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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비안향교(比安鄕校) 향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1752.4773-20160630.Y1632508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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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752
형태사항 크기: 40.5 X 31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임신(1752)년 11월 28일에 작성된 것으로 비안현 사족 명부인 〈향안〉이다. 향안에 입록된 이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김 13명, 장 11명, 이 8명, 변 6명, 박 5명, 정 4명, 권·우 각 2명 등 총 51명의 인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여타의 향안에서 보이는 관직이나 본관, 자, 호 등의 부기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임신(1752)년 11월 28일에 작성된 것으로 비안현 사족 명부인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壬申(1752)년 11월 28일에 작성된 것으로 비안현 사족 명부인 〈鄕案〉이다.
조선시대의 향촌사회내의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였으며 이들의 명단을 鄕案이라 하였다. 그리고 향촌사회에 대한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鄕會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향안 입록자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향안의 입록은 곧, 一鄕에서 지배신분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족들의 권위의 상징인 향안의 입록은 대단히 까다롭고 엄격하게 운영되었다.
향안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대개 고려 말 첨설직을 받은 前銜品官이나 또는 조선개국 시 처음부터 勳臣 계열에 들지 않고 조상 전래의 세거지에 토착해 경제적·문벌적으로 강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앙권력에 대립해온 부류들이었다.
향안의 체재는 대체로 관직·성명·본관·자·호·생년간지와 누구의 아들이나 아우 또는 손자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름만 기록해놓은 것도 있다. 입록 자격으로서 친족은 물론, 처족과 외족까지 포함된 족계가 분명해야 되고, 반드시 문벌세족이어야 하였지만 이 또한 문서에 드러나는 바가 없다.
조선 전기의 향안은 임진왜란 때 거의 타버려 현존하는 것은 전부 난 이후 새로 작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향안 작성과 함께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점차 확립되고 이들이 유향소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함으로써 향권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사족들은 신흥세력의 유향소 운영의 참여를 제한하는 즉, 배타적 향안 작성을 통해 자신들의 향촌사회내 권위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향안은 조선시대 향촌사회내 향권 주도세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안의 향안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비안향교에 소장된 여러 건의 향안 및 향록 등에서 16세기 중반부터 기록의 遺草가 될 만한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본 향안에 입록된 이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金 13명, 張 11명, 李 8명, 卞 6명, 朴 5명, 鄭 4명, 權·禹 각 2명 등 총 51명의 인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여타의 향안에서 보이는 관직이나 본관, 자, 호 등의 부기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성관의 분포는 앞선 시기에 작성된 향안에서 보이던 대체적인 양상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던 모습을 보이던 것이다. 즉,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비안현에서 작성된 향안 중 현전하는 자료의 일면에서 비안현을 주도한 성씨는 김·장·변·박·정·이씨들이었고, 본 자료가 작성될 1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소수의 권·우씨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등재인수도 앞선 향안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전국적으로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 격변을 맞이하게 되고 양반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새롭게 부를 축적한 계열이 기성의 양반가문과 함께 지역운영의 일선에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의 일면을 보여준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중반에 작성된 비안현 재지사족들의 명단으로서 당시 비안지역을 주도적으로 운영하던 계층의 성관 분포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 지방사회의 재변화 양상이었던 새로운 양반가문의 지방사회로의 편입 과정의 초반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비안현에서는 소수이지만 권씨와 우씨 등의 성관들이 지역운영 일선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이미지

원문 텍스트

鄕案
壬申十一月二十八日
鄕案
壬申十一月二十八日鄕案
張德奎
金極秋
權命斗
朴重蕃
張聚奎
卞延賓
朴利錫
金震說
金震元
金時虎
鄭世元
金震鐸
卞延龍
張戶萬
朴道行
權在星
李大根
李大復
李陽泰
卞延傑
李達中
張緯箕
張斗應
張封萬
鄭世銓
張緯成
金翼龍
金邦式
金潝
金震䤴
李亨埴
張龍翼
朴道敏
鄭師孟
禹宅夏
金玉兌
張斗亨
張緯河
禹基夏
卞琓
李陽亨
李陽健
卞道仁
卞圭
李大麟
鄭師錫
金載岳
金載昌
朴鳳翊
張雲翼
金行一

都約正 權 [手決]
座首 張 [手決]
公事員 朴 [手決]
金 [手決]
別有司 卞 [手決]
卞 [手決]
曹司 金 [手決]
李 [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