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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경상북도(慶尙北道) 군위군(軍威郡) 김재덕(金在德) 석전진설도급사직성황제홀기수선후지(釋奠陳設圖及社稷城隍祭笏記修繕後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I.1899.4772-20150630.Y15111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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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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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시문류-기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작성주체 김재덕
작성지역 경상북도 군위군
작성시기 1899
형태사항 크기: 33 X 13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군위 군위향교 /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899년 경상북도(慶尙北道) 군위군(軍威郡) 김재덕(金在德) 석전진설도급사직성황제홀기수선후지(釋奠陳設圖及社稷城隍祭笏記修繕後識)
1899경상북도(慶尙北道) 군위군(軍威郡)의 유학자 김재덕(金在德)이 쓴 지(識)다. 해당 지는 군위향교(軍威鄕校)의 석전례(釋奠禮) 진설도(陳設圖)와 사직제(社稷祭)와 성황제(城隍祭)의 홀기(笏記)를 새롭게 수선(修繕)한 뒤 그 경위를 밝혀 놓았다. 조선시대 향교는 석전례인 춘추향사(春秋享祀)뿐만 아니라, 고을에서 행해지는 사직제와 성황제 같은 각종 의례를 주도하며, 향촌 교화를 담당하였었다. 군위향교에서도 향교에서 활동하던 지역 유림들이 석전례를 비롯해 각종 의례를 담당하였는데, 석전례 때 제기와 제물을 올리는 양식인 진설도와 사직제와 성황제의 순서를 기록한 홀기가 낡고 훼손되어, 지역 출신의 유림인 홍용섭(洪龍燮)김두현(金斗鉉)이 진설도와 홀기를 수선하였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99慶尙北道 軍威郡의 유림들이 軍威鄕校의 釋奠禮 陳設圖와 각종 의례의 笏記를 修繕하자 이를 기리기 위해 군위군의 유학자 金在德이 작성한 識
자료의 내용
1899慶尙北道 軍威郡의 유학자 金在德이 작성한 識다. ‘釋奠陳設圖及社稷城隍祭笏記修繕後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본문에서는 軍威鄕校에서 행해지는 釋奠禮의 陳設圖와 社稷祭·城隍祭의 笏記를 修繕하는 경위를 밝히고 의의를 기려 놓았다.
이에 따르면 지난 1898김재덕 본인이 군위향교의 首任, 즉 都有司가 되어 秋享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진설도는 오래되어 갈라지고 좀이 먹어서 그림 판독이 어려웠으며, 사직제와 성황제의 홀기는 터지고 헤져 모호한 곳이 많아 興과 拜를 구분하기조차 힘든 상태라고 하였다. 진설도와 홀기의 상태가 좋지 않아 법식대로 儀節을 행할 수 없으니, 책임이 막중하고 황송함을 한탄하고 있다. 지난 500년 동안 전국 360여 고을에 이런 의절이 끊이지 않았기에, 지금의 상황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유림들이 수선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으로 모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향교 수임의 임기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副任이 된 洪龍燮이 자신에게 오는 1899년의 春享 때는 진설도와 홀기를 바로 잡아 행하기를 간청하면서, 김재덕의 아들인 金斗鉉이 마침 成均館博士를 지냈으니, 이번 일을 주도케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에 김두현이 진설도와 홀기를 바로 잡아 김재덕에게 알리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과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고, 識의 작성 경위를 밝혀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의 향촌활동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는 석전례를 비롯해 고을의 성황제와 사직제 등 각종 의례를 관의 협조 하에 주관하였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향교는 조선시대 향촌 교화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비록 본 자료의 내용은 향교의 권위가 크게 약화되는 개화기의 사례이지만, 지역 유림들이 향교에서 향촌 교화 사업을 주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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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釋奠陳設圖及社稷城隍祭笏記修繕後識
戊戌余?校宮首任辭不獲奉行秋享見陳設圖歲久?蝕有欠
於?豆有楚繼見社稷城隍笏記綻裂?糊無以興拜如式實違克敬
克愼之意不覺懼憫而惶汗也噫禮莫重於享祀而毫忽失之則不
顧不歆故有圖有笏寔我
朝五百年環東土三百六十餘州遵奉勿替之儀節也以今乃
漫德如此豈非吾儒之?而齋任之責也謀所以謄繕厘訛矣余
以圖遞決日事尋單無暇於還遞未得而官適投?時洪友
龍燮文見
帶副任?于余曰秋享時見陳設圖及社稷城隍笏記
俱不可稽式今春享不遠蓋爲之修改乎余曰實獲吾心文見
曰胤友博士旣解書矣又況累居太學替於典祀蓋指還淸之
余不得挽止乃今長督前國子官斗鉉繕寫之數日而告訖斗鉉
請曰曾知泮館與諸生行相揖禮寔學宮番行之儀而吾鄕
無之子亦晩惜繼庸書其圖與笏白鹿洞規式自今遵行
則庶爲郡士之一助云余許之竝以爲記
聖上紀元三十六年雨水節海平金在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