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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년 비안향교(比安鄕校) 향록(鄕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1718.4773-20160630.Y1632508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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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718
형태사항 크기: 31.5 X 24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무술(1718)년 10월 4일에 작성된 비안현 〈향록〉으로 당시 비안현의 향촌사회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50명의 인명이 기록된 문서이다. 향록 입록자의 성관 분포를 살펴보면, 김 13명, 장 10명, 박·변 각 8명, 이 7명, 정 4명으로 18세기 초반의 비안현에서의 주도성관은 대략 6가지 내외로 대변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718년에 작성된〈향록(鄕錄)〉으로 당시 비안향교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50명의 인명이 기록
자료의 내용
戊戌(1718)년 10월 4일에 작성된 비안현 〈鄕錄〉으로 당시 비안 지역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50명의 인명이 기록된 문서이다. 인명 이외에 다른 내용은 없고 문서 말미에 鄕老가 참여한 사실을 볼 수 있다.
비안향교 소장 향록 중 같은 해 8월에 작성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일부 인명에 차이를 보인다. 8월에 삭제되었던 변태화가 10월에는 문서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고, 金遇兌가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본 문서에는 8월에 작성된 것에 비해 5명이 삭제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향안의 改修는 등재자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비안현 유력 양반문중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향록은 鄕案, 鄕籍, 鄕諺錄, 鄕中座目 등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원래 지방에 거주하는 品官의 명단으로서 京在所에 비치된 京案에 대칭하여 쓰이던 것으로 정확하게 언제부터 작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각 지방에서 작성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시기별로 향록의 작성이유나 배경 등에 따른 성격이 약간씩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개 在地士族 가운데에 親族 및 妻族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만 사족들의 공론에 따라 향록에 입록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적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로 작성되었다. 향록에 이름이 오른 구성원인 鄕員들이 모여 鄕會를 구성·운영하였다. 향회에서는 향록에 새로 이름을 올릴 사람을 결정하고, 座首, 別監 등의 鄕任을 추천하고,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향리와 백성을 통제하는 등 향촌사회 운영 전반에 걸쳐 신분제적 운영원리를 관철시켜 나가는 즉, 지배신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향록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대개 고려 말 첨설직을 받은 前銜品官이나 또는 조선개국 시 처음부터 勳臣 계열에 들지 않고 조상 전래의 세거지에 토착해 경제적·문벌적으로 강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앙권력에 대립해온 부류들이었다.
향록의 체재는 대체로 관직·성명·본관·자·호·생년간지와 누구의 아들이나 아우 또는 손자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름만 기록해놓은 것도 있다. 하지만 본 향록은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고, 절목 등의 별다른 부기사항이 없다. 입록 자격으로서 친족은 물론, 처족과 외족까지 포함된 족계가 분명해야 되고, 반드시 문벌세족이어야 하였지만 이 또한 문서에 드러나는 바가 없다.
조선 전기의 향록은 임진왜란 때 거의 타버려 현존하는 것은 전부 난 이후 새로 작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난중에 향록의 소실로 향촌사회의 질서가 크게 무너지자 새로운 질서회복의 요청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때 舊案을 수정하면서 인물의 첨삭이 가해졌고, 그 뒤 극심한 신분상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追錄의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또한, 당쟁과 庶孽許通의 영향도 향록의 성격변화에 크게 작용하였다.
본 문서에 나타나는 향록 입록자의 성관 분포를 살펴보면, 金 13명, 張 10명, 朴·卞 각 8명, 李 7명, 鄭 4명으로 총 50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관의 분포는 18세기 초반의 비안현에서의 주도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이들의 각종 명부들에서 나타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17세기 이후 양반계층의 전반적 감소, 솔서혼속의 퇴조, 예학의 발달 및 철저한 준수 등의 원인으로 비안현의 주도성관이 대략 6가지 내외의 성관들로 대변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초반에 작성된 비안현 향록으로 조선중기 이후 비안지역의 사족들의 인적구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비안향교에 소장된 비슷한 성격의 여타의 자료들 중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어지는 향록, 향안들이 많이 있는데, 본 문서는 그러한 시기들을 연결시켜 주는 문서로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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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鄕錄
戊戌十月初四日
鄕錄案
朴守華
鄭胤僑
金是重
鄭後僑
張漢遇
朴浩然
朴世華
金萬銓
張世奎
卞楚和
金奉秘
朴泰然
張是載
朴粲然
金萬亨
卞昇和
張漢旭
李夢弼
卞有和
李光弼
張五相
李大益
李大謙
卞後和
金泰有
金萬有
張翰洪
卞景和
張大胤
張重望
卞準和
金震珩
李再光
卞爾和
金遇兌
金碩鼎
張五奎
金用秋
朴尙華
鄭元僑
朴仁章
金弼夏
金鼎三
鄭爾僑
朴義章
張信奎
金弘重
李世馧
李亨萬
卞泰和


鄕老 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