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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7년 2월 경상도(慶尙道) 예안현(禮安縣)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1687.4717-20160630.Y162170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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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예안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작성시기 1687
형태사항 크기: 35 X 26
수량: 6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예안향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687년 2월 경상도(慶尙道) 예안현(禮安縣)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1687년 2월 경상도(慶尙道) 예안현(禮安縣) 예안향교(禮安鄕校)의 교생(校生) 명부다. 본 교안(校案)에 입록되어 있는 교생은 ‘액내(額內)’와 ‘교생(校生)’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중 ‘액내’는 총 35명으로 성씨별로는 이씨(李氏) 12명, 김씨(金氏) 9명, 조씨(趙氏) 7명, 금씨(琴氏)·남씨(南氏) 각 2명, 박씨(朴氏) 1명 순이며, ‘교생’은 총 33명으로 김씨 14명, 이씨 8명, 금씨·윤씨(尹氏) 각 3명, 박씨·손씨(孫氏)·우씨(禹氏) 각 2명, 권씨(權氏) 1명 순이다. 예안향교 교안에서 ‘액내’와 ‘교생’을 구분하는 것은 신분적인 이유다. ‘액내’는 정원 내 교생으로 예안현을 대표하던 사족들이 입록되었다. 반면 ‘교생’은 신흥사족이나 서얼, 평민 같은 부류가 입록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신분 상승이나 피역(避役)을 위해 향교에 입학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경향을 통해 향교 교생의 사회적 성분과 17세기 예안현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朝鮮後期 書院硏究』, 李樹煥, 一潮閣,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687년 2월 慶尙道 禮安縣 禮安鄕校의 敎生 명부
자료의 내용
1687년 2월 慶尙道 禮安縣 禮安鄕校에서 작성한 校案이다. 교안은 향교에 입학한 校生의 명부로 현재 예안향교에는 17~18세기 동안 작성된 50여 건의 교안이 전하고 있다. 이중 1687년에는 2월과 8월에 각각 작성된 교안 두 건이 전한다. 다른 해의 교안도 2월 또는 8월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예안향교에서는 春享과 秋享이 실시되는 달에 교안이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 교안에서 교생은 크게 ‘額內’와 ‘校生’으로 구분되어 있다. 전후에 작성된 다른 예안향교 교안은 ‘액내’와 ‘교생’, 이외에도 ‘別儒’·‘額外’와 같은 구분이 더 있지만, 본 교안에서는 두 부류만 기재되어 있다. 이는 국가에서 정한 향교 교생의 正額과 신분 구분에 따라, 예안향교 측이 구분해 놓은 것이다. ‘액내’는 정원 이내의 교생으로 예안현의 일반 사족이 해당된다. ‘교생’은 ‘액내’ 구성원과 신분적 차이가 있는 교생들이다. 신흥사족이나 일반 평민이 해당되며, 避役 또는 신분 상승에 목적을 두고 입록하는 자들도 많았다. ‘별유’는 1661예안향교에서 작성한 「校案改修正時完議」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여기서 ‘별유’는 ‘액내’에 입록되었다가, 나이가 많거나 수년 ‘액내’를 역임했을 경우, 옮겨가는 명부다. ‘액외’는 정원 이외의 교생으로 처음에는 ‘액내’ 교생과 신분적 차이가 없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교생’처럼 신흥사족이나 일반 평민, 그리고 庶孼 등이 입록한 것으로 보인다.
1687년 2월의 교안에서 ‘액내’는 모두 35명이며, ‘교생’은 모두 33명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액내’는 李氏 12명, 金氏 9명, 趙氏 7명, 琴氏·南氏 각 2명, 朴氏 1명 순이며, ‘교생’은 金氏 14명, 李氏 8명, 琴氏·尹氏 각 3명, 朴氏·孫氏·禹氏 각 2명, 權氏 1명 순이다. 한편, 자료 말미에는 당시 禮安縣監의 着官과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 校生의 신분적 특성과 17세기 예안현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經國大典』에 따르면, 고을의 규모가 縣일 경우 30명의 교생을 둘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향교마다 정액을 초과한 교생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사족층의 증가와 향교를 매개로 한 하층민의 신분상승 및 避役 도모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향교는 예안향교처럼 ‘액내’·‘액외’·‘교생’·‘별유’와 같은 교생에 대한 신분 구분을 시도했던 것이다. 한편, 예안현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의 성관으로는 安東權氏·安東金氏·永川李氏·眞城李氏·奉化琴氏·英陽南氏·光山金氏·橫城趙氏 등이 있는데, 본 교안의 교생들도 이들 성관(姓貫)에 해당된다. 이들 가문은 향교 입록을 매개로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朝鮮後期 書院硏究』, 李樹煥, 一潮閣,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校案
額內
金{石+成}
李觀標
金澐
李光復
金沆
李聖弼
尹商顔
朴慶始
琴羲操
李厚載

金重國
尹商佐
李光烈
尹商蓍
金得河
朴世昌
金湊
琴鳳操
金以兌
琴鍵
金翰國
李柱
金洵
孫景曾

金振海
李基挺
禹昌言
禹斗聖
金徽
孫萬老
金尙澄
權璡
李仲白
金命天
金命一
校生
金世安

李{王+比}
李?
李重榮【移去】
李春榮
李如松
李彦榮
金寶國
金?
金泛
金道成
趙之賢
李聲重
金世珍
李富榮

李英建
金英達
金秀國
南復{示+刀}
南龜?
金賁國
趙邦彦
趙{身+敦}
趙美英
趙重呂
趙望碩
朴世規
李根
趙壽萬

李順哲
李震哲
琴遽鍾
琴智謙

丁卯二月日
[着官][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