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1772)년에 작성된 선산향교 〈蓮桂座目 上〉으로 선산지역에 거주하거나 본관이 선산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이래의 生員, 進士, 文科의 급제자를 수록
자료의 내용
壬辰(1772)년에 작성된 선산향교 〈蓮桂座目 上〉으로 선산지역에 거주하거나 본관이 선산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이래의 生員, 進士, 文科의 급제자를 수록하고 있다. 인명뿐 아니라 이들의 字와 생년의 干支, 그리고 科試의 종류 및 급제년의 간지, 최종 벼슬과 本貫 및 가족관계, 入享書院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첫머리에는 前朝桂案을 기록하였는데, 金漢忠, 尹珍, 金澍, 吉再, 金洙가 등재되었으며 이어서 本朝桂案에는 田可植을 위시하여 金叔滋, 河緯地, 金宗直 등 주요 인물들을 포함한 103인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양반이 자신들의 신분을 획득하고 지배집단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여 官職을 갖는 것이었다. 즉, 양반의 신분적 지위와 특권을 유지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관직이었다. 나아가서 관직보유는 당대에서의 위세를 가늠하는 척도였으며, 그 양반이 소속되어 있는 가문의 위세는 과거급제자의 숫자와 관직의 高下에 의해 좌우되기까지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지배 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과거 이외의 방법으로 지배계층이 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 갔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관료로서 국가기구를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在地士族으로서 향촌사회까지도 지배하였다. 이 중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관료들은 대부분 과거 급제자들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지배집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조선시대의 충원기제인 과거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과거 급제자와 관련된 많은 정보가 담겨져 있는 본 문서는 과거제의 운영 실상의 보여주는 기본 자료가 된다.
일반적으로 양반사족의 지방 지배력이 기초하고 있는 권력과 위신을 창출해내는 원천은 중앙권력과 관계를 가지는 관직, 생원·진사를 배출하는 司馬試와 문과 등 과거에의 합격, 유향소·사마소·종족조직 등의 사회조직에의 참여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밖에 경제력 또한 중요한 권력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반사족의 경제력 확보는 고위 관직자에게 있어 관직은 그 자체가 재산을 증식하는 토대였으므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이는 다시 문과 등 과거합격과 연관되어 있다. 과거 합격자의 수와 관직은 개인과 그 가문의 권력, 재산, 위세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있어 과거시험이란 사회적 진출의 관문이 되고, 사회적 지위 공인의 수단이 되며, 가문의 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했었기 때문에 과거합격자 명부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지방 사족들은 다양한 사회적 지위유지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문과 급제를 통한 관직 획득이었다. 문과는 개인의 능력을 기초로 중앙정치권력과 사회지배층을 확대, 재생산하는 시험제도였다. 경쟁을 표방한 문과는 공정하게 개인의 재능을 평가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였다. 따라서 시험의 전 과정에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였다. 채점 과정에서 인적 사항을 봉함하는 封彌法과 인적 사항과 답안을 분리하는 割封法, 필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답안을 朱草하는 易書法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외에도 응시자가 준비하는 試紙의 지질과 규격, 內打印을 통한 답안의 중간 점검 등 그 세부적인 제도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밀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과거가 고급 관료를 충원하는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지방 거주 사족이 문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울과 지방 사족 간의 관직 진출 격차는 더욱 커져 갔고 이러한 현실 속에 지방 사족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마시이다. 사마시 入格은 곧바로 入仕가 보장되지는 않지만 국가로부터 士族으로서의 지위를 공인받게 된다는 점에서 지방 사족에게는 대단히 중요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문과 급제를 통한 관직 진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지방 거주 사족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국가로부터 공인받는다는 것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유지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마시를 거쳐 생원·진사가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머물면서 그 사회의 지도자로서 존재하였다. 이들은 특히 향촌사회에서 양반의 근간을 이루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험이나 추천에 의해서 중앙의 관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마시 입격자 수는 그 가문과 그 지역의 위상을 가늠할 수도 있었다.
생원, 진사시는 조선시대의 양반관료들의 최고의 등용문인 文科의 응시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 내지 성균관 입학자격시험 등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조선후기의 下代로 내려올수록 그러한 측면 보다는 士類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기 위한 시험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사류들의 일반적인 風潮는 관직취임 보다는 재야에서 학문연구와 후학지도에 힘쓰는 것을 더 큰 보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생원, 진사시 합격 후 문과에 응시하지 않는 것(不赴擧)과 응시하여도 많이 떨어진 것(累擧不中)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才勝德이면 小人이요 德勝才라야 君子가 된다’는 書經의 구절을 暗誦하면서 영리하고 약삭 빠른 출세주의자 보다는 우직한 재야사인들을 높게 평가하였던 사류들의 유교적 사회풍조 때문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문서에서도 후대의 인물들, 즉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수록 문과 급제자보다는 생진시 합격자들이 다수 입록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편 당대에 있어서도 金澍, 吉再, 河緯地 등 명망있던 인물에 관해서는 입향된 서원, 대표적인 사건 등 조금 더 구체적인 인적사항 들을 부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과안에 등재되어 있는 그들의 후손들과의 혈연관계들도 병기하고 있다. 등재형식에 있어서 인물별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본 문서에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인명부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부기사항이 생략되었거나 인명만을 기록한 경우 어떠한 사정이 반영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까지의 선산지역의 생진시 및 문과급제자 103명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당대까지 선산지역을 근간으로 하는 인물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尹熙勉,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姜大敏,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