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경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永川郡) 영천향교(永川鄕校) 향교전답안(鄕校田畓案)
19세기경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永川郡) 영천향교(永川鄕校)가 보유하고 있던 전답의 위치와 규모를 기록해 놓은 전답안(田畓安)이다. 자료의 결락이 많고 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작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본문 중에 1831년의 토지매매 명문(明文)과 1850년 3월의 척량기(尺量起)가 첨부되어 있어 19세기 무렵 본 전답안이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전답안에 기록된 전답은 우선 면(面) 단위로 구분되어 있으며, 다시 각면(各面)의 평(坪)·원(員)에 따라 전답을 분류해 놓았다. 전답은 일반적인 양안(量案)의 기재방식을 따르고 있다. 해당 전답은 가장 상단에 자호(字號)와 지번(地番)을 기재하였고, 이어 양전방향(量田方向), 토지등급(土地等級), 지형(地形), 두락수(斗落數), 동서장·남북광척수(東西長·南北廣尺數), 결부수(結負數), 사표(四標), 기주(起主)가 차례대로 있으나, 두락수·사표·기주 등은 생략해 놓은 것도 많다.
본 전답안에서는 영천향교의 전답이 관내 각면과 인근 하양현(河陽縣) 등지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결락된 것을 제외하고도 최소 10결(結) 19부(負) 이상을 보유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산상평(山上坪)에만 4결(結) 57부(負) 이상의 전답이 집중되어 있다. 조선후기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정부는 지방 교육의 진작을 위해 군현(郡縣)의 크기를 감안하여 학전(學田)을 지급하였다. 이에 따라 군에 소재한 영천향교는 5결의 학전을 지급받아야 했으나, 19세기 동안 그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었다. 실제 조선후기 향교는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학전의 규모보다 많은 학전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천향교도 증식을 통해 19세기 동안 10결이 넘는 전답을 보유하며, 이를 향교 운영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朝鮮後期 書院硏究』, 李樹煥, 一潮閣,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