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 선산부(善山府) 신곡면(新谷面) 숙빈방(淑嬪房) 절수처(折受處) 개타량성책(改打量成冊)
자료의 내용
康熙39년(1700)에 慶尙道 善山府의 淑嬪房이 折受한 신곡면 월동원의 太祖津頭로부터 禁林에 이르는 無主陳荒處의 字號, 庫員을 改打量하여 다시 책을 만든 것이다.
숙빈방은 숙종 때에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기거하게 되면서 이름이 바뀐 곳으로 조선시대 한성 동부 蓮花坊에 있었던 광해군의 潛邸로 배고개에 있어 이현궁 또는 이현본궁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전후복구책을 꾸준히 추진하는 한편 긴장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군비증강사업을 추진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각종 衙門, 宮房 등이 창설되었고 이들 기관 하나하나가 별도의 재정운영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재정 지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각각의 기관에게 독자적인 재정 수취권을 분여해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軍門, 아문, 궁방 등 각급기관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미개간지, 無主地 등을 折受나 立案의 형태로 확보하여 자체 재정수요를 충족시키는 양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본 문서 또한 1700년에 숙빈방의 재정확보 정책의 수단으로 선산부의 신곡면 일대지역을 절수하고 改打量 후 成冊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土地折受制가 토지집중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이용되는 임란 직후 1세기에 걸치는 기간에 작성된 문서로 본래 토지의 절수는 무주지 취득행위의 공인이었다. 조선전기에도 있었으며, 자격도 어느 신분층에나 허여되고 있었고, 토지의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제도였다. 그러나 무주陳荒地가 다량으로 존재하는 시기에 가장 잘 이용되고, 또한 재력과 物力이 우세한 지배층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향유되었다. 무주지취득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고, 개간하여 경작지로 만드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을 거치고 대개간의 시기를 맞아 한껏 이용되었던 것이다.
당시 무주지 折受는 전란으로 수입이 현저하게 감축된 諸宮家는 職田制까지 폐지되어 경비조달이 심히 어려워진 처지였다. 토지분급제와 田主佃客制가 폐기되고 사적토지소유 및 그 관계만이 남아 있는 형편에서 전자의 계통인 직전에 후자의 계통인 절수가 선후관계로 교체되는 셈이었다. 궁가의 절수토지에는 면세혜택도 부여되었다. 면세는 戶曹가 취득할 수세분이 이들에게 이속되는 것이었다. 원래 절수는 면세와는 무관한 것이었지만 사적 토지소유상에서 왕실의 신분계급적 지위를 보장하는 방책으로 왕에 의해 취해지는 일종의 특혜였던 것이다.
궁가의 전지는 무주지의 절수·개간 즉 사적 소유의 토지에 면세, 그리고 免役이 겹쳐서 성립되는 庄土였고, 형태상 성격상 屯田이 바로 그것이었다.
본 문서에 기록된 숙빈방 절수 토지는 선산부 신곡면 월동원, 어문원, 돌관원의 전답으로서 地番, 等級, 直梯句 등 모양, 長廣, 면적, 時作人을 기록하고 뒷 부분에는 이들 토지가 모두 14결 6부 9속이며 陳 18부 5속, 覆沙 3결 33부 4속으로 실제는 10결 5부라고 기록하고 있다. 통상 절수 토지에 부여된 각종 면세면역의 특혜를 좇아 많은 民人들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본 성책 문서에는 時作人에 대한 여타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과연 당시 어떠한 변동양상을 보였는지에 대한 상세한 사실을 알 수는 없다. 숙빈방이 본 문서가 작성되고도 11년 이상 지속이 되었고 당시 절수된 토지의 양 또한 결코 적지 않았으며, 당시 국가의 재정주관 부서인 호조에서도 이를 마땅히 어쩌지 못했다는 통상적인 흐름으로 볼 때 본 문서가 가지는 자료적 가치는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서 말미에는 內需司 打量官의 手決과 선산도호부사 김조진과 병마겸절제사의 수결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조의 양란 이후 전후복구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각 宮家에 대한 직접적인 재정지원 정책을 대신하여 실시된 土地折受와 관련된 문서로 1700년 당시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기거하던 숙빈방에 절수된 선산부의 토지에 대한 각종 정보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尹熙勉,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姜大敏,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