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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좌수안(座首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1599.4773-20160630.Y163250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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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599
형태사항 크기: 31 X 21.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1599년에 처음 작성되기 시작하여 5회에 걸쳐 추록된 비안향교 〈좌수안〉으로 향청 운영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이다. 만력 27년의 20명을 시작으로 동년 12월에 15명이 추록되어 있고, 1603년 3월에 2명, 1605년 2월에 3명, 1647년 12월에 1명, 1676년 4월에 3명 등이 입록되어 총 6회 44명의 인명과 품관 및 소략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599년에 처음 작성되기 시작하여 5회에 걸쳐 추록된 비안향교 〈좌수안〉
자료의 내용
1599년에 처음 작성되기 시작하여 5회에 걸쳐 추록된 비안향교 〈座首案〉이다. 향청 운영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역대 좌수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萬曆 27년의 20명을 시작으로 同年 12월에 15명이 추록되어 있고, 1603년 3월에 2명, 1605년 2월에 3명, 1647년 12월에 1명, 1676년 4월에 3명 등이 입록되어 총 6회 44명의 인명과 品官 및 소략한 사항만을 기록되어 있는 문서이다.
연도별로 座目에 입록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최초의 기록에서는 성씨 중 金氏가 8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卞·李 각 3명, 張·鄭·朴 각 2명이고, 품관은 僉正·幼學 각 6명, 僉知·直長·參奉 각 2명, 主簿·奉事 각 1명 순이다. 같은 해 12월에 김 6명, 장 3명, 이·정 각 2명, 宋·禹 각 1명이고, 직장·봉사·유학 각 3명, 牧使·첨정 각 2명, 副正·주부 각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이 후 4차례의 입록된 좌수들의 인원은 1~3명으로 그 수가 극히 소수로 성관이나 품관에 관한 보편적 성향을 살펴보기에는 참고할 만한 사정만이 기록되어 있다.
비안현의 姓氏는 比屋에 박·손·袁·장과 來姓으로 邵(一作 鄭)·羅氏가 있었고 安貞에 오·임·나·박씨와 續姓으로서 김씨가 있었다. 그리고 新坪에는 속성으로서 彭·황·임씨 외에 卞(草溪)·장(順川)·김(善山)·정(陽城)·우(丹陽)씨 등이 있었는데 본 문서에 드러나는 성관의 분포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비안향교에 보관된 각종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면 등재된 인물들의 성씨별 분포의 변화양상을 알 수 있다. 본 문서는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자료 중 임진왜란을 겪은 뒤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것으로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의 비안현의 사족 구성원의 일면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이와 비슷하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작성된 17세기 중후반 이후의 자료에서는 기존의 비안현의 사족세력이 분화하고, 성관의 분포가 다양해지는 경향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양난과 당쟁의 격화, 그리고 상속제도 및 혼인관습 등이 17세기 중반부터 현격하게 달라지는데서 말미암았다고 보여진다. 다만 새로이 등장하는 성씨는 그 수에 있어서나 존속의 견고성에도 매우 취약한 면을 보이고 있어 17세기 후반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양반층의 잦은 이주로 족적기반이 그만큼 약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비안향교의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성씨(문중)를 살펴보기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향교가 소장하고 있는 향안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어느 고을을 막론하고 향청의 임원이 향교를 주도했기 때문에 향안의 분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550년대에 작성된 향안에는 16가지의 성씨가 있었다.(정, 박, 김, 우, 송, 장, 변, 이, 권, 임, 周, 홍, 曺, 손, 고, 趙) 그러나 본 문서에서와 같이 임진왜란 직후에 6가지 내외의 성씨만이 등재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양반계층의 전반적 재산감소와 혼인에 있어서의 솔서혼속의 퇴조, 예학의 발달과 철저한 준수 등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아울러 향안에 실린 사람들의 관직도 16세기 말까지는 비교적 관계진출이 활발하였으나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거의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나 미관말직을 역임한 예도 극히 희소하게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비안향교는 이 지역이 한국전쟁 중 격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향교의 건물구조나 관리가 비교적 잘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향교가 소장하고 있는 관계자료도 체계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본 문서를 비롯하여 16세기 말부터의 자료들이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이러한 자료들은 조선시대 향교와 향청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특히 비안향교 소장 자료들 중 좌수와 별감의 행임록도 구분되어 작성되고 있고, 특히 본 문서를 비롯한 좌수행임록 등은 16세기 말에서 19세기 후반까지의 비교적 꾸준히 작성된 기록들로서 이 시기의 향청 운영의 주체의 변화양상 및 관계 등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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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比安
座首安
萬曆二十七己亥五月日品官座目
僉知 朴稶 作古
幼學 鄭炯
參奉 金滉 作古
金潤 作古
僉知 鄭應精 作古
■正 卞世琳 作古
■子 李光祖 作古
■事 金邦柱
主簿 朴允淳
幼學 卞處仁
金活
張逅
僉正 張運
僉正 卞淂仁
僉正 李熙祖
直長 金安宅
僉正 李惟賢 作古
幼學 金喆 作古
直長 金天祿
僉正 金大祿

己亥十二月追錄 座首 張 [手決] 別監 金 [手決]
幼學 金澡
直長 金湜
奉事 宋愼孝
僉正 金謹守 作古
參奉 張進
直長 金敎守 作古
幼學 李(?) 安東移居
禹希天
副正 李(?)
主簿 金應祿 作古
牧使 張德亨
奉事 金順守
■正 鄭以精
■長 鄭瑚
■使 張德明

座首 張 [手決] 別監 金 [手決]
癸卯三月日
牧使 卞處貞
幼學 金啓

座首 鄭 [手決] 別監 金 [手決]
乙巳二月日
僉正 金漢柱 作古
奉事 朴而淳 作古
僉正 朴興立
座首 鄭 [手決] 別監 鄭 [手決]
丁亥十二月初四日
副正 朴之淳

座首 張 [手決] 別監 李 [手決]
丙辰四月初六日
幼學 金大桭
僉正 張德純
幼學 張德邵

座首 朴淳 別監 金 [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