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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년(辛卯年) 옥동서원(玉洞書院) 하인안(下人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G.0000.4725-20160630.Y16502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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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군적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기타
작성주체 옥동서원, 상주목사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만산동
형태사항 크기: 31.5 X 28.5
판본: 필사본
수량: 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무자년(辛卯年) 옥동서원(玉洞書院) 하인안(下人案)
무자년 4월에 상주 옥동서원에서 상주목사의 재가를 받은 수호생 등의 원속들 명단이 적힌 하인안이다. 표제는 옥동서원 하인안이라 적혀있고, 내제 역시 동일한 제명을 적고 있다. 이 하인안에 기재된 자들은 상주목사의 면역의 재가를 받은 자들로서, 수호생으로는 박팔득, 김말돌, 최명운, 김팔강 등 4명이 나온다. 문서의 기재 방식은 성명을 기재하고, 하단에 거주지를 적고 있는데, 거주지는 옥동서원을 중심으로 부근의 모서면 가막리, 모동면 안평·오도리 등이었다. 가막리는 옥동서원의 동북쪽 15리에 위치한 곳이며, 안평리는 동북쪽 10리, 오도리는 남서쪽 5리에 있다. 즉 이들 수호생들은 서원 부근에 살고 있는 자들이었다. 하인안에는 수호생 외에도 묘지기, 재지기, 고지기, 사령, 구종 등의 직역과 명단, 거주지를 함께 기재하고 있다. 거주지는 서원 부근인 모동면 옥동리였는데, 이를 통해 본 하인안은 실제 서원 내에 사역하는 자들의 명단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옥동서원은 모두 10명의 원속이 원내의 사역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으며, 수호생안이 작성된 戊子年은 옥동서원에 남아있는 자료들을 참고하면 1888년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戊子年 4월에 尙州 玉洞書院에서 尙州牧使의 裁可를 받은 廟直 등의 院屬들 명단이 적힌 下人案
戊子年 4월에 尙州 玉洞書院에서 작성한 下人案이다. 標題는 玉洞書院 下人案이라 적혀있고, 內題 역시 동일한 제명을 적고 있다. 이 하인안에 기재된 자들은 상주목사의 免役의 재가를 받은 자들로서, 守護生으로는 박팔득, 김말돌, 최명운, 김팔강 등 4명이 나오는데, 신묘년 수호생안과 동일한 인물들이다. 문서의 기재 방식은 성명을 기재하고, 하단에 거주지를 적고 있는데 거주지는 옥동서원을 중심으로 부근의 牟西面 可幕里, 牟東面 安坪·吾道里 등이었다. 이들 수호생들은 서원 부근에 살고 있는 자들이었는데 가막리는 옥동서원의 동북쪽 15리에 위치한 곳이며, 안평리는 동북쪽 10리, 오도리는 남서쪽 5리에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에 소속된 守直軍, 守護軍 등은 군역에 종사할 의무가 있는 常民들을 대상으로 사액 서원의 중요한 시설을 보호하기 위하여 편성하고, 다른 역을 면제 받는 혜택이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수호군들이 서원을 侍衛하지는 않았으며 身役이 면제되는 대가로서 서원 측에 身貢을 받치거나, 서원 내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어 돕는 정도였다. 실제 경주의 옥산서원에서는 19명의 수직군안을 작성하여 군안의 명단이 변경되거나, 경주부윤의 교체시에는 매번 재가를 받은 후 신공을 거두었는데, 원내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서원 인근에 거주하는 수직군 등의 원속을 불러서 잡역을 시켰다. 옥동서원은 수직군이 아닌 守護生이란 명칭으로 기재하고 있으며, 수호생의 수도 4명으로서 여타 사액서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것은 옥동서원에 남아있는 품목, 완문 등에서 언급한 것처럼 상주목의 외곽에 위치하여 원속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으로는 옥동서원에 避役을 위해 入屬한 院生들 가운데 일부를 수호생으로 삼아서 身貢을 받는 대신에 실제 서원 내에 있는 厖村 黃喜의 影幀을 侍衛하고, 雜役을 도왔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인안에는 수호생 외에도 廟直, 齋直, 庫直, 使令, 驅從 등의 職役과 명단 및 거주지를 함께 기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서원 아래의 모동면 옥동리에 거주하는 자들로서 묘지기와 재지기는 신묘년과 동일한 자들이며, 고지기와 구종, 사령 등은 모두 교체되었다. 이중 使令은 신묘년에 差使라고 직역을 기재하였는데, 일종의 심부름꾼으로 서원과 관아와의 연락 등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구종을 서원의 원임이 출타 시에 앞에서 말을 끌었다. 이를 통해 본 수호생안은 실제 서원내에 使役하는 자들의 명단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옥동서원은 모두 10명의 원속이 원내의 사역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수호생안이 작성된 戊子年은 현재 옥동서원에 남아있는 1847~1848년 사이의 품목과 상서를 참고하면 당시 15명의 가속을 부리고 있었으며, 옥동서원이 사액을 받았던 1789년 이후 근 100명의 원생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완문의 기록 등을 참고해보면 19세기 중반까지 옥동서원에서는 15명의 원속이 사역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인안에 기록된 10명의 원속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더욱 약화되어갔던 19세기 후반인 1888년으로 추정된다.
자료적 가치
이 필사본은 옥동서원의 원속들의 규모와 거주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서원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관리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옥동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戊子四月日
玉洞書院下人案
玉洞書院下人案
守護生
朴八得牟西可幕
金唜乭牟東安平
崔明云牟東吾道
金八江牟東吾道
廟直 壹名 鄭老卽牟東玉洞
齋直 壹名 尹福金牟東玉洞
庫直 壹名 金龍孫牟東玉洞
驅從 貳名 朴尙鐵牟東玉洞
李興俊牟東玉洞
使令 壹名 李文伊牟(東)玉洞

使[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