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7월 13일 영덕 南江書院에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손씨측의 잘못에 대하여 벌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을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
1906년 7월 13일 영덕 南江書院에서 孫李是非와 관련하여 손씨측이 지난 잘못에도 불구하고 衆論으로 불가하다고 했던 道脉淵源이라는 글자를 계속 사용하는 것에 東江書院에서 齊會하여 孫氏들을 벌주고, 옛날에 바르게 고친 상량문의 글로 정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을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이다.
통문에서 말한 이전의 손씨들에 대한 사림들의 책망과 그들이 주장하는 道脉淵源이란 글의 연원과 이후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손이시비의 시초는 1773년(영조 49)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의 廟宇를 重建할 때 大山 李象靖이 작성한 廟宇重建上樑文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에 중간된 『경절공실기』에 따르면 이 상량문 속에 회재가 우재의 도맥을 的授했다는 말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회재의 후손인 여주이씨들은 강력히 항의했고, 그로 인해 이 상량문은 당일로 勘定되어 本家로 돌려보내지면서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손씨들이 1845년(헌종 11) 『愚齋實記』를 증보하여 간행하면서 문제의 상량문을 다시 실으려 하자 이번에도 또한 이씨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나섰다. 이씨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鄕內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들을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三溪‧東洛‧洛峰‧南江書院 등에서 이씨들을 지지하는 통문을 보내왔으며, 虎溪書院에서는 양자를 중재하는 통문을 보내왔다. 이때의 사태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본 통문을 보면 이씨들의 항의와 도내 유림의 여론에 굴복해 손씨들이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 통문이 발행되기 2년 전인 1904년에 이씨의 宗家인 無忝堂에 所藏되어 있던 『驪江世稿』에서 회재가 우재에 대해 쓴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어 이를 계기로 손씨들이 『景節公實記』를 중간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손씨들은 새롭게 발견된 그 장문과 만사를 실기에 싣는 것은 물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그 상량문의 ‘淵源道脈’이라는 구절에 附註하고, 이를 근거로 孫海翼, 孫最秀 등이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詩와 跋을 진성이씨인 이만도, 이만규, 이병호로부터 얻어 싣고 1904년 4월에 배포하였다.
손씨들이 이 실기에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을 받아 실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손씨들이 의도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씨들은 즉각 인근 鄕內 14개 門中에 回文하여 옥산서원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씨들은 이 문제가 학문적 연원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단순히 문중 차원의 문제가 아닌 사림 사회의 道脈과 관계된다는 점을 통문을 통해 향내와 도내 사림에 알렸다. 그 결과 이 두 문중 사이의 시비는 초기부터 곧바로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양측 간에 통문을 통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상량문을 쓴 이상정을 배향하는 高山書堂에서도 ‘연원도맥’이라는 구절이 잘못된 것으로 손씨들의 처사를 비판하는 통문을 보내오는 등 대부분의 여론은 이씨들에게로 기울어졌다. 본 통문에서도 이미 파쇄된 『경절공실기』을 간행하고자 한다고 한 것을 보면 여론의 향배는 이씨 측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비가 마무리되어갈 쯤에 진성이씨 세 사람에게서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후학’이라고 한 것은 이씨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설이 나왔다. 이러한 설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론에서 수세에 몰린 손씨들은 이를 근거로 이씨들을 압박하려 하였다.
손씨들은 이러한 설을 패지에 담아 각 院祠와 門中에 돌리면서 『회재집』을 파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론은 손씨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퇴계가 회재의 행장에서 그의 학문이나 도맥을 주고받은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아래에 자신을 ‘후학’이라고 쓴 것이 『회재집』과 『퇴계집』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씨 측에서는 이상정의 상량문은 잠시 썼다가 바로 지운 것인데, 손씨들이 이것을 고쳐서 실기의 중간에 넣은 것이며, 손씨들이 주장하는 家狀이 회재의 手本이라는 증거가 없는데도 諱를 쓴 것, 퇴계가 쓴 회재의 行狀에 ‘후학’ 두 자가 없었다며 선현을 모욕한 것, 正祖가 쓴 회재의 제문에도 회재의 師承이 없고 바로 閩洛에 소급한다고 했고, 퇴계가 쓴 狀文에도 회재가 학문의 가르침을 받은 곳이 없다고 한 것 등을 들어서 손씨들에게 역공을 펼쳤다.
그러면서 이씨들은 太學과 湖西儒生‧湖南儒會所 등 전국적으로 통문을 보내 손씨들을 강력하게 성토하였다. 그 결과 1906년 윤 4월 태학에서는 회재에 대한 평가는 이미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과 正祖가 쓴 祭文에 師承이 없다는 명백한 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杜撰했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내왔다. 그러자 이씨들은 이 통문을 즉시 도내 전역에 돌리는 한편, 손씨들의 실기는 파판하고 문제를 일으킨 이만도 등의 3인을 성토하고 그들이 쓴 시와 발문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당초 손씨들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조차 이씨들의 편으로 전향해왔다. 본 통문은 이러한 이씨들의 적극적인 공세에 대한 답변으로서 보내온 것이었다.
[자료적 가치]
영남 내의 시비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 학문적 淵源과 位次의 문제로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그리고 바로 慶州의 ‘孫李是非’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門中 간의 문제가 아니라 他地域의 문중들에까지 확대됨으로써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크게 번져갔다. 이 통문은 바로 이러한 시비에서 제삼자들의 여론이 어디로 기울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