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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안동 교동도회소(校洞道會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F.1931.4717-20160630.y165010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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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병구, 교동 도회소, 옥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작성시기 1931
형태사항 크기: 92.8 X 55.0
판본: 고문서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931년 안동 교동도회소(校洞道會所)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31년 3월 11일에 안동교동 도회소에서 충재 권벌의 문집 중간 당시 부록편에 퇴계의 이름을 직서한 것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서로 맞대어 논의할 필요가 있으니 4월 4일에 봉화 삼계서당에서 도회를 개최하여 난상토의하여 반드시 되돌릴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의 통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부록에 실린 만사의 제목 아래에 ‘퇴계이선생’이라 되어있는 것을 ‘퇴계 이황’이라고 쓴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통문에서는 충재의 문집 부록에서 퇴계선생이라 칭하는 것을 고치려는 것은 주자이후 일관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재 유곡에 사는 충재의 후손들이 미혹되어 바른 것을 어기려하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면서, 같은 후학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지켜보는 것이 옳은 것이겠냐고 했다. 그렇기에 자신들도 금일에 꾸짖는 것은 고충어린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한꺼번에 떠들어 시끄러운 때에 마침내 능히 한자리에 앉아 함께 대면하지 않고 제각기 경모하는 근심이 있기에 반성과 두려운 생각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차이가 없다고 했다. 이에 교동의 도회의 자리에서 여럿이 뜻을 모아 일제히 오는 4일에 삼계서당에서 도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으니 기한을 ㅤㅉㅗㅈ아 자리에 임하여 난상토의하여 정해진 대로 돌아가길 바란다고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결론은 알 수 없지만, 현전하는 1930년에 간행된 『충재집』에는 ‘퇴계 이황’이라고 고쳐 쓴 것이 수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31년 3월 11일에 安東校洞 道會所에서 冲齋 權橃의 문집 重刊 당시 附錄편에 退溪의 諱를 直書한 것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서로 맞대어 논의할 필요가 있으니 4월 4일에 奉化 三溪書堂에서 道會를 개최하여 爛商討議하여 반드시 되돌릴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의 通文
1931년 3월 11일에 安東校洞 道會所에서 冲齋 權橃의 문집 重刊 당시 附錄편에 退溪의 諱를 直書한 것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서로 맞대어 논의할 필요가 있으니 4월 4일에 奉化 三溪書堂에서 道會를 개최하여 爛商討議하여 반드시 되돌릴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의 通文이다. 본문에서는 충재 권벌의 문집을 중간하는 일은 斯文의 막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충재의 문집 附錄에서 退溪先生이라 칭하는 것을 고치려는 것은 300년 동안 이미 정해진 안으로써 이것은 집착이 매우 심한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부록에 실린 輓詞의 제목 아래에 ‘退溪李先生’이라 되어있는 것을 ‘退溪 李滉’이라고 쓴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통문에서는 후학이 宗師에게 어찌 감히 諱를 쓰지 않는 것은 朱子이후 일관된 것이라고 했다. 현재 이 冲齋集을 살펴보면 어떠한 大文字나 編纂의 사이를 흔들지 않는 것이 선현이 이미 정한 법례로서 백세의 公議를 헐뜯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冲齋를 존경하고 지키는 것이며 미안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酉谷에 사는 충재의 후손들이 미혹되어 바른 것을 어기려하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면서, 같은 후학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지켜보는 것이 옳은 것이겠냐고 했다. 그렇기에 자신들도 금일에 꾸짖는 것은 고충어린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한꺼번에 떠들어 시끄러운 때에 마침내 능히 한자리에 앉아 함께 대면하지 않고 제각기 景慕하는 근심이 있기에 반성과 두려운 생각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차이가 없다. 이에 교동의 도회의 자리에서 여럿이 뜻을 모아 일제히 오는 4일에 삼계서당에서 도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으니 기한을 ㅤㅉㅗㅈ아 자리에 임하여 爛商討議하여 정해진 대로 돌아가길 바란다고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결론은 알 수 없지만, 현전하는 1930년에 간행된 『冲齋集』에는 ‘退溪 李滉’이라고 改書한 것이 수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에 重刊된 문집 내에서 퇴계의 諱字를 고치는 일이 봉화의 安東權氏뿐만 아니라 예안의 永川李氏 들에게도 일어났다. 이것은 퇴계의 권위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이었다. 이 문서는 鄕戰과 관련한 사례연구에 도움이 된다.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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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 冲齋權先生文集重刊事係是斯文莫大之擧也値此吾道百六之日獲見 先生道學名節之懿愈久愈顯凡爲吾黨
後生者就不奉龜璧而仰日星哉第附錄中 退溪先生稱謂處改動三百年已定之案是甚見執也後學之於宗師不敢書諱已有朱子後一副類
例矣今此 冲翁之集顧何等大文字而編纂之際掉却先賢已例不免百世公議之訿則其於尊衛 冲翁地果無未安乎以若酉谷法門文獻之懿
知見之正有此久而迷悟誠不勝慨鬱之至而終始岸視莫之捄正亦豈同室相與之義乎然則吾林今日與有責爲生等抱此苦衷思欲一番貢愚者
久而但川塗脩濶時世擾攘迄未能合席對同粗效區區景慕之忧則反省懷惕之思想遠邇無異同矣玆於校洞道席僉議齊聲以來月初四日定道
會于三溪書堂伏願 僉尊趂期來臨以爲爛商歸定之地千萬倖甚
右文通
玉山書院
辛未三月十一日校洞道會所
公事員幼學 金秉矩
李晦發
柳運熙
曺司柳建宇
金晦鎭
權五愼
會員金瑞秉
柳淵昌
金德鎭
李中寓
柳晦植
吳錫燾
柳東根
金星洛
金甲植
李壽必
朴圭陽
李羲裕
金進秀
李縉鎬
南慶佑
金圭洛
閔元植
李弼鎬
金秉模
柳淵鱗
金昱洛
李壽基
申相協
金哲模
李暾浩
鄭進模
金秉宗
琴翼鳳
趙性瀅
李中格
柳淵秉
金樞秉
李象鎬
金性洛
李承傑
金泰鎭
金萬周
柳淵珪
權秉博
南近淳
權錫瓚
李勉鎬
鄭鎭伯
權在七
金秉燦
李漢杰
柳孝淵
金晩植
柳璋植
裵永漢
金奎宅
玉相璉
李起鎬
柳東燮
李益敎
鄭瀚模
李鉉復
南炳斗
沈宜商
申奎煥
李祥鎬
金奎旭
張龍文
金源
邊時均
金鍾漢
金秉烈
吳錫浚
申必熙
朴勝文
金秉軾
裵應植
趙周基
金書煥
金夏鎭
柳轍薰
李圭燮
金元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