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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영해 영일향교(迎日鄕校)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F.1917.4711-20160630.y165010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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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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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영일향교, 옥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효자동
작성시기 1917
형태사항 크기: 90.5 X 60.0
판본: 고문서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917년 영해 영일향교(迎日鄕校) 통문(通文)
1917년 3월 22일 영일향교에서 옥산서원으로 환본역조의 강상죄를 지은 영양이씨들의 처벌을 문의하는 통문이다. 영일에 영양이씨 이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현재는 세상을 떠난 지 30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후손들이 동명이인이었던 청안이씨 낙의재 이눌(1569~1599)의 창의 행적을 자신들의 조상이 한 것처럼 계속 주장하고 또한 죽계 이대임과 직재 서방경 및 그의 종질 서극인 등의 임란 당시의 의병활동도 역시 자신의 조상이 한 것처럼 속였다는 것이다. 실제 영양이씨 이눌은 명분이나 절의 등의 행적이 없었으며, 다만 일향에서 전고에 박학하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영일의 유림들은 환본역조의 강상죄를 저지르고, 사림의 기강을 침체시킨 이 영양이씨 후손들을 성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옥산서원이 영남의 수원이고 무릇 사림의 대론이 귀중하지 않는바가 아니니 절충하여 이에 사실을 알리고 옥산서원의 판단을 기다리니 빠른 시일 내에 올바른 판단을 내려달라고 당부하였다.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17년 3월 22일 迎日鄕校에서 玉山書院으로 換本易祖의 綱常罪를 지은 永陽李氏들의 처벌을 문의하는 通文이다.
1917년 3월 22일 迎日鄕校에서 玉山書院으로 換本易祖의 綱常罪를 지은 永陽李氏들의 처벌을 문의하는 通文이다. 迎日에 永陽李氏 李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현재는 세상을 떠난 지 30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후손들이 同名異人이었던 淸安李氏 樂義齋 李訥(1569~1599)의 倡義 행적을 자신들의 조상이 한 것처럼 계속 주장하고 또한 竹溪 李大任直齋 徐方慶 및 그의 從姪 徐克仁 등의 임란 당시의 의병활동도 역시 자신의 조상이 한 것처럼 속였다는 것이다. 실제 영양이씨 이눌은 명분이나 절의 등의 행적이 없었으며, 다만 一鄕에서 典古에 博學하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영일의 유림들은 換本易祖의 강상죄를 저지르고, 사림의 기강을 침체시킨 이 永陽李氏 후손들을 성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옥산서원이 영남의 首院이고 무릇 사림의 大論이 귀중하지 않는바가 아니니 절충하여 이에 사실을 알리고 옥산서원의 판단을 기다리니 빠른 시일 내에 올바른 판단을 내려달라고 당부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상 宣揚을 위한 문집 간행이나 서원·사우의 건립 등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원사 건립이전에 문집 간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영일에 거주하던 영양이씨 후손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현양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동명이인인 낙의재의 행적을 끌어오고, 더하여 다른 의병장들의 공적까지 자신들의 조상의 행적으로 바꾼 것이다. 환부역조하는 것이 비록 큰 문제이긴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서 영양이씨들이 이를 무시하고 일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들의 잘못에도 성토하자는 한마디 말도 안 나오고 있다는 통문의 말은 영양이씨들이 영일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렇기에 옥산서원의 권위를 이용하여 이 문제를 처리해주길 요청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이래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영남 내의 시비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 가운데 하나는 文字是非이다. 특히 문집 간행을 하면서 이전과 다른 내용을 보첨하거나, 개수하면서 해당 가문 사이에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 통문도 그러한 사례의 하나였으나, 여타의 사례와의 큰 차이점은 다른 이들의 행적을 자신들의 조상 행적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조선시대에서는 綱常罪로 엄히 처단하기에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일제강점기에서는 그러한 위험이 없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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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友文爲通諭事伏以尊祖而爽其實子孫之所可耻也誣賢而奪其功士林之所當討也有一於是固已見絶於吾黨况惟非其祖而祖之尊之於虛無之地而並致誣
辱於鄕賢則是將曰其家之肖孫而士類之可容乎鄙鄕有永陽李公諱訥而今去李公之世三百餘年曾無事行名節傳聞於後雖同在一鄕博於典古者莫之知焉
而爲李公子孫者卒生濫想以故天使將樂義齋淸安李公姓諱之與其先祖相蒙輒引樂義公龍蛇倡義事實證爲自家文案又以字若愚爲其先祖標
號不自知其換本易祖之耻是可忍也孰不可忍也又引竹溪李公諱大任徐公諱方慶徐公諱克仁敵愾安 聖之功盡謂自家先祖事蹟欺蔽遠近求言乞
文旣已刻之石又將入之榟無中做出欲以一手之小掩盡天下之公眼其亦愚之甚矣樂義竹溪諸賢之豊功偉烈載之竹帛錄諸勳券海天日月昭乎其明雖
黃口少兒莫不頌而敬之彼李氏人者雖欲逞其奸計奪爲已有誰將信之哉換祖而人紀斁敗誣賢而士綱淪喪則凡我圓冠方領者可無一言聲討之擧哉
竊伏念 貴院乃吾嶺首善之地而凡係吾林大論無不歸重而折衷故玆敢仰陳事實恭竢 指敎之如何伏願早發鄭重之論以正倫常以正士紀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丁巳三月二十二日迎日鄕校直員鄭元儉
會員前主事鄭宅儉
前直員權致賢
幼學李相瀚
陳必壽
李斗榮
鄭鳳一
金善默
孫秀奎
金斗明
金禹泳
金台泳
金善德
金鐸重
柳瀁元
黃鎭燮
張泰欽
敎官權丙洛
前直員李鉉植
幼學陳秀學
陳炳岐
李泓久
李鎬久
琴七奎
琴廷七
鄭時儉
鄭奎一
金鎭八
李圭晟
李龍夏
權泰鎬
權周鎬
李錫柱
陳炳敦
李鍾炫
徐煥文
徐煥中
皇甫律
朴永秀
徐規錫
柳瀁琳
吳宗煥
李能式
李圭楨
李宗久
鄭南載
張泰億
陳達壽
權丙基
李錫皥
李錫文
金在泳
金仁泳
金仁德
金正重
陳炳泓
陳準學
金益華
金相重
金陽重
吳衡範
吳宗華
皇甫壬
李在律
李鍾魯
吳宗奎
李圭信
金榮珍
金棟宇
李澤根
成晉基
權道運
金永宇
李秉喜
金永鑄
吳衡東
吳宗植
鄭基重
金益煥
金海泳
柳瀁睦
黃鎭雲
張斗彬
白樂準
蔡鎭湖
蔡健壽
李中洛
皇甫庸
安秉浩
徐奉源
皇甫香
許軾
鄭來鳳
張斗錫
鄭致浩
柳時東
陳尙武
金周泳
金澤泳
陳炳彦
李錫佑
吳鎭榮
李秉華
蔣球奉
吳宗麟
金永先
金漢重
許輹
徐應祥
金愚植
吳鎭武
兪致憲
陳相福
李相春
李錫久
鄭賢重
金鎭龍
沈能鑠
李元斗
安晙源
許轍
吳鎭賢
琴東采
金斗秉
金昌德
鄭台儉
鄭來儀
金棒淳
崔基卨
金斗珣
金永世
朴秀銓
金鶴商
皇甫禧
李能杓
金永浩
李能翰
李能洪
皇甫竽
金載曄
琴絃洙
金鍾商
吳廉澤
李能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