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윤 2월 3일에 安東의 屛山書院에서 星湖 李瀷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에 扶助하는 것을 논의하기 위하여 20일에 성주의 檜淵書堂에서 모여 회의하자고 알리는 通文
1917년 윤 2월 3일에 安東의 屛山書院에서 星湖 李瀷의 文集을 간행하는 일에 扶助하는 것을 논의하기 위하여 20일에 성주의 檜淵書堂에서 모여 회의하자고 알리는 通文이다. 이 통문을 보면, 안동 병산서원 유생들은 星湖李先生의 문집이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던 중 선생이 거주하던 부근에서 문집을 간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기뻤으며 또한 찬조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자신들만이 斯文의 큰일을 결정하여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기에 문집 간행 사실을 도내의 모든 군자들에게 알린 후 오는 20일에 성주의 회연서당에서 모여서 부조하는 방안에 대하여 爛商討議하자고 제안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성호 이익은 退溪 李滉–寒岡 鄭逑-眉叟 許穆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이어서 기호지역의 남인계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성호학단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이 18세기 조선사회에 기여한 공은 매우 컸다. 성호 자신도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星湖僿說』은 1915년에 처음 간행되었으며,『성호문집』은 1885년 무렵 安禧遠·柳仁睦 등이 서울에서 간행 하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진척이 없었고, 1891년에는 충청지역에서 간행을 추진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 후 1903년 許薰·盧相稷·李炳熹·趙昺奎 등 性齋 許傳의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경비조달 등의 문제로 추진이 늦어지다가 1916년에 성호의 조카 李秉休의 6대손 李德九가 문집의 대본을 密陽 刊行所에 전달하였고, 1917년 密陽 退老里 西皐精舍에서 총 800매의 책판을 판각하여 50권 27책의 巨帙이 간행되었다.
통문에서 문집 간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안타까워했던 것은 이전에 계속 문집간행 시도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한 것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1903년 이래로 14년이 지난 1916년에 비로소 간행 작업이 시작되었고, 거질의 문집을 간행하는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영남지역 전체 교원에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안동 병산서원에서 호응하여 이 통문에서와 같이 都會를 제안했던 것이다. 본 통문 이후 도회가 성사되었는지 與否와 排錢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듬해인 1917년에 서적이 간행되었다.
[자료적 가치]
일반적으로 先祖의 문집을 간행하는 것이 아닌 道學상의 儒賢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斯文의 큰 일로 인식하였다. 그렇기에 해당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이 주관하거나, 후손·문인들이 주관하여 문집을 간행하면서, 소용되는 비용을 지역의 교원 및 문중 등에 분배하여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통문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유현의 문집 간행에 유림들의 역할이 컸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