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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6년(1603)부터 순조 11년(1811)까지 작성된 성주향교(星州鄕校) 소장 성주향안(星州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0000.4784-20160630.Y163227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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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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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함창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형태사항 크기: 40 X 32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223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성주향교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성주 성주향교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안내정보

선조 36년(1603)부터 순조 11년(1811)까지 작성된 성주향교(星州鄕校) 소장 성주향안(星州鄕案)
본 자료는 조선후기 경상도 성주목(星州牧)에서 작성된 향안(鄕案)이다. 향안은 유향소(留鄕所)의 구성원인 향원(鄕員)의 명단을 말한다. 향안의 입록은 곧 해당 고을의 지배층임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양반사족(兩班士族)들은 배타적인 향안 작성을 통해 신분질서를 확고히 함과 동시에 향론(鄕論)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성주향안은 전국적으로 향안 작성이 보편화 되던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6년(1603) 사족들이 소실된 향안을 새로 작성되었다. 중수 된 이후 향안은 선조 36년(1603)부터 순조 11년(1811)까지 약 208년 동안 63차례 걸쳐 작성되어 1,416명의 향원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총 66개의 다양한 성관이 확인이 되며 30명이상 입록자를 배출한 성관은 13개로 55.3%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여타 56개 성관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13개 성관은 성산 여・경산 이・순천 박・성주 도・야성 송・의성 김・광산 이・성산 이・동래 정・영천 최・수성 나・성주 이・파평 윤씨이다. 모두를 조선후기 성주 향촌사회를 주도한 가문으로는 볼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쳤던 가문들로 판단 할 수 있다. 특히 숙종 36년(1712)을 기점으로 각기 작성되는 향안의 모습 즉 당시 남인계와 노론계로 분열된 성주 사족사회의 일단면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鄕案(星州鄕校)』, 성주문화원, 1999
『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 김인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선조 36년(1603)부터 순조 11년(1811)까지 작성된 성주향교(星州鄕校) 소장 성주향안(星州鄕案)
자료의 내용
본 자료는 조선후기 경상도 성주목(星州牧)에서 작성된 향안(鄕案)이다. 향안은 유향소(留鄕所)의 구성원인 향원(鄕員)의 명단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지방통치는 국왕(國王)에서 감사(監司) - 수령(守令)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과 경재소(京在所) - 유향소(留鄕所) - 면리임(面里任)으로 이어지는 자치행정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유향소의 구성원을 향원이라 하였으며, 그 명단을 향안이라 하였다. 향안의 입록은 곧 해당 고을의 지배층임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양반사족(兩班士族)들은 배타적인 향안 작성을 통해 신분질서를 확고히 함과 동시에 향론(鄕論)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성주향안은 전국적으로 향안 작성이 보편화 되던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6년(1603) 전좌수(前座首) 이부춘(李富春)을 비롯한 사족들이 소실된 향안을 새로이 만들면서부터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진 좌수 한사람이 개정을 빙자하여 불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선조 40년(1607) 기존 향안을 고례(古例)에 의거 수정 보완하였다. 당시 중수 시 제정한 절목(節目) 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 . 인진(引進)하는 사람은 나이 삼십 이상의 혼인한 자 가운데 내외의 문벌을 가려서 인진할 것. 一 . 무릇 비록 큰 과실이 있는 사람이라도 만약 그의 내외 처변(妻邊)이 현족(顯族)이면 구애를 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게 한다. 다만 향안에 부표(付表)를 하여 벌을 받은 사실을 표시 할 것. 一 . 강신할 때마다 집강(執綱)과 공사원이 함께 의논하여, 고을 안의 언행이 패악부정(悖惡不正)한자에 대해서는 경중에 따라 책벌을 결정할 것. 一 . 향안이 이루어지면 즉시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유향소에 두고 1부는 향교에 두어 잃어 버릴 일에 대비할 것. 이후 숙종 36년(1710) 향안의 타읍(他邑) 유출 사건을 계기로 한차례 더 큰 규모의 중수가 이어 진다. 당시 유출 사건의 발단은 숙종 즉위 30주년 노론의 존호 가상 문제에 대해서 향내 반대 상소를 준비하던 남인측과 이를 저지하려는 신향(新鄕) 내지 신노(新老) 세력간의 대립 요소가 컸다. 이러한 향촌 내 분쟁 격화에 따라 향안 조직도 분열되면서 숙종 36년(1710)부터는 향안도 따로 작성 되었다. 이는 양 향안의 입록자들이 숙종 12년(1686)까지는 동일하게 입록되다가 이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주에는 성주향교청천서원(靑川書院) 소장 2가지 향안이 존재하는데 전자는 신향 세력의 향안이며, 후자는 남인계 사족의 향안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검토하는 자료는 전자 상주향교 소장 즉 신향 세력의 향안이다. 중수 된 후 향안은 선조 36년(1603)부터 순조 11년(1811)까지 약 208년 동안 63차례 걸쳐 작성되어 1,416명의 향원 명단을 수록하고 있어서 조선후기 성주지역 성관별 입록 현황을 통해 그 대강을 유추할 수 있다. 좌목 구성은 성명과 간지에 관한 사항만 기록되어 있어 입록자의 본관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것을 성주문화원 국역화 과정에서 생몰년대・자(字)・호(號)・본관 등 인적사항을 대폭 보완하여 보다 구체화 시킨 『鄕案』 책자를 근거로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간다. 성 관 인원 성관 인원 성관 인원 성 관 인원 성 관 인원 星山 呂 118 玉山 張 26 金海 金 3 鐵城 李 2 浙江 施 1 京山 李 92 固城 李 25 慶州 李 3 海平 金 2 旌善 全 1 順天 朴 88 碧珍 李 24 密陽 朴 3 海平 李 2 竹山 全 1 星州 都 77 密城 朴 24 順天 金 3 慶州 崔 1 晉陽 河 1 冶城 宋 69 廣州 李 23 礪山 宋 3 光山 朴 1 昌寧 成 1 義城 金 55 淸州 鄭 20 延安 李 3 光州 盧 1 淸州 李 1 光山 李 53 南平 文 12 昌遠 兪 3 金寧 李 1 忠州 石 1 星山 李 50 瑞山 柳 12 光山 金 2 南原 梁 1 咸陽 朴 1 東來 鄭 47 居昌 愼 11 金寧 金 2 達城 徐 1 咸平 魯 1 永川 崔 38 淸州 韓 8 丹陽 禹 2 德山 李 1 海州 鄭 1 壽城 羅 36 包山 郭 9 水原 白 2 瑞山 鄭 1 牧使 3 星州 李 30 全義 李 7 仁同 張 2 順興 安 1 미상 330 坡坪 尹 30 安東 權 6 全州 李 2 新案 朱 1 星山 裵 27 潘南 朴 4 晉陽 姜 2 安東 金 1 위 표와 같이 총 66개의 다양한 성관이 확인이 되며 30명이상 입록자를 배출한 성관은 13개로 55.3%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여타 56개 성관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13개 성관은 성산 여・경산 이・순천 박・성주 도・야성 송・의성 김・광산 이・성산 이・동래 정・영천 최・수성 나・성주 이・파평 윤씨이다. 모두를 조선후기 성주 향촌사회를 주도한 가문으로는 볼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쳤던 가문들로 판단 할 수 있다. 13성관 입록자 776명 가운데 성산여씨·경산이씨·순천박씨·성주도씨·야성송씨 4개 가문이 444명으로 56%이고, 나머지 8개 성관이 44%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본 향안은 숙종 36년(1710) 작성되는 향안에서부터 큰 폭의 변화가 일어난다. 18세기 이후 경산 이·순천 박·성주 도·성산 이·동래 정·수성 나·파평 윤씨 입록자는 크게 증가한 반면 의성 김·광산 이·영천 최씨는 절반 내지 그 이하로 숙종 36년을 전후한 시기의 변화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17세기 입록자 수가 593명인 것에 비교해 18세기 이후 입록자 수가 823명인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이 향안은 총 63회에 걸쳐 작성이 되었는데, 17세기에는 37회 18세기는 26회인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 같은 사정은 18세기 성주향안이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작성된 사족 명부이자 폐쇄적인 성격을 띤 향안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고, 향안 입록자 격증과 파치(罷置)의 시기로 전환되었음을 의미 한다. 이는 성주 향촌사회 내 신향의 등장으로 인한 구향과의 대립 양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당색에 의한 분쟁적 성격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주향교 소장 향안 즉 숙종 36년(1710) 신향 내지 신출 노론을 표방하며 등장한 신향이 관권과 결탁하여 추진한 결과물로 나온 것이다. 먼저 이들은 향안을 중수하면서 249명을 새로이 대거 입록시키는 동시에 그 자격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조처를 하였다. 물론 이전 향안은 그대로 둔 상태에서 신입원(新入員)들을 입록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선조 40년(1607) 중수 절목에서는 입록 기준을 추천 성원 30명, 반대 3명 이하, 기혼으로 30세 이상자로 정해져 있었으나 그에 구애받지 않고 추천 성원 10명, 반대 2명 이하, 기혼여부 상관없이 30세 이상으로 개정 하였다. 특히 기존의 ‘내외 문벌을 가려 引進한다’는 것과 ‘유사 각1인 추천’ 핵심 조목을 삭제한데서서 종래의 향안과 그 차이점이 확연하다. 18세기에는 향권의 관권 귀속 추세에 따라 이들 세력은 관권의 비호하에 성주지역 향권을 장악해 나갔다. 당시 향안 중수를 향임(鄕任) 좌수 도영하(都永夏)와 공사원(公事員) 이지완(李志完) 등 노론을 표방했던 인사들이 담당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러한 점을 대변한다. 좌수 도영하는 숙종 13년(1687) 문과급제 후 승문원판교·첨지사를 역임했으며, 그는 김장생의 문묘종사 청원서인 「沙溪先生從祀疏」를 통해 김장생의 공적과 학통의 정당성 및 후학들의 사기 진작을 도모하였던 인물이다. 지역 노론의 대표 가문 벽진이씨 출신인 이지완은 성주로 잠시 유배와 있던 김창집과 민진원과 교유한바 있고, 송시열을 배향한 노강서원(老江書院) 건립에 나학순(羅學淳)과 함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또한 숙종 28년(1702) 영남 유생들의 김장생 승무소에 연명하였다. 이러한 향안 중수를 통해 외연을 확대하려한 신향들의 시도는 남인들과의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였고, 목사 이만성(李萬成)과 감사 최석항으로부터 처단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숙종 38년(1712) 향안(壬辰籍)에 신임 의리를 고수한 이규렴(李奎濂)를 좌수로, 숙종 46년(1720) 향안(庚子籍)에는 김창집이 성주에서 사사 당하자 상사(喪事)에 참여한 박성시(朴聖時)가 공사원에 차정되었다. 이처럼 신향들은 성주지역 향임층을 장악하면서 지역 내 영향력을 점차 확대 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노론계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이 따랐다. 향안 중수 시 성주목사로 재직하던 김상직(金相稷)의 협조와 지원 그리고 숙종 38년(1712) 발생한 박경여(朴慶餘) 산송에 대한 처리 과정에서 지역 여론과는 배치되는 결과를 내놓은 성주목사를 비롯한 감사 이의현(李宜顯)과 어사 홍치중(洪致中)의 편당적 행위도 지역 내 노론의 영향력을 확대 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영조연간 만들어진 향안 첫머리에 3명의 성주목사 역시 모두 노론계 인사들로 이는 향안의 작성이 완전히 수령 영향력하에 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처럼 향안 중수를 둘러싼 신・구향간의 분열과 대립은 숙종 36년(1710) 향안을 작성하기 이전부터 수차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현종 4년(1663) 여헌 문인이자 이광정 스승인 이주의 향안 중수 서문 중에서 지난날의 향안을 펼쳐볼 때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오직 그 그릇된 곳을 삭제하고, 방만한 책모양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수하는 데에 불합리 할 때 향중부로에게 건의하여 체제를 새롭게 한 뒤에 옛날의 내용을 이기하였으니 후인들에게 전수하려는 신중한 의도가 예사롭지 않았다.(중략) 특히 이번에 향안을 개수하는 일은 또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일대 전환기가 될 것이다. 라는 기록은 17세기 중반 향안 체제 정비와 중수를 통해 향촌사회의 전환점으로 삼으려 했던 당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이후에도 성주 향론의 분열과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고, 숙종 36년(1712)을 기점으로 향안 양분 되었다. 즉 향안은 신향 주도의 향안은 성주향교에 구향 주도의 향안은 회연서원(檜淵書院)에 각기 보관하게 되고 양측의 활동처도 달리하게 되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성주지역 재지사족의 분포 현황과 변동 및 향안 운영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 인적구성, 성씨분포 및 향안 입록 규정을 살펴볼 수 있다. 기존 남론(南論)을 고수하였던 성주에서 신향 내지 신출 노론세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사족사회는 분열되었으며 결국 향안의 작성 또한 당색에 따라 독립적으로 작성되었다. 바로 숙종 36년(1710) 이후 당시 남인계와 노론계로 분열된 성주 사족사회의 일단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鄕案(星州鄕校)』, 성주문화원, 1999
『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 김인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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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案 星州鄕校
右完議爲追誦前鄕案改修事吾鄕
地廣物大而號稱文獻之邦鄕案不可
一日無也前座首李富春議與鄕中
若干士友書成鄕案意甚美矣而傳
之未久適値座首非其人托以改定厚
誣一鄕使鄕大夫父老之名付諸丙丁
之中豈不痛矣乎非但隣邑有回錄餘
燼之譏鄕先生大人皆欲其追錄前
案故不敢違越玆誦其時付案人姓
名成爲一秩不問存沒一依當初成
籍但燒案今已五六年矣追誦之際
安保其不漏落也如有漏落者講信之
日不爲可否直書于案而必須衆所共
知得二十人著書然後許付其時或
在喪或未及娶而未參者亦多須速
爲講信以廣引進之路此外節目則
一依當初規約姑削燒案人姓名而待講
信日公論之出若其追成節目則恭俟
後之知事體者云
一引進人員年三十以上有室者擇其內
外門閥引進事
一凡人雖有大端過失若內外妻邊顯
族則勿拘許參但鄕案中付表示罰事
一每講信時執綱與公事員同議凡鄕
中言行悖戾不正者隨輕重定責事
一鄕案旣成 卽書二件一在所一在校
以備閪失之患事
鄕先生
鄭崐壽
金宇容
金宇顒
鄭逑
李格
裵德文
李淳
李彭年
金遇袞
金聃壽
李儆
都夢虎
李富春
韓景祉
李成範
宋遠度
裵應褧
鄭承勳
全守慶
李峻明
李涉
宋遠器
李成簡
李成節
李心海
柳棡
呂允恭
徐思達
裵應袞
文勵
李心玉
兪遇
李簬
宋玧
呂允恕
宋潑
李弘局
金天洽
呂惟謙
呂弘毅
鄭彦忠
李天埴
金行可
李韂
李心一
宋汝潤
李天培
宋光廷
羅光濬
朴子羽
李陽得
都應雲
兪遠
金廷龍
朴義老
鄭承烈
李繼白
宋後昌
鄭承吉
李楷
崔恒慶
朴明佑
鄭彦義
李猉瑞
李天增
呂德龍
金軸
李檥
張顯道
李{⺮+舒}
李心得
李心慜
朴明胤
李天封
李心極
宋光啓
鄭樟
宋後慶
李彦英
李奎文
李榮雨
李心弘
李潤雨
李承後
都世雍
鄭承慶
金廷稷
鄭彦誠
李命龍
柳震男
李善繼
朴宗緖
呂弘立
李文雨
宋光宗
宋光宅
都世純
都聖遇
李得龜
李元雨
萬曆三十五年丁未六月二十二日重修
李{⺮+黨}
金天渫
金天海
金輳
金廷益
李惟達
金廷契
李堉
鄭錘
宋忠言
李汝蓂
金天灝
呂燦
鄭銑
金檝
朴東立
呂炯
李埱
呂烜
呂焞
朴雴
萬曆三十五年六月二十二日
李淸
權玏
李惟迪
權大一
崔嶾
宋時言
文虎英
李靈雨
李煃
萬曆三十九年五月十一日
全士憲
羅瑊
裵尙龍
呂嗣音
金孝可
李惟逴
呂挺生
李命夔
朴民立
李壆
呂焯
李重亨
崔轔
天啓六年正月三日
李蘭美
李道昌
朴震英
鄭天澍
崇禎元年十一月八日
張鳳翰
鄭稷
權宇一
朴斗文
朴羾衢
李長立
裵尙虎
李長亨
李綸
宋暹
李道融
金以潤
崔震衡
金夏鼎
崇禎五年正月初四日
宋周賓
李起雨
張應一
李之茂
鄭天沃
金頊
李道長
都衛國
呂孝曾
鄭惟熟
朴震耈
崇禎六年十一月十四日
鄭天濡
李益銓
李惟銓
李命龜
金梲
李久亨
崇禎八年二月二十三日
李{⽷+宙}
李道章
呂孝周
李泰亨
鄭惟燾
崔震華
庚辰正月五日
鄭惟勳
朴震龍
李壽星
呂孝源
李堤
宋時振
李杜齊
崇禎十三年八月十九日
朴翊
都鎭國
呂孝績
呂孝吉
都翰國
都禎國
甲申八月二十四日
呂孝程
呂孝孟
呂孝閔
李邦銓
朴以敏
呂孝思
柳榮
李{⼟+坴}
李胤亨
李景亨
李斗鎭
甲申十一月二十四日
金殷鼎
都憲國
丁亥正月初三日
李之華
張以兪
朴震昌
李成實
慎含章
李命銓
朴震赫
文再炯
文再煥
宋世隆
李國銓
朴震獻
權穆
金樞
李光彦
金坖
李光獻
李杜文
李遠鎭
崔震泰
裵世維
李元禎
金是燧
李斗樞
柳潁
呂孝章
金楨
戊子二月初三日
李之馨
金以謙
金是瑩
慎得章
李爾銓
朴以斅
崔震望
李光挺
尹琬
朴載亨
李亨千
裵世紀
李景聃
李斗光
崔震中
己丑正月四日
羅尙褧
李玧
李廷銓
張鎭
李瓛
朴以敘
金是犖
李玹
文再燁
金是榮
張振玉
朴振溟
李亨萬
李亨祉
金是榮
金庭碩
呂孝老
金{⼟+全}
裵世緯
張挺玉
呂孝達
呂大和
庚寅六月二十四日
宋世彬
朴震吉
羅必素
李培
金是榮
李達天
李斗晶
金日章
崔震雄
癸巳二月二十八日
李慶一
李普
呂載和
朴尙眞
甲午正月初三日
李緭
朴翿
李亨禧
都處鎬
金一柱
朴振河
李澐
李達宇
朴䎘
李暉
李潁鎭
甲午十一月十三日
金榗
李亨百
朴元榮
李亨祜
呂以和
李元祿
李斗元
朴景眞
李光碩
丙申正月初三日
李亨祚
李亨祺
金重鼎
李亨禔
呂成和
李達漢
崔珪
呂景和
李斗南
呂致和
丁酉正月初三日
都處洛
丁酉正月初三日
韓仁浹
李奉世
宋時哲
鄭弘錫
宋時綱
鄭昌基
金{⽯+先}
張{金+永}
金庭奕
朴振漢
郭天民
金重呂
李晢
文振南
都處中
李斗長
呂用和
戊戌十月十七日
李溍
李原禮
李淶
己亥正月初三日
李世銓
都處大
李達雲
壬寅正月初三日
宋文徵
張鍵
宋獻徵
宋有徵
尹瑾
李元祉
李海潤
張萬紀
癸卯七月二十五日
朴撝謙
朴思謙
李亨億
李亨兆
宋烶
金垷
呂惟和
都處順
李台明
李時格
文道南
都處謙
李曦
李亨河
李海達
李暘
鄭昌祉
李益新
乙巳正月初七日
李元祥
李道彬
郭天時
李墀
李坡
郭天佑
李元祺
張鈺
金庭翊
李埰
呂成和
李蓍
呂雲和
呂應和
呂純和
張萬元
己酉正月四日
朴鳴謙
宋熤
朴莛
李碩英
李達新
李奎泰
羅彬
己酉正月四日
文翰南
金是爀
庚戌正月三日
李晉
呂宣和
李休命
李㵑
李澄
李暄
李晩
宋世徵
李景東
文自南
朴慶增
金重器
朴世冑
壬子正月三日
呂天和
呂中和
呂益和
朴振洙
呂聖和
李樞明
呂命和
李斗新
張萬重
李聃命
呂仁和
李贄
李賢
李爾觀
呂振和
癸丑正月三日
宋世達
金重九
鄭喬岳
朴慶碩
金世臣
裵正徽
都處東
文道成
張茂先
李爾綱
李奎明
呂伯和
呂聖擧
右癸丑秋案正月初三日
尹理
呂賓和
鄭昌緖
右甲寅春案正月初三日
崔璔
崔珹
崔璐
右甲寅春案
張應天
呂台星
金夢說
李箕明
朴有登
李漢命
金應奎
乙卯正月四日
柳再昌
張擇玉
崔瑋
呂宜和
李井明
張茂昌
朴來賓
丁巳正月七日
宋世雄
都處亨
柳延壽
呂萬和
李仁濟
朴有厚
張萬㝡
呂心和
李爾昉
朴振宇
李再郁
戊午正月四日
宋燱
李時相
宋焌
李道新
宋永基
都重望
李世封
崔琫
柳翼壽
李鳳祖
李贇
李台老
李昌冑
鄭昌載
金重聲
己未正月二十六日
愼潛
愼汎
李壽億
李海潑
愼游
愼沆
李海亮
李景春
呂商和
呂八和
呂文擧
都處諴
都處愼
李宜樑
裵聖徽
李海寬
裵遠徽
張萬益
羅欽
呂尙擧
金應畢
宋順基
李昌老
都處華
庚申七月二十六日
朴篪
愼湛
呂克和
李景迪
呂德和
李再馨
朴有新
柳昌瑞
朴來朋
李爾藩
李爾適
李蕡
呂殷擧
都重石
辛酉正月四日
宋世弼
都處元
宋烒
都處貞
宋㷞
李翼明
朴振濂
李知新
宋啓基
李再新
文道郁
文道三
朴有觀
朴來興
鄭林明
李應初
崔瑗
李爾沆
朴聖冑
壬戌正月初四日
宋燱
宋焌
右兩員已入於己未案而今有難便事勢移錄於此
韓穫
都爾說
金重華
李道濟
金重玉
李文濟
李壽天
金重恒
呂仲擧
金得說
張茂養
呂鵬擧
金重兌
裵益徽
金台鉉
李昌夏
張茂膺
金世選
甲子十一月十一日
金世鎰
李奎英
金世鎔
宋敬基
張萬成
都永成
朴有應
都處夏
李心明
李景燾
呂渭擧
呂昌擧
宋胤基
李世圭
都永元
張大載
朴振寰
李昌華
呂漢擧
李賓
李爾泌
李枝蔓
李柱天
李爾光
丙寅正月四日
粵在萬曆癸卯年間前座首李富春議與鄕中
若干士友書成鄕案傳之未久適値座首非
其人托以改定厚誣一鄕使鄕大夫父老之名
付諸丙丁之中是固一邑之不幸而其後五六
年先父老追誦前案始爲修正自是以後逐
年引進永爲恒規迺者一邊之人圍棘
聖廟拒黜疏函惹起爭閙之端持去鄕
案藏置於他邑此實無前之一大變而惟玆鄕
案一日之不可無者豈以一邊之持去仍爲廢
格而不行哉玆與五六同志更爲修正舊案丙
寅理想固已宛然丁卯以下新案入於一邊持
去中故依前丁未年規更爲追誦列書如左而
或不無漏落之人是可歎也繼自今歲之增修以
復先父老之遺旨則其於立紀綱而美鄕風夫豈
少補也哉噫前後一鄕案也而燒燼於癸卯見失
於庚寅再爲追誦足可見世道之變俯仰今古不
無感慨之懷而第流來古規必入儒林案後方
爲擬薦於院錄參院錄者入於鄕薦此則不可
不永爲遵守後之人勿賛行之則幸甚
一丁未修案節目座員滿三十人然後方通可
否厥後或以二十員又以十五員或以三不許入
又以一不或以三十歲爲限又以二十五歲流來規
例惟視會員多少而已不必以此拘泥玆今以後
座員二十員許入以二不年歲以二十三永爲定規

一鄕員雖有大端過失不得任意削出亦勿許
任自削去事
一近來投單已成痼弊歷觀前案多有刪出
之處此後如有投單請削者只削其名勿許改案事
李碩杲
張萬用
柳台壽
李奎禎
都永封
都永夏
李箕新
都永中
都永隆
宋永基
宋順基
宋炅
宋燮
鄭脩宗
宋泰基
宋敬基
李東新
李碩昌
宋爀
宋胤基
郭麒壽
宋煊
朴世杰
宋學基
宋聖基
李奎齡
李爾翔
李碩良
李夏新
李日新
張大胤
宋周基
李爾靖
李世採
柳漢瑞
李碩恒
李碩隆
張大智
李世培
李蓍遠
羅錀
郭麟壽
宋商基
宋{⽕+寬}
羅天泳
李命新
李碩徵
李碩弼
李寯
李碩俊
李冣
李實
李應老
李碩遠
李爾應
李碩佐
羅天潤
羅天璧
宋殷基
李錫玄
宋履基
李完
李誠中
李憲
李惠
宋斗錫
宋顯基
宋玄基
裵胤脩
宋鼎基
宋麟基
宋台錫
李命老
宋文基
宋萬基
張載顯
張漢翼
張海翼
張瑞翼
張大翼
宋臨基
張元翼
張聖翼
都永元
張振翼
張溟翼
呂鴻擧
張南翼
張斗翼
呂漢擧
李仁榮
呂元擧
呂必擧
都永祥
呂命擧
呂海擧
呂鳳擧
都永亨
呂彙擧
呂姬擧
呂檉
李時榮
呂聘擧
呂英擧
都永宙
都永祺
呂美和
呂望擧
呂八擧
李泰榮
呂汝擧
都永昌
呂樸
都永全
呂櫶
呂枋
呂俊擧
李再榮
李春榮
呂楗
都命說
都永鼎
呂時擧
呂得擧
呂極
呂埜
都永賢
呂公擧
呂桓
都永寧
李長榮
呂道擧
都永胤
呂㦿
呂檖
呂贇擧
李爾擧
李必蕃
都命喆
都永益
呂權
呂檣
呂逸擧
朴有武
呂先擧
朴有曾
呂宸擧
裵胤啓
裵晉徽
裵胤錫
裵胤恒
呂氣和
呂龜擧
李迪新
李宰
李宖
李志完
金南粹
金世逸
金世欽
吳應周
金世運
金世迪
裵度徽
鄭啓欽
鄭致欽
金世賢
裵碩徽
朴聖任
鄭復欽
鄭益欽
鄭彦濟
朴聖濟
朴聖時
李潪
金台鉉
金光鉉
金重璋
金正鉉
文時弼
朴思沈
金弼鉉
金益鉉
金重元
金重宇
朴思徽
金汝龜
金兌鉉
金乃鉉
文時佐
金震鉉
金夢鉉
金時烇
李石經
李石紀
朴泰元
朴泰賢
李石維
金光洛
愼漢相
愼天相
李石綵
朴泰恒
鄭林大
鄭元杰
鄭亨杰
李再春
李再顯
李賢冑
李昌華
李昌徵
金應辰
李昌奎
李昌甲
李霖
金世鍊
李麟瑞
李龜瑞
朴來陽
朴思仁
朴有朋
崔后百
李弼明
崔后永
崔后隆
李泰林
李仁濟
尹商來
尹孝彦
李汝材
李賓
李庭植
李元植
李昌植
李垕植
李宇植
李贊
李汝一
李汝蕃
李汝權
朴泰远
朴大远
金世平
李奎命
李桂邦
李世球
李柱震
李世寶
庚寅四月二十六日重修
李碩久
朴道亨
禹錫珪
鄭光圭
禹錫玹
朴始增
郭喜遠
李奎濂
朴始淳
韓世輔
尹謙來
朴始平
權載星
金益灝
尹觀來
都永一
郭喜慶
李志寬
尹朋來
都永復
李奎運
朴始一
都永奕
朴始陽
都永慶
都命卨
李世珌
尹升來
李道亨
都命吉
尹繼彦
李世珩
都命全
鄭基泰

庚寅四月二十六日
座首前正朗
都永夏
公事員
都永中
李志完
尹孝彦
李時蕃
權載重
宋弘望
朴始郁
都命圭
李景龜
李瑜
柳萬葉
李益祥
羅學濟
李再彬
朴時泰
李道恒
朴時益
金重震
權載經
文時經
李夏埴
尹和彦
李世遇
鄭重泰
別薦
鄭鐸
鄭昌堯
李志尹
鄭鍵
尹昌來
尹錫來
尹陽來

壬辰正月九日
座首前李奎濂
別監朴始陽
鄭永慶
鄭基泰
公事員朴始一
鄭基泰
右完議爲成置事近來投單之習已成
痼弊其所以爲心者非出於公議而只報其
嫌怨至使已成之案每每封置豈不大可
寒心哉自今以後鄕議共公之外如有一人
以私意投單者只削其名勿許改案事
壬辰秋案
李光奎
李萬慶
李夏潤
權載運
李夏演
韓宗胤
李德涵
李夏培
乙未九月二日
李霶
李夏成
都永承
李道光
李霫
李道興
都命鼎
李雯

座首李景龜
別監朴始陽
李益祥
韓宗胤
公事員李再春
都永慶
庚子正月十三日
鄭光宗
李聖模
朴始華
朴鳳儀
李夏徵
鄭孝杰
李德標
李汝哲
尹忠彦
今此改可不雖出於勢不得已而前案中
朴始彩李夏相宋希程鄭榮祚四員遽
有游垈之感可勝歎哉聊叙首末如此
以備後來之觀覽云爾
李國亨
李聖規
李永慶
柳萬相
李容
羅學沈
李宇
李夏榮
李{⼧+言}
李夏碩
尹垕彦
宋希天
李德潤
都命宇
鄭林采

座首都永隆
別監羅學濟
都永慶
李夏埴
公事員朴聖時
都永慶
宋延祺
李夏承

羅學淳
朴鳳采
朴鳳紀
朴鳳瑞
朴鳳休
鄭榮祉
都命時
庚子改可不時此七員皆在衰絰中今此
引進改可不以書耳
鄭榮徵
李聖準
宋延禧
宋台三
李暹
鄭昌圭
李夏馨
朴鳳輝
鄭俊
宋載昌
李窩
權宜規
李{⼧+欽}
柳萬禎
金鳴大
權炯
朴鳳來
李泰奎
李海壽
李德淵
鄭榮震
權煁
李匡憲
李寅
權宜矩
李白奎
李察
鄭洁
鄭榮來
李騫
李匡曄
李{雨+彡}
都命昇
李德壽
鄭忠杰
朴世胤
李德一
右壬寅春案改可不辛亥二月日
今此改可不雖出於勢不得已而前案中李世
績羅壽天金萬鏞羅壽漢金邦鍵權宜時李
夏觀韓宗海李夏謙朴泰昌十員遽有游垈之感
可勝歎哉聊叙首末如此以備後來之觀覽
李千齡
宋鳳錫
李汝栢
愼光道
鄭林華
朴就章
朴聖規
朴有華
朴聖後
羅學成
李翊壽
金世鉉
李恒壽
朴垕章
都命夔
羅弘績
都命恒
李光垂
朴太茂
尹景淵
尹景春
右丙午春案辛亥二月改可不
今此改可不雖出於勢不得已而前案中李惟一
李德隣二員遽有游垈之感可勝歎哉聊記首末如此以
備後來之觀覽
李震休
朴斗章
朴圭章
李漸休
李聖楷
朴來章
羅世珩
羅世璣
都顯龍
朴鳳祥
鄭榮初
右丁未夏案辛亥二月改可否
今此改可否雖出於勢不得已而前案中朴思謹
遽有游垈之感可勝歎哉聊記首末如此以備後來
之觀覽
辛亥二月引進時
別薦
尹世謙

呂眞擧
庚戌辛亥二月
李益紀【改可否】
李益載
金汝協
金興大
羅重煜
宋載獻
呂琳
崔后甲
李汝基
鄭天垕
都永垕
呂龍擧
金達鉉
鄭榮泰
鄭榮甲
鄭榮基
李亨泰
都尙仁
鄭再元
鄭再觀
呂棠
都命耉
朴思玄
宋燁
李性天
宋載亨
宋載璜
鄭天衡
鄭賢杰

李聖封
金汝翕
呂善擧
李泰蕃
李匡欽
金應鉉
柳萬根
金順百
朴泰敦
李德謙
李觀休
宋星明
宋希泰
羅學龍
羅興績
李宇白
李箕壽
羅世瑀
都命垕
鄭栻
朴壽海
朴昇休
李霑
李霆
李霓
韓宗一
呂麟擧
辛亥二月十一日
座首朴垕一
別監都命喆
鄭榮來
朴世胤
公事員羅學淳
韓宗胤
甲寅四月日
宋獜錫
呂樊
李師泌

座首都命喆
別監鄭天垕
李汝哲
朴世胤
公事員李夏榮
李汝哲
丁巳閏九月日
鄭天奎
羅天老

座首金弼鉉
別監李聖封
鄭榮耒
公事員金世鉉
朴垕章
丁卯十一月初一日引進
朴聖瑞
宋心基
李聖斗
鄭藩
鄭履仁
李友栢
呂松
李昌玄
羅時鳳
李獜休
呂輔擧
李霙
張志學
李元垕
金啓鉉
都命協
尹勉悌
都命勛
朴太垕
鄭榮新
鄭再哲
金汝剛
尹勉貞
李挺徹
李性復
朴思說
李匡周
宋徽錫
李德游
權俶
李惟晟
張志經
李匡殷
鄭泰僑
宋老錫
朴鳳徵
李德純
鄭潤國
都尙中
朴恂
尹勉道
李天壽
都尙成
李世瑎
朴太範
朴之諴
宋之涵
李希英
羅得齡
朴璜
李宅根
李緯
李光頊
羅萬洙
鄭弘彬
愼廷煥

別薦
尹勉亨
李彦復

座首李夏埴
別監都命恒
羅弘齡
公事員都命夔
羅弘齡
庚午八月日
李伷
李挺寅

戊寅正月
日引進時
別薦
牧使金致溫

引進
李宗老
裵胤光
權侃
李惟吉
呂齊采
李載垕
李石根
李再鐸
李仁垕
李弘顯
洪禹栻
李德雨
尹勉敎
李信垕
朴淳一
李益春
呂齊觀
呂齊泰
朴之蕃
郭擧元
朴之謙
宋景錫
宋彭錫
朴太祚
鄭東羽
朴弘鍵
都尙經
李遇春
呂齊昌
都命八
李顯東
朴弘采
李挺德
金國範
尹守宅
尹守稷
羅萬禎
鄭榮祿
朴弘祿
羅萬祉
朴愼一
尹勉弘
李貞顯
李挺謙
鄭師國
李挺履
李光復
都尙勣
朴之遠
羅萬裕
李光璹
羅錫章
張敬漢
李遠馥
都尙殷
尹守經
朴恬
朴圭
李性哲
金恒範
李性明
金雴
鄭再垕
鄭漢鎭
都命成
宋復基
李城鎭
呂齊仁
呂攀
朴思訥
李禹玄
呂學擧
鄭達濟

座首羅弘齡
別監李天壽
都尙成
朴之誠
公事員李宅根
都尙成
己丑二月日
引進時
李碩五
李泰震
李重璧
引進
李惟喆
李必馣
呂齊岳
朴太信
李性恒
李{⾬+浹}
朴之元
朴瑊
鄭壽崗
金汝光
朴太望
李德明
都明臣
李光臣
李重顯
李日祿
李廷說
李世鎭
朴弘佐
鄭寬國
李性璞
裵德祖
李光集
李極秊
都尙維
鄭東燮
鄭達鎭
李東稷
鄭守範
尹守權
羅允洙
李挺弼
李基普
呂宜孝
李猷煥

別薦
李遂寬
李碩九

座首洪禹栻
別監李貞顯
李緯
李性喆
公事員朴泰範
李德雨
右完議者鄕堂行案已是百年前規例而
及今衰季論議不一公私抵捂有雖尙
行則因鄕校
釋菜之會行之於明倫之堂儘所謂權而
得中者玆於享會之日鄕議齊發刱行案
事於校堂自今以後鄕中諸員認爲常
規罷齋日行案之意預爲知悉各自
惕念齊會以爲春秋修正鄕案事完
議成置者
己丑二月日
都命勖
都永康
郭載元
李智垕
李碩輔
李師春
李宗垕
尹勉喆
李雨普

座首洪禹栻
別監李貞顯
李緯
李性喆
公事員李惟晟
都命八
日前修案之時已定此議而敦事之際
自爾忙迫期以秋間行之矣從後思
之終有所未安玆書
庚寅二月日
日引進時
牧使宋載禧
引進
李益休
裵述祖
朴之彙
李光禎
李德恒
朴鳳鳴
呂齊煥
李春運
朴之恒
裵學祖
尹守寬
李澤鎭
朴春蔓
金良範
朴之誠
呂齊祿
李英垕
李文煥
尹守仁
李光直
裵萬德
都尙觀
李守顯
李晟坤
呂宜悅
鄭龜瑞
李命鎭
尹守儀
鄭東翼
李敏哲
尹守一
朴尙燁
都尙志
李岡祿
尹守采
都宇中
李宇普
李允顯
李安根
朴之儁
呂休
鄭鎔
羅致龍
李顯柱
李頤壽
鄭再復
李春根
都尙曄
李光春
鄭友僑
朴弘傑
李惟說
羅性洙
羅極采
李東珩
都命敎
羅錫一
呂徠
朴之馨
呂宜泰
兪沁玉
李東益
都尙容
李光龍
李光述
李性孟
鄭榮鎭
李益鎭
鄭林錫
李昌星
李光表
李權世
李夏馥
朴龍章
鄭胤先
朴履儉
洪啓勳
張敬中
鄭周鎭
羅錫儉
鄭光國
李得說
鄭經臣
李性植
李綖
都尙周
鄭鍇
都尙勛
朴弘鎔
李時普
鄭自東
柳光宅
權允垕
羅極辰
李好說
愼基福
鄭東直
朴弘潤
李敏省
李昇祿
郭必昌

別薦
李海鎭

座首洪禹栻
別監李緯
公事員都尙成
朴弘錄
李光復
辛丑二月日
白而泂
姜篆
石琮
裵得吉
全龍
白佑民
崔善吉
金鳳連
朴潘源
裵玄福
韓春富
柳纘宗
金弘慶
文南
李善
李彭老
朴時潤
施文用
金演
李舜
朴致燁
梁蒔晩
李泰起
金春仁
河得千
裵錫義
成福齡
金錫璧
魯德玄
鄭世老
鄭信耘
白雲達
裵根商
李震芳
姜文煥
癸丑二月日
朴淇源
安春
朱光成
金敏章
丁巳八月初五日
朴聖旭
庚申二月日
盧世完
壬戌八月初五日
金奭中
癸亥二月初五日
李宜勇
金希賢
金孟
金百燦
乙亥八月初一日
朴而文
戊辰正月十
朴海元
申命元
己巳二月初二日
金顯範
己巳九月十八日
李時淳
裵錫庵
辛未二月初三日
鄭錫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