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卯(1891)년 6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소장 《鄕約儀式》
자료의 내용
辛卯(1891)년 6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소장 《鄕約儀式》으로 壬寅(1902)년 10월 1일에 〈鄕約所呈觀察使稟目〉이 추가로 기록되어 있다. 본 자료가 작성될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은 鄕吏約束을 엮어 경상도 각 고을에 배포하며 향약 시행을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비안현에서도 향약을 새롭게 제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鄕吏約束〉을 시작으로 〈退溪先生鄕立約條〉, 〈儀註〉, 관찰사의 〈鄕吏約束 序〉, 〈稟目〉, 〈月澗先生月朝集會讀約之圖〉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향약은 시행주체·규모·지역 등에 따라 鄕規·一鄕約束·鄕立約條·鄕憲·面約·洞約·洞契·洞規·村約·村契·里約·里社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시행 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趙光祖 등의 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李滉, 李珥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을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17세기 후반 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 주도 하에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18세기 중엽 이후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제가 수령에 의한 향약의 하부구조로 포함되면서 그 성격이 변모되어갔고, 사족이 주도하는 동약에서의 운영권은 기층민간의 생활공동체로서의 村契類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고 점차 기층민의 입장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 후반 西學·東學 등 주자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위정척사운동에 활용되었고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측에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본 문서의 서두 〈鄕里約束〉은 4개 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을 차례대로 수록하였다. 이는 향약의 4대강령을 기본으로 하되 어느 정도 가감이 이루어진 규정으로, 朱子增損呂氏鄕約을 기저로 하고 있다. ‘덕업상권’에서는 德과 業에 해당하는 행동 규정을 설정해 놓았는데, 士農工賈가 각기 자신의 業에 충실하라는 규정이 주목된다. ‘과실상규’에서는 修身하지 않는 과실 여섯 가지, 가정을 다스리지 않는 과실 네 가지를 설정해 놓았다. ‘예속상교’에서는 나이에 따른 尊者, 長者, 敵者, 少者, 幼子의 의미를 설명하였으며, 이어 거리에서 구성원들 간 만났을 때 임하는 자세, 모임 때 나이에 따라 임하는 규정, 혼사와 상사가 있을 때 同約의 사람들이 해야 할 것들을 규정하였다. 마지막 ‘환난상휼’에서는 同約의 사람 중 水火, 盜賊, 疾病, 喪事, 孤弱, 誣枉, 貧乏의 일곱 가지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구성원들이 해야할 것들을 규정한 것이다.
〈退溪先生鄕立約條〉는 말 그대로 퇴계선생이 만든 鄕立約條를 기록하고 있다. 鄕里의 자치적 사회규범이자 주로 사회윤리에 의한 庶民敎化에 목적을 둔 것으로 덕치주의의 기초적 실천을 열거하고 있다. 향입약조는 성리학을 단순한 개인의 내면성에 관계한 ‘爲己之學’에 그치지 않고 널리 사회규범의 기초로서 토착화되기 시작한 계기로서 주목된다. 퇴계선생은 이글에서 ‘사람을 얻으면 一鄕이 조용하고 사람을 못난다면 일향이 解體된다’라고 해서 향리의 결집과 해체가 마을 지도자의 도덕적 감화력에 달렸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강자를 믿고 약자를 능멸하며 침탈하여 싸움을 일으킨 자’, ‘愚難을 보고 힘이 미치는데도 앉아서 보고 돕지 않는자’ 즉, 사회적 부조리의 요인에 대한 비판과 사회악과 대결하기 위해 향리가 연대적 단결로 도덕적 견제력 구실을 할 것을 권하고 있으며, 서로 협동하고 가난한 자나 곤궁한 자를 相恤할 것을 권한 점은 향리자치적인 사회보장제의 성격을 제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향촌사회에서의 불법적, 비도덕적 행위들에 대해 일일이 열거한 뒤에 처벌의 수위 등을 언급하고 있다.
〈儀註〉는 各面에서 약회가 이루어질 때의 절차를 규정해 놓은 것이다. 먼저 직월이 先聖과 先師의 위패, 香爐와 香盒을 약회의 장소에 설치하고 점검한다. 이어 약장과 직월, 異爵者, 나이에 따른 약원들, 향교와 서원의 교생과 원생, 武列人 등이 각기 약회가 열리는 장소에 자리하고 서로 拜禮하는 절차기 길게 나열되어 있다. 자리를 잡은 후에는 직월이 소리 내어 약조를 읽고 그 뜻을 설명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善惡의 행적을 각기 기록하며, 進饌, 撤饌하는 절차로 이어진다. 의논할 일이 있으면 撤饌 이후에 행하며, 들어 올 때처럼 拜禮를 한 다음 약회를 파한다고 하였다.
〈鄕里約束序〉는 1891년 6월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헌영가 작성한 것으로 각 고을에 향약을 실시를 권장하는 명분과 목적을 언급하였다. 서문에서 가장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지방관의 역할이다. 옛날에는 백성들에 대한 교화가 이루어졌는데, 지금 점점 풍속이 퇴락해가는 것은 方伯과 守宰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仁과 禮로 백성을 다스려야지 옛날 백성들처럼 교화가 되어, 孔子가 말한 "齊變至魯 魯變至道(齊나라가 변해 魯나라가 되고, 魯나라가 변해 道에 이른다)"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옛적 「周官」에 三物과 八刑의 제도가 있었다고 하며, 宋나라 때에는 藍田에서 呂氏兄弟가 향약의 條例를 만들었고, 朱子가 이를 다시 增損해서 풍속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풍속을 순박하게 바꾸기 위해 향약을 여러 번 頒示하고 여러 先儒가 향약을 시행하였다며, 지방관의 역할과 향약 시행의 유래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현실은 수령이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힘쓸 처지가 되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수령의 일에 있어 編戶하는 訟牒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고, 청탁과 관련된 書牘들이 쌓여 있는 것이 실정이었다. 往往 鄒魯의 고장이라고 경상도를 스스로 칭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라 하였다. 이에 평소 州郡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一邑에 옛적의 法, 즉 향약을 시행해 보았으니, 이제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향약의 조례를 增削하여 1책으로 간행해 各邑에 下送하였고, 각읍은 이것을 일일이 翻謄해서 各面에 배포케 했다고 한다. 그리고 各面 鄕約所에서는 이를 각 집마다 서로 권장케 하고, 鄕約長과 直月은 반드시 一鄕의 어진 인사로 선택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반드시 春秋로 善惡을 고증해 풍속이 교화되고 아름다워 지기를 당부하며 서문을 마치고 있다.
〈稟目〉은 1902년에 작성된 것으로 비안현의 鄕中士類들이 경상도관찰사에게 올린 향약시행관련 사항을 담고 있다. 約正 3인을 비롯하여 副正 6인, 直月 6인, 約中 45인의 명단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문서의 말미에는 〈月澗先生月朝集會讀約之圖〉가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중기 이후 향약을 매개로 재지사족들은 관권을 견제하고,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을 단위의 향약은 17세기 이후 사회, 경제적 변화와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가 붕괴되어 감에 따라 파행되거나 중단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19세기 이후에는 오히려 지방관에 의해 적극적으로 향약이 제정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1891년 비안현에서 작성되었던 본 자료는 당시 지방관 주도로 제정되었던 향약의 성격을 살펴 볼 수 있다.
「退溪先生 「鄕約」 譯註」 『퇴계학보 3』, 李章佑, 퇴계학연구원, 1974.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