타난다.
본 원록에는 모두 53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먼저 1772년 춘향 때 작성된 명부에는 25명을 수록해 놓았다. 입학 원생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宋氏·李氏 각 5명, 趙氏 4명, 蔡氏 3명, 洪氏 2명, 權氏·金氏·南氏·柳氏·全氏 각 1명, 성명 미상 1명 순이다. 1782년 춘향 때는 6명이 입학하였는데, 姜氏·孫氏·李氏·趙氏·黃氏·洪氏 각 1명씩 입학하였다. 입학 원생 중 姜世膺과 孫鎭翼은 正字의 관직을 지냈으며, 洪錫疇와 黃莘老는 生員 신분으로 입학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명부 말미에는 당시 公事員으로 蔡와 姜을 기재해 놓았다. 공사원은 옥동서원의 齋任으로 추정된다. 1784년 명부는 釐正錄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金氏 4명, 姜氏·趙氏·蔡氏 각 2명, 郭氏 1명씩 모두 13명의 원생을 수록하였다. 마지막 1833년 춘향 때의 명부에서는 모두 10명의 원생이 확인되는데, 성씨별로는 姜氏·盧氏·黃氏 각 2명, 全氏·柳氏·李氏·崔氏 각 1명이 있다. 입록자 53명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趙氏 9명, 李氏 7명, 金氏·宋氏·蔡氏·姜氏 각 5명, 洪氏·黃氏 각 3명, 全氏·盧氏 각 2명, 權氏·南氏·柳氏·孫氏·郭氏·柳氏·蔡氏 각 1명, 성씨 미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서원의 인적 구성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원생은 서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지칭하지만, 서원 인적 구성에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즉 원생의 성격을 통해 해당 서원의 주도 세력과 사회적 지위를 추정 할 수 있는 것이다. 옥동서원에는 1714년에 건립 이후 작성된 4종의 원록이 전하는데, 입학 원생에 대한 별도의 자격을 규정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후기로 갈수록 원생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는 전반적으로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전반의 원생 명부와 비교해, 원생 중 관직 역임자나 과거 급제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후기 서원의 門中書院化와 남설, 그리고 향촌 사회 내에서의 재지사족 지위 약화라는 사회적 현상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입학 원생의 가문을 살펴보면, 배향자 후손인 長水黃氏와 沃川全氏를 비롯하여, 豊壤趙氏·興陽李氏·晉州姜氏·缶林洪氏·慶州孫氏·廣州盧氏 등의 가문이 옥동서원 운영을 주도하며, 향촌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나갔던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