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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년 비안향교(比安鄕校) 향록(鄕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1765.4773-20160630.Y1632508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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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765
형태사항 크기: 31.5 X 22.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을유(1765)년 3월에 작성된 비안현 〈향안〉으로 임오년 〈향안〉을 중수한 것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향안 작성과 관련된 향임들의 관직 및 직임, 인명이 각기 문서 말미에 기록되어 있고, 중복되는 것으로 보아 1765년에 향안을 작성하면서, 1762년의 향안을 중수한 것을 같이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입록자의 성관을 살펴보면, 김 20명, 장 18명, 이 16명, 변 12명, 박 10명, 정 7명, 권 4명, 신(申) 3명, 우·류·신(辛) 각 1명 등 총 93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乙酉(1765)년 3월에 작성된 비안현 〈鄕案〉
자료의 내용
乙酉(1765)년 3월에 작성된 비안현 〈鄕案〉으로 壬午년 〈鄕案〉을 重修한 것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2건의 향안이 어떠한 연유로 합철되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 상세한 점련사유는 알 수 없으나, 향안 작성과 관련된 향임들의 관직 및 직임, 인명이 각기 문서 말미에 기록되어 있고, 중복되는 것으로 보아 1765년에 향안을 작성하면서, 1762년의 향안을 중수한 것을 같이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전체 입록자들의 살펴보면, 金 20명, 張 18명, 李 16명, 卞 12명, 朴 10명, 鄭 7명, 權 4명, 申 3명, 禹·柳·辛 각 1명 등 총 93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안현에서 작성된 향안은 대부분 17~8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본 문서는 그 가운데 현전하는 자료 중 가장 후대의 자료로서 18세기 중후반 비안현의 주도적 성관의 분포를 보여주면서 앞선 시기에 비해 비교적 많은 성관이 등장하는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안 지역의 향안의 절반 이상이 후대에 다시 중수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을마다 양반 상호간의 서차와 주도권 쟁탈전이 매우 격화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쟁의 결과 영남인의 관료로의 진출이 사실상 어려워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향안은 지방에 거주하는 品官의 명단으로서 경재소에 비치된 京案에 대칭하여 쓰인 것으로 鄕籍, 鄕諺錄, 鄕錄, 鄕中座目 등으로 불렸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작성되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각 지방에 전래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비안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각종 고문서 등을 통해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 지역의 재지사족들은 그들만의 명부들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마다 그 성격이 약간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재지사족 가운데 내외 친족 및 妻族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만 재지사족의 공론에 따라 향안에 이름이 오를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신분적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구성원인 鄕員들이 모여 鄕會를 구성하고 운영하였다. 향회에서는 향안에 새로 이름을 올릴 사람을 결정하고, 鄕任을 추천하고,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향리와 백성을 통제하는 등 향촌사회 운영 전반에 걸쳐 신분제적 운영원리를 관철시켜 갔다. 이렇듯 향안은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강화, 향리계층에 대한 제어, 관권으로부터 향권의 보호 등의 필요성에 의해 작성된 재지사족 권위의 상징이었다. 특히 16세기 이래 중앙정계와 지방의 재지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사림파 세력들은 향내의 지배권을 독점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향안을 작성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하여 고을 단위의 鄕綱 윤리라는 도덕규범에도 적극적 관심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이후 재지사족들이 기울인 가장 일차적 관심사는 무엇보다 흐트러진 향촌질서의 복구였다. 이는 먼저 임진왜란 직후 바로 향안을 중수하고 향촌사회를 정비하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비안현 지역에서도 잘 나타난다. 비안지역도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 향안이 현전하고 있어 향안복구가 일찍부터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 향안은 비안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비안향교는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자 지방의 유생들이 다시 모여 향교재건을 협의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짓도록 합의가 되어 준공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본 향안은 앞선 시기에 작성된 여타의 비안 향안과 마찬가지로 입록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어 일반적인 향안에 비해 그 내용이 간략하다. 다만 비안향교에 소장되어 현전하는 향안 중 가장 나중에 작성된 것으로 앞선 향안에 비해 입록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 점, 권·우·윤·신·류·辛씨 등이 소수이지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후반의 정치·경제·사회적 격변 속에서 양반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새로이 부를 축적한 계열이기성의 양반가문과 함께 지역운영의 일선에 등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비안현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며 거의 전국적 추세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료적 가치
비안향교 소장된 현전하는 비안 향안 중 가장 후대에 重修된 것으로 앞선 시기의 향안들과 함께 비안현의 사족 계층의 성관 분포와 그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의 자료로서 당시 사회적 변동 속에서의 비안현의 인적구성원들의 분포 추세도 살펴볼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이미지

원문 텍스트

鄕錄
乙酉三月日鄕案
卞廷燮
李陽新
朴鳳儀

曹司 朴鳳翊 [手決]
公事員 金東式 [手決]
座首 張封萬 [手決]
鄭世貞 [手決]
李大春 [手決]
鄕老 金有秋
癸巳七月初七日壬午案重修
通政大夫 金道弘
幼學 金始秋
卞廷集
金南式
權有星
金兌式
金震恒
李達運
張緯奎
申迪
張之㶵
張緯洛
柳緯之
張大壽
卞廷爀
張緯房
金震玉
張大龍
金震一
朴天贇
鄭師顔
朴道升
鄭世極
卞垓
朴鳳朝
張世臣
張大獜
卞瑢
申稷模
卞廷壺
李光玉
朴天根
申述
李陽熙
張擇萬
張大權
權軾
鄭世鐸
李陽燮
金行萬
金行九
李楨國
朴道根
朴景洙
金載鉉
李益曄
李陽宅
金聲玉
鄭師聖
卞璹
李光琭
李培信
張再良
李達濟
張龍德
李陽權
金兌一
金光涷
金震復
張鴻翼
張嶷
權輯
卞光國
卞坤
鄭師玄
卞基
金光洛
金光涉
金浚
張晙
朴天啓
朴道海
金商玉
金龍九
李光潤
卞瓚
卞城
李演
朴鳳鳴
禹洪楫
權泓
金龍五
張曄
張再騫
李培德
張嵂
鄭師孝
辛慶泰
李陽重
鄭師虎

通政大夫 鄕老 卞廷龜 [手決]
通政大夫 金東式 [手決]
幼學 金震鐸 [手決]
座首 張斗亨 [手決]
公事員 金邦式 [手決]
曹司 朴鳳儀 [手決]

卞廷權

通政大夫 卞廷龜 [手決]
通政大夫 金東式 [手決]
座首 張斗亨 [手決]
公事員 金邦式 [手決]
曹司 朴鳳儀 [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