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 10년(1844) 함창에서 작성된 경로소절목(敬老所節目)
자료의 내용
본 자료는 헌종 10년(1844) 12월 15일 작성된 함창항교 소장 경로소절목(敬老所節目)이다.
자료의 내용은 경로소 복원 연유를 밝히는 기사(記事)와 5개 항목의 절목・참가회원・수합기(收合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창에는 사마소(司馬所)・강학소(講學所)・입접소(入接所) 등은 있음에도 경로소가 없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여 설치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규정은 오래되고 향풍이 점점 무너지는 추세에 있었다. 그래서 헌종 10년(1844) 가을 향교 향례에서 경로소 복원 문제를 추진하기로 결의가 된다. 채서락(蔡瑞洛)과 류현규(柳鉉珪)를 유사로 정한 뒤 각 기관에 부조액을 배당하고 통문을 발송했는데 배당 내역은 향교 벼 5섬, 강학소 전(錢) 1냥, 각 서원과 서당 각 1냥, 사마소와 사현재(司峴齋)는 각 1냥씩 수합하기로 결정하였다.
경로소의 절목의 내용을 열거하면,
一. 재물을 모으는 각 곳은 지금 경로소를 개설하는 것은 실로 노인을 위하는 성대한 일이니 각자 단속해야겠다. 언어나 행동이 모나서 남과 서로 맞지 않는 경우를 없애서 영원히 잘 행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一. 경로소 참좌(參座)는 일찍이 향교의 원임(原任) 지낸 60세로서 그 일정한 기한으로 할 일.
一. 본소의 유사는 일찍이 향교의 장을 지낸 사람 중 조사원(曹司員)을 일체 세 사람을 올려서 한 사람으로 뽑는 망정(望定)과 같이 하여 근면성실하고 두려운 생각을 가져서 재물을 잘 관리하도록 할일
一. 재물을 창설하는데 지극히 조잔(凋殘)하니 해당 임원은 세찬(歲饌)을 생략하여 융통하여 그 해를 기다리되 풍족하게 되면 다만 봄에 화창하고 광명한 시절과 가을의 서늘하고 좋은 절기에 서로 지팡이를 짚고 단란하게 모여서 한자리에서 담화하여서 노경(老境)의 한 때의 즐거운 시간으로 만들 일
一. 경로소에 참좌한 사람의 자질(子姪) 가운데 임금의 은혜를 입어 등과(登科)한 사람은 마땅히 형편에 따라 더하여 보충 한일.
비교적 간단한 절목의 내용에는 경로소 참여자 연령은 60세 이상으로 하며, 유사는 향교의 장(長) 출신이어야 가능하다. 임원은 봄과 가을에 즐거운 시간을 계획해야 하고, 회원 자제 중 과거급제한 사람은 돈을 더 내도록 규정하고 있다. 당시 참석한 회원은 모두 16명으로 이씨 5명・권씨 3명・류씨 2명・신씨 2명・채씨 2명・곽씨 1명・남씨 1명이다.
부조 내역은 향교 5석・강학소 10냥・임호서원(臨湖書院) 1냥・기양서원(岐陽書院) 1냥・청암서원(淸巖書院) 1냥・기산사(箕山祠) 1냥・사현재(沙峴齋)・사마소(司馬所) 1냥・주암서당(周巖書堂) 1냥・신안서당(新安書堂) 1냥・무이서당(武夷書堂) 1냥 합계 19냥을 수합했다. 강학사의 경우 배당 한 것 보다 더 수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두 차례 추입(追入)이 이루어지는데 먼저 헌종 12년(1846) 6월 7일 황씨문중(黃氏門中) 2냥・곽씨문중(郭氏門中)에서 1냥씩 부조한다. 이때 유사는 신광운(申匡運)과 신경기(申景璣)가 담당했다.
그 다음해 헌종 13년(1847) 6월 18일에도 박씨문중(朴氏門中)에서 2냥을 부조하는데 유사는 신광운과 신경운(申景運)으로 이들은 조선후기 함창지역에서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평산신씨 가문의 일원이다.
이외 경로소와 관련하여 언급된 자료가 없어 그 구체적인 활동 형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친목활동으로 결성 된 것이지만 향촌 사회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졌던 경로소가 조선후기 함창지역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도움이 된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尙州市史』, 상주시, 2010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