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기미년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 소납전답(所納田畓)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B.0000.4725-20160630.Y1650210129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형태사항 크기: 36 X 33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기미년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 소납전답(所納田畓)
기미년 10월 3일에 전씨가 작성한 백옥동서원에 전답을 바친 내역이다. 이를 보면 내북면 소선원의 畓 7두락과 검동제 아래의 畓 5두락, 필리제 아래 畓 4두락 등 모두 16두락를 옥동서원에 납입하는 전답이었다. 옥동서원은 백옥동영당에서 서원으로 승격하여 백옥동서원으로 불렸으며, 정조대에 사액되어 옥동서원이 되었다. 1714년(숙종 40) 승원 할 당시 사서 전식을 배향하였는데 본 문서의 작성자가 전씨라는 점에서 전식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또한 전식이 배향된 옥동서원이기에 전씨가 16두락의 전답을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을 근거로 보면 1714년부터 사액이 되는 1789년(정조 13) 사이에 본 문서가 작성된 것이다. 그렇기에 己未年은 1739년(영조 15)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경제적 기반은 토지와 노비로 대표된다. 특히 초창기 경제적 기반형성에는 후손, 지방관, 문인 등의 기부와 지원이 대표적이었는데 일반적으로 후손들의 기부가 많았다. 이를 토대로 서원에서는 매매와 자연 증식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고 서원을 운영하였던 것이다. 본 문기 역시 옥동서원에 제향된 전식의 후손이 전답을 기증하여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실제를 보여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己未年 10월 3일에 全某가 작성한 白玉洞書院 所納 田畓 내역
己未年 10월 3일에 全某가 작성한 白玉洞書院 所納 田畓 내역이다. 이를 보면 내북면 소선원에 畓 7두락지와 검동제 아래의 畓 5두락지, 필리제 아래 畓 4두락지 등 모두 16두락지를 옥동서원에 납입하였다. 기미년이 언제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1789년(정조 13) 사액되기 전까지 백옥동서원으로 불렸음을 事蹟과 현존하는 옥동서원 田畓案 등에서 확인된다. 옥동서원의 내역을 간단히 살펴보면, 1580년(선조 13)는 黃喜의 영정을 봉안하는 白玉洞影堂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그것을 황희의 후손인 槃澗 黃紐(1578~1626)가 중건하였으며, 1714년(숙종 4)에 사림들의 중론에 의해 서원으로 陞院했다. 이때 황희 선생을 元位로 하고 沙西 全湜(1563~1642)을 배향하였다. 이듬해 1715년(숙종 41)에는 신덕리에 위치해 있던 황희의 영당수봉리에 위치한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1786년(정조 10)에 畜翁 黃孝獻(1491~1532)과 반간 황뉴를 추배하여 4位를 배향되었고, 1789년(정조 13)에는 영남 사림들이 賜額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承旨 朴天衡을 보내어 致祭하고 비로소 옥동서원이라 사액하였다. 이처럼 옥동서원은 백옥동영당에서 승원하여 백옥동서원으로 불렸으며, 정조대에 사액되어 옥동서원이 되었다. 또한 1714년 승원할 당시 사서 전식을 배향하였는데 본 문서의 작성자가 全氏라는 점에서 전식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또한 전식이 배향된 옥동서원이기에 전씨가 16두락지의 전답을 所納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을 근거로 보면 1714년부터 1789년 사이에 본 문서가 작성된 것이다. 그렇기에 己未年은 1739년(영조 15)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경제적 기반은 토지와 노비로 대표된다. 특히 초창기 경제적 기반형성에는 후손, 지방관, 문인 등의 기부와 지원이 대표적이었는데 일반적으로 후손들의 기부가 많았다. 이를 토대로 서원에서는 매매와 자연 증식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고 서원을 운영하였던 것이다. 본 문기 역시 옥동서원에 제향된 전식의 후손이 전답을 기증하여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실제를 보여준다.
자료적 가치
옥동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다. 서원의 경제적 기반은 토지와 노비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도망의 가능성이 높은 노비보다는 고정적인 토지를 선호하였는데, 관리의 편의상 서원 주변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하지만 기증받은 토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관리가 어려울 경우에는 매도하여, 서원 부근의 토지를 매매하기도 했다. 이 자료는 특히 제향인의 후손들에 의해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白玉洞書院所納田畓
內北小先員畓七斗落只自院▣▣
撿洞堤下畓五斗落只 備落
別北畢里堤下畓四斗落只
乙未十月三日 全[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