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3년부터 1831년까지 좌수들의 인명과 差任 연월을 기록한 〈座首鄕任錄〉
자료의 내용
1683년부터 1831년까지 좌수들의 인명과 差任 연월을 기록한 〈座首鄕任錄〉이다. 문서 서두에 李大有의 序文이 있고 좌수명단에는 1683년에 張是璧의 差任을 위시하여 각 좌수 154명의 職任擔當 年月을 기록하였다.
향청의 좌수와 별감은 지역 사족 중에서 선발되어 위로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동시에 아래로 鄕吏를 단속하고 향촌 사회를 규찰하며 사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향임 중 최고 직임인 좌수를 담당하는 인물은 가문의 위세, 개인의 인품, 관직 역임여부 등이 모두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 문서와 동일한 시기의 별감들의 명부인 〈별감향임록〉에 등재된 인물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중복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좌수를 배출한 가문이 별감까지 많이 역임하고 있어 좌수가문을 중심으로 향촌사회가 운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안향교에 소장된 여타의 명단, 향안이나 유안, 청금록, 직임 관계 案類 등에서도 비안현의 주도적 성관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다른 문서에서 드러나는 바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이후의 비안현의 주도성관은 크게 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기존의 성관에서 소수의 새로운 성관이 지역사회의 운영, 관리에 참여하는 양상이 두드러지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좌수라는 직임이 가지는 특수성이 반영되어 일반적인 성관분포 보다는 인적구성의 폐쇄성이 상대적으로 짙게 나타난다.
본 문서에 등재된 총 154명의 인물들의 성관을 살펴보면 張 44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李 30명, 金 24명, 朴 19명, 卞 18명, 禹 11명, 鄭 7명, 趙 1명 등으로 나타난다. 비안 향청, 향교에 보관된 각종 자료들을 통해 살펴본 비안현의 성씨는 比屋에 박·손·장과 來姓으로 정·나씨가 있었고 安貞에 임·나·박씨와 續姓으로서 김씨가 있었다. 그리고 新坪에는 속성으로서 황·임씨외에 변·장·김·정·우씨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성관 분포는 17세기 중반 이후 비안현에서도 일반적으로 양반계층의 전반적 재산감소, 혼인에 있어서의 솔서혼속의 퇴조, 예학의 발달과 철저한 준수 등이 원인이 되어 대략 6개 성씨가 각종 案類에 등재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본 문서에서는 인명을 제외한 다른 사항이 부기되어 있지 않아 이들의 관직을 알 수 없지만, 영남 사림파의 중앙정계에서의 퇴보가 반영되어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관말직을 역임한 예도 극히 희소하게 나타나는 것이 비안향교에 소장된 각종 인명부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국적 추세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격변 속에서 양반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새로이 부를 축적한 계열이 기성의 양반가문과 함께 지역운영의 일선에 등장하였던 것이 좌수라는 직임에까지 반영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한세기 반이라는 기간 동안에 향청의 최고 직임인 좌수를 담당한 인물들 154명이 기록된 문서로 같은 시기의 〈별감행임록〉과 더불어 향임들의 인적 구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긴 시간동안의 향임들에 대해 기록을 해 놓음으로써 시간의 경과에 따르는 직임들의 성관 분포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