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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하양현(河陽縣) 하양향교(河陽鄕校) 『하양환성사결송 예조문서등록(河陽環城寺決訟 禮曹文書謄錄)』 수록 1762년 4월 영천유생의송(永川儒生議送)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B.1762.4729-20160630.Y161080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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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영천군 유생 박수성 등, 경상감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작성시기 1762
형태사항 크기: 55 X 31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산 하양향교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하양현(河陽縣) 하양향교(河陽鄕校) 『하양환성사결송 예조문서등록(河陽環城寺決訟 禮曹文書謄錄)』 수록 1762년 4월 영천유생의송(永川儒生議送)
1762년 4월 초3일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永川郡)의 유생(儒生) 박수성(朴守誠) 등이 경상감영(慶尙監營)에 올린 의송(議送)이다. 당시 경상도 하양현(河陽縣)하양향교(河陽鄕校)영천군임고서원(臨皐書院)하양현에 소재한 환성사(環城寺)를 두고 오랫동안 송사(訟事)를 벌여왔었다. 환성사를 서로 자신들의 속사(屬寺)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속사는 향교·서원·관아(官衙) 등지에 인적 또는 물적 자원을 제공해 주는 사찰을 뜻한다. 환성사하양향교임고서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기에, 환성사의 연고를 둘러싸고 하양향교임고서원 간의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본 문서는 『하양환성사결송 예조문서등록(河陽環城寺決訟 禮曹文書謄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자료는 분쟁 과정에서 발·수급된 각종 공문서를 하양향교 측이 엮어 놓은 것이다. 한편 자료 표제에 ‘임오 4월 일(壬午 四月 日)’이라는 표기가 있어 1822년경에 『하양환성사결송 예조문서등록』이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본 의송은 영천군 유생이 작성한 것이지만, 환성사와 관련된 것이기에 『하양환성사결송 예조문서등록』에 등서(謄書)되어 있다. 해당 의송에서 영천군 유생들은 경상감영으로 이속(移屬)된 환성사임고서원으로 돌려 줄 것을 청원해 놓았다. 이전까지 임고서원1555년 조정으로부터 환성사를 내사(內賜)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양현의 유생들이 반발하여 소송이 일어났고, 이후 환성사하양향교·임고서원·하양현 관아·경상감영으로의 이속·환속이 거듭되던 상태였다. 이에 영천군 유생들이 본 의송을 올려 임고서원으로 환속시켜 줄 것을 청원한 것이다. 그러나 의송 다음에 등서되어 있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의 제사(題辭)에는 대단하지도 않은 사찰 하나 때문에 유생들의 독서와 수행에 누가 되고 있다며 판결을 유보해 놓았다. 이는 영천군 유생의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朝鮮後期 書院硏究』, 李樹煥, 一潮閣,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62년 4월 慶尙道 永川郡의 儒生들이 河陽縣으로 移屬된 環城寺를 재차 臨皐書院으로 돌려 줄 것을 慶尙道觀察使에게 청원한 議送
壬午四月日 河陽環城寺決訟 禮曹文書謄錄
자료의 내용
1762년 4월 초3일 慶尙道 永川郡의 儒生 朴守誠 등이 慶尙監營에 올린 議送으로 경상도 河陽縣 소재 河陽鄕校에서 엮은 『河陽環城寺決訟 禮曹文書謄錄』에 수록되어 있다. 해당 자료의 목록에 기재된 본 의송의 제목은 ‘永川儒生議送’이다. 18세기 동안 하양향교영천군臨皐書院하양현 소재 環城寺를 두고 서로 분쟁하였는데, 『河陽環城寺決訟 禮曹文書謄錄』은 분쟁 과정에서 발·수급된 각종 공문서를 하양향교 측이 엮어 놓은 것이다. 본 의송은 영천군 유생이 발급한 것이지만, 환성사와 관련된 문서이기에 하양향교 측에서 謄書하여 수록해 놓았다. 자료 표제에 ‘壬午 四月 日’이란 명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1822년경 成冊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자료에는 의송의 본문과 慶尙道觀察使의 題辭가 함께 등서되어 있다. 먼저 의송에서는 경상감영으로 이속된 환성사의 환속을 청원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임고서원의 屬寺로는 하양현환성사를 비롯해 義興縣麟角寺가 있었지만, 지금은 인각사兵營으로, 환성사경상감영으로 具奪된 상황이라 하였다. 그래서 月前에 경상도관찰사께서 우리 고을에 이르렀을 때, 이러한 사정을 호소하였고 또한 환성사임고서원의 속사임을 나타내는 각종 文案을 올렸다고 한다. 덧붙여 환성사임고서원의 位田이 된 것은 聖恩에 의한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서원 유생들이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기에, 해당 文案을 상세히 살펴 봐 줄 것을 청원해 놓았다. 임고서원 측은 1555환성사를 內賜 받았지만, 18세기 무렵부터 하양향교 측과 환성사를 두고 지속적으로 분쟁하고 있었으며, 상부 기관의 판결에 따라 하양현 관아 또는 경상감영으로의 이속이 거듭되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임고서원은 판결에 불복하고 수시로 환성사를 점유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청원을 통해 환속을 주장했던 것이다.
영천군 유생의 청원에 대해, 경상도관찰사는 환속을 거부하고 있다. 의송 다음에 기재되어 있는 제사에서 경상도관찰사는 전후 작성된 文案을 상세히 살펴보니 판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는 공감하나, 令이 내려진 후에도 다시 거론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사찰 하나는 원래 대단한 것도 아니니, 外物 때문에 유생들이 독서하고 수행하는데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사실상 판결을 유보하며, 영천군 유생의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屬寺의 존재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속사는 향교·서원·官衙·鄕廳 등에 소속되어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해주는 사찰을 뜻한다. 조선시대 동안 속사는 해당 기관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으로 존재하였기에, 이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속사였던 환성사임고서원·하양향교·하양현 관아·경상감영으로의 이속·환속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朝鮮後期 書院硏究』, 李樹煥, 一潮閣,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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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壬午四月初三日永川儒生朴守誠等議送膽
云云巡相國閤下伏以等以本院內賜位田河陽環城寺義興麟角寺具奪
源委陳喩於月前棠車到郡之日麟角寺則呈于兵營環城寺還則
營後當據問處之事題下此正等痛雪積年抱恨之秋也玆將前後文
案敢此來喩伏願閤下特無神明之鑒一一洞燭後體列聖恩賜之
盛意察章甫干讀之至願使此覆盆之寃更回審明干宵之怨以至得伸
則不但弊院之大幸閤下其亦永有辭於來後矣等不勝祈懇屛營
之至謹冒昧以陳題曰取考環城寺所立前後文案詳細考閱則
數十年之間屢誣決折且有朝今到令更提極爲不當一寺有無元
不大段只願諸生讀書修行勿復以外物自累可以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