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23년(1799)부터 순조 14년(1814)까지 용궁향교(龍宮鄕校)에서 작성한 교임록(校任錄)
자료의 내용
조선시대 향교에는 운영을 총괄하고 담당했던 직임 즉 교임(校任)이 존재했는데 바로 그 명부가 교임록이다. 현재 용궁향교에 현전하는 교임록 자료는 모두 3책으로 그 명칭을 임원록(任員錄)으로도 쓰고 있다.
교임의 명칭과 직제는 지역마다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교장(校長)・장의(掌議)・색장(色掌)을 두었는데 남부지방에서는 수임을 도유사(都有司)로 명칭 했다. 도유사 선출은 대체로 봄의 석전제(釋奠祭) 종료 후 헌관(獻官)과 유림들이 천거로 수령에게 삼망(三望)하여 택임하는 방법을 취했고, 장의와 색장은 도유사의 천거로 삼망하고 관의 택임을 받는 형태를 따랐다. 용궁향교도 이러한 방식을 따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용궁향교의 교임 구성은 대체로 도유사 1인, 장의 1~2인, 유사 2인으로 기재되어 있다. 유사는 뒷날 재임(齋任)・재유사(齋有司)로 불려지기도 했고, 전각유사는 유사나 장의가 된 적이 없고, 반면 유사는 장의를 거쳐 도유사에 이르거나 유사에서 도유사가 되기도 하였다. 임기는 대체로 1년으로 재임・중임하는 경우가 다소 있었다.
본 자료는 3책 가운데 하나로 정조 23년(1799)부터 순조 14년(1814)까지 16년간 424명의 명단을 수록한 교임록이다. 표제는 결락되어 없으며 좌목 구성은 직책・성명・간지(干支) 등에 관한 사항을 기재해 두고 있다.
먼저 용궁향교 도유사 역임자는 111명이다. 이들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이씨 25명, 정(鄭)씨 18명, 안씨 13명, 송씨 12명, 윤씨 11명, 전(全) 7명, 장씨 6명, 김・남・류씨 각 3명, 고씨 2명, 구・조(曺)・채・현씨 각 1명 순이다. 좌목 내 본관이 기입되어 있지 않지만 축산승람(竺山勝覽)에 의하면 상위권 성씨들의 경우 이씨는 성주・여주・한산, 정씨는 청주・동래, 안씨는 순흥, 윤씨는 파평, 전씨(全氏)는 축산(竺山) 등으로 파악되었다. 이들은 19세 초반 용궁향교 도유사를 역임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문들로 볼 수 있다. 이중 용궁현감 전헌조(全獻祚)・송경재(宋景載)・조용완(曺龍玩)・송계수(宋啓洙) 등 현직 지방관이 도유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나타난다.
차임인 장의 역임자 109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이씨 27명, 전씨 17멍, 정씨 13명, 안・윤씨 각 9명, 고씨 6명, 강・남・반・홍씨 각 4명, 장씨 3명, 류・박・채씨 각 2명, 김・신・현씨 각 1명 순이다.
말임인 재임・재유사 역임자 204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정씨 37명, 이씨 35명, 안・윤・전씨 각 18명, 남씨 13명, 류씨 12명, 강・채씨 각 7명, 반・홍・현씨 각 5명, 권씨 4명, 김・신시 각 2명 순이다.
본 교임록에 나타나는 성씨는 기존 교임록과 동일하다. 그러나 기존 교임록과 비교해 보면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교임의 구성에 있어 전곡유사(錢穀有司)의 명칭이 등장하지 않고 동일한 명칭이긴 하지만 유사 대신에 재임・재유사로 명명되고 있다. 그 인원은 17세기와 마찬가지로 장의는 1명, 유사는 2명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여건에 따라서는 장의 2명, 유사는 3~5명이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전곡유사가 기재되지 않는 것은 이들의 신분과 관련하여 기재하지 않았던지 아니면 재유사 중에서 그 직임을 대행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교임록에 있어 18세기 중반 이후의 가장 큰 변화는 교임의 임기가 크게 단축되고 도유사로 현직 지방관이 임명되는 경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오면 교임은 재임・중임하는 경우가 자주 보이며 1년 4~5회 많으면 8~10번까지 교체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지방관의 도유사로 임명된다. 이 같은 변화의 양상은 19세기 중반 용궁향교 임원록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 같은 현상은 여타 향교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 시기 향교의 향촌유림의 공동체적 내지 향촌자치제적 성격이 점차 감소되면서 그 만큼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18세기 후반 및 19세기 초반 용궁향교 교임의 구성・임직・임기 등 향교 인적구성과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교임록이다. 기존 교임록에 비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교임 구성 중 전곡유사(錢穀有司)의 명칭 삭제, 현직 지방관 도유사 임명, 임원의 재임・중임 자주 등장 등 이 시기 향교의 향촌유림의 공동체적 내지 향촌자치제적 성격이 점차 감소되면서 그 만큼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韓國의 鄕校 硏究』, 강대민, 경성대출판부, 1992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龍宮鄕校誌』, 용궁향교, 2004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