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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향안(高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896.4783-20150630.Y15328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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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주체 고령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작성시기 1896
형태사항 크기: 47 X 29.5
수량: 19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고령 고령향교 / 경상북도 고령군 연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고령 고령향교 / 경상북도 고령군 연조리

안내정보

고령향안(高靈鄕案)
『고령향안(高靈鄕案)』은 조선시대 慶尙道 高靈縣에서 작성된 향안(鄕案)이다. 고령향교에는 이와 같은 향안 2책이 전해지고 있으며 본 자료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향안이란 조선시대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 구성원 즉, 향원(鄕員)의 명부로, 향안으로의 입록은 곧 지배세력임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양반사족(兩班士族)들은 배타적인 향안 작성을 통해 그들 중심의 신분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유향소를 중심으로 한 사족 주도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향안의 입록은 신분적 하자가 없는 양반사족에 한정되었으며 까다로운 입록절차를 거쳐야 했다. 『고령향안』 역시 위의 설명과 같은 고령지역 양반사족의 명부이다. 본 자료에는 1623년부터 1769년까지의 향원 명부가 기재되어 있으며, 51회에 걸쳐 총 523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작성날짜와 성명을 기록하였으며 성명의 상단에는 직역(職役)을 기재하고 있다. 『고령향안』을 통해 당시 고령지역의 향론(鄕論)을 주도하던 사족집단을 확인할 수 있으며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른 향안 입록 추이의 변화 또한 함께 확인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1차 작성자 : 유기선

상세정보

고령현(高靈縣)에서 작성된 1623년부터 1769년까지의 향원(鄕員) 명단
내용 및 특징
본 자료는 조선시대 慶尙道 高靈縣에서 작성된 『高靈鄕案』으로 현재 高靈鄕校에서 보관 중이다. 향안이란 留鄕所의 구성원인 鄕員의 이름을 기록한 일종의 명부이다. 향안의 작성은 조선시대 지방통치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의 지방통치는 國王-監司-守令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과 京在所-留鄕所(鄕廳)-面里任으로 이어지는 자치행정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향촌사회내의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였으며 이들의 명단을 鄕案이라 하였다. 그리고 향촌사회에 대한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鄕會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유향소를 출입하던 양반사족, 즉 향안입록자로 제한되어 있었다. 사족들은 향안으로의 입록을 통해 一鄕에서의 신분적 우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향촌운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향안은 곧 양반사족들의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따라서 이곳으로의 입록은 대단히 까다롭고 엄격하였으며 허물이 있는 경우 削籍 당하는 경우도 발생할 만큼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향안의 작성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16세기 중엽 이후에 본격화 되었다. 이 시기는 士林에 의한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확립되어 가던 때로 사족들은 유향소의 참여와 운영을 통해 鄕權을 주도하였다. 정확한 시점을 확언할 수는 없으나 고령 또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향안의 작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고령의 유력사족이자 대표적인 義兵將인 金沔이 壬辰倭亂 발생시 鄕廳에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이 그의 文集인 『松庵年譜』에 확인되며, 이후 김면의 진영에 합류한 李得春이 高靈의 鄕案을 작성하였다는 『嶠南誌』의 기록 등이 확인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령지역에서는 늦어도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 최초의 향안작성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령향교에는 이러한 향안이 현재 2책이 전해지고 있으며 본 자료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본 자료는 1623년부터 1769년까지의 座目으로 총 51회에 걸친 입록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향원의 입록일을 기재한 후 성명을 차례대로 기재하였으며 성명의 상단에는 職役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다만 이 자료는 향원이 입록되었던 그 당시에 작성된 것은 아니다. 본 자료의 작성일은 崇禎五丙申 五月, 즉 1896년 5월에 작성된 것으로 종래의 향안을 새로이 淨書하여 合補한 것이다. 책의 서두에 生員 李澤龍 除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1623년의 좌목이 시작되고 있다. 이는 앞선 鄕案에 이어서 작성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 이택용은 본 자료보다 앞서 작성된 1620년 향안의 입록자이다. 즉 본 자료가 앞의 향안에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고령향안』의 구체적인 입록현황을 크게 2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1623년부터 1665년까지의 입록현황은 다음과 같다.
1623년은 6월 16일과 26일 2회에 걸쳐 작성되었다. 총 31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李氏 11명, 朴·金氏 각 5명, 全氏 3명, 崔·鄭氏 각 2명, 成·權·郭氏 각 1명이다. 1624년은 총8명 입록으로, 李·權氏 각 2명, 朴·金·鄭·盧氏 각 1명이다. 1626년은 총7명 입록으로, 李·金氏 각 2명, 朴·尹·崔氏 각 1명이다. 1627년은 총4명 입록으로, 洪·李·全·金 각 1명이다. 1630년은 權氏 1명이 입록되었다. 1631년은 총6명 입록으로, 李氏 3명, 金氏 2명, 鄭氏 1명이다. 1632년은 총6명 입록으로, 李氏 2명, 朴·全·金·權氏 각 1명이다. 1633년은 朴氏 1명이 입록되었다. 1635년은 李·成氏 각 1명이 입록되었다. 1638년은 총7명 입록으로 李氏 3명, 金氏 2명, 洪·崔氏 각 1명이다. 1640년은 3월과 11월 2회 작성되었으며 총5명 입록으로, 李·全·崔·鄭·吳氏 각 1명이다. 1641년은 崔氏 1명이 입록되었다. 1643년은 총5명 입록으로 李氏 1명, 金·崔·郭氏 각 1명이다. 1646년은 총9명 입록으로 李·朴·金·崔氏 각 2명, 裵氏 1명이다. 1647년은 朴·郭氏 각 1명 입록되었다. 1649년은 총3명으로 金氏 2명, 郭氏 1명이 입록되었으며 1650년은 李氏 1명이 입록되었다. 1653년은 총4명으로 李氏 2명, 朴·郭氏 각 1명이다. 1654년은 李氏 1명, 1655년은 郭氏 1명이 입록되었다. 1657년은 총8명 입록으로 朴·崔·吳氏 각 2명, 李·郭氏 각 1명이다. 1658년은 총4명 입록으로 李氏 2명, 朴·金氏 각 1명이다. 1659년은 총3명 입록으로 李氏 2명, 朴氏 1명이며, 1660년은 金氏 1명, 1662년은 총 2명, 全·金氏 각 1명이 입록되었다. 1663년은 총3명 입록으로 崔氏 2명, 朴氏 1명이며 1665년은 金氏 1명이 입록되었다.
이 시기 향안의 입록주기는 1년에서 3년으로 다양하지만 대체로 1년을 주기로 작성되고 있다. 입록인의 수는 10명 내외의 소수의 인원이 입록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수치는 1669년 이후의 입록인에 비해 적은 수치이다. 이는 곧 당시의 향안 입록이 엄격한 과정을 거쳐 소수의 인원만이 입록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 또 하나의 특징은 職役의 변화이다. 본 자료에서의 최초 입록 시점인 1623년의 경우 僉知·部將·僉正·主簿·僉正·參奉·先達·同知 등의 관직 역임자가 상당수 확인되지만 이후 관직역임의 경우는 급속히 줄어들며 대신 幼學의 비중이 급증하고 있다. 관직 역임자의 감소와 유학의 증가현상은 앞으로 살펴볼 1669년 이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仁祖反正 후 영남지역 선비들의 仕宦이 극히 어려워졌던 당시의 시대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령지역은 南冥學派의 전통이 강했던 곳이였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1669년부터의 향안 입록현황을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1669년은 총11명이 입록되었으며, 성씨별로는 李氏 6명, 朴·全·金·崔·郭氏 각 1명이다. 1670년은 총10명 입록에 李·朴·孫·崔氏 각 2명, 金·都氏 각 1명이다. 1674년은 총6명 입록으로 朴氏 3명, 金氏 2명, 李氏 1명이다. 1675년은 총19명 입록으로, 李氏 6명, 金氏 4명, 崔氏 3명, 朴·全·韓·郭·吳·劉氏 각 1명이다. 1677년은 총8명 입록으로, 郭氏 2명, 李·朴·全·崔·鄭·吳氏 각 1명이다. 1682년은 총13명 입록으로 李氏 5명, 鄭氏 3명, 朴·金 각 2명, 裵氏 1명이다. 1694년 正月은 총19명 입록으로 李氏 6명, 金氏 4명, 朴氏 3명, 崔·鄭氏 각 2명, 郭·吳氏 각 1명이다. 이어 同年 5월에는 총34명이 입록되었으며, 朴氏 10명, 金氏 8명, 李·崔 각 5명, 鄭氏 2명, 全·裵·郭·吳氏 각 1명이다. 1703년은 총26명 입록으로 李·崔氏 각 8명, 朴氏 7명, 金氏 2명, 郭氏 1명이다. 1708년은 총41명 입록으로 李氏 13명, 朴氏 11명, 金氏 10명, 鄭氏 3명, 郭·吳氏 각 2명이다. 1737년 4월에는 총29년 입록으로 李氏 11명, 朴氏 8명, 金氏 6명, 全·崔·郭·吳氏 각 1명이다. 동년 6월에는 총10명으로 金氏 3명, 李·崔氏 각 2명, 朴·全·鄭氏 각 1명이다. 이어 9월에는 총9명 입록으로 金·鄭氏 3명, 朴氏 2명, 崔氏 1명이다. 1738년 정월에는 총14명 입록으로 李氏 5명, 全氏 3명, 朴氏 2명, 韓·裵·鄭·安氏 각 1명이다. 이어 2월에는 全氏 4명, 鄭氏 3명, 裵氏 2명, 李·朴·金·崔·韓氏 각 1명이다. 1739년 정월에는 총21명 입록으로 李氏 8명, 朴·金氏 각 5명, 吳氏 2명, 崔氏 1명이다. 이어 5월에는 총15명 입록으로 崔氏 5명, 郭氏 4명, 朴·金氏 각 2명, 全·權氏 각 1명이다. 1758년은 총51명 입록으로 金氏 15명, 朴氏 14명, 金氏 11명, 郭氏 6명, 崔·鄭氏 각 2명, 權氏 1명이다. 1768년 5월에는 총10명 입록으로 李·鄭氏 각 3명, 朴氏 2명, 全·崔氏 각 1명이다. 이어 7월에는 총8명 입록에 全氏 4명, 金·韓·裵·鄭氏 각 1명이다. 마지막으로 1769년에는 총25명이 입록되었으며 鄭氏 7명, 李·全氏 5명, 金·崔氏 각 3명, 朴氏 2명이 입록되었다.
1669년 이후 향안작성의 특징은 앞선 향안에 비해 입록의 주기가 불규칙적인 점이다. 1669년 이전의 경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체로 1~2년 주기로 작성되고 있다. 그러나 1669년 이후에는 1년에서 29년 등 매우 큰 폭의 차이가 있다. 입록인원의 경우 연평균 입록인원은 수치상 이전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작성주기가 길어짐에 따라 다수의 인사가 한꺼번에 입록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불규칙한 작성주기와 입록의 대규모화는 17세기 중반 이후 향안 권위의 약화에 따른 입록 규정 완화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주지하듯 1654년 座首에게 營將을 보좌하는 임무를 규정한 營將事目의 반포는 사족의 鄕任기피 현상을 초래하였다. 또한 중앙 권력의 閥閱化에 따른 지방 사족, 특히 영남 사족의 仕宦이 봉쇄되자 사족들은 향촌 내 지위 유지에 주력하였으며, 이 가운데 향안 입록을 둘러싼 사족간 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다. 또한 새롭게 성장한 新鄕세력의 향안 입록 시도에 따른 新舊세력간의 갈등 또한 심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향안의 권위 약화와 향안 입록의 파행을 초래하였으며 결국 18세기 상당수 고을은 향안 작성이 罷置되기에 이른다. 『고령향안』 역시 입록주기의 불규칙, 입록의 대규모화 등의 현상으로 미루어 보아 고령지역에서도 점차 사족의 공론에 의한 향안 작성이 점차 어려워졌으며 결국 1769년을 마지막으로 향안의 작성이 중단되었다.
이상의 입록현황에서와 같이 『고령향안』은 당시 향론을 주도하며 향안입록에 적극적이었던 고령사족의 모습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향안작성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나누어 살펴본 향안의 입록현황을 종합해 보면 총523명의 입록이 확인되며 이들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李氏 144명, 朴氏 98명, 金氏 93명, 崔氏 52명, 鄭氏 39명, 全氏 33명, 郭氏 26명, 吳氏 12명, 裵·權氏 각 7명, 韓氏 4명, 洪氏 2명, 尹·成·盧·都·劉·安氏 각 1명이다. 18개 성씨 가운데 특히 李·朴·金·崔·鄭·全·郭氏의 입록이 타성씨를 압도하고 있다. 이는 곧 이들 성씨가 고령의 사족사회를 주도한 성씨들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점차 향안의 작성 간격이 늘어나고 대규모의 입록이 이루어지는 등, 점차 체계적인 향안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18세기 후반 중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적 가치
『고령향안』은 17세기에서 18세기 고령지역의 향안 작성의 추이와 고령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를 통해 당시 고령 지역사회의 鄕論을 주도하던 사족집단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향안 작성의 추이를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1차 작성자 : 유기선

이미지

원문 텍스트

崇禎五丙申五月日合補
高靈鄕案
生員 李澤龍

天啓三年六月十六日鄕案
僉知 全永期
部將 成期壽
僉知 金濈
朴蕃
僉正 李東賓
幼學 李時馦
主簿 李淳
判事 朴輅
僉正 李遇馹
幼學 金戡
李敏道
全士立
參奉 金應鑑
幼學 李濬
朴希文
直長 鄭琳
幼學 李涵
朴翂衢
崔夢龍
郭鴻漸
李見龍
先達 李永淑
同知 金杉壽
幼學 崔夢龜
李文龍
金永達
癸亥六月二十六日
幼學 權希亮
李淑
全瓛
朴以樑
僉知 鄭瓚
甲子三月初七日
僉正 權璩
幼學 李時{香+函}
權大智
鄭璞
盧㯳
金益輝
李幼立 改名惟碩
朴宗衡 改名應衡
丙寅正月二十二日
幼學 尹慶璜
李澄
金英秀
金受徽
李廷益 改名廷熊
朴以梲
崔鳳儀

丁卯正月初三日
幼學 全世禧
洪禹績
李廷薰

庚午正月初四日
幼學 權舶

辛未正月初九日
幼學 李藏任
李廷茂
金復輝
金英發
鄭瑊
李廷苾

壬申正月初三日
李東俊
幼學 權{舟+星}
全(?)
朴就謙
金英老
李次顔

癸酉正月初三日
主簿 朴軾

乙亥十一月二十六日
幼學 李惟達
鄭景龍 改名景玄

戊寅十二月十七日
李廷凱
金璡
洪禹成
李惟進
李惟馨
崔鳳集
金柱天

庚辰三月初六日
鄭景興

庚辰十一月二十三日
全世祉
崔成㠎
吳益烇
李廷虎

辛巳十二月二十一日
崔鳳章

癸未二月十七日
李惟直
崔鳳輝
李惟實
郭壽岡
金柱國 改名柱旻

丙戌正月十七日
朴潤緖
裵基祐
金克純
崔鳳擧
朴載昌
崔鳳翔
李元英
金柱昊
李惟長

丁亥十一月十七日
正郞 郭弘址
幼學 朴載新

己丑正月十八日
生員 郭弘圭
幼學 金慶曼
金柱厦

庚寅正月初三日
李松來 改名翊明


甲午正月二十三日
李箕來 改名翊世

乙未二月初四日
癸巳正月十八日
朴就恒
李長英
郭壽{山+晋}
李震來 改名翊華
鄭景俠

丁酉正月初三日
崔成屹
郭好英
吳墰 改名善基
朴煦
吳垶 改名學基
崔衡望
李星來
朴點

戊戌正月初三日
李重衍
朴輶
李榮岳
金慶泰

己亥正月初三日
察訪 李蒤
幼學 朴瑞全
李華岳 改名燁

庚子正月初三日
金克重

壬寅正月初三日
幼學 全{玉+晃}
金彛

癸卯正月八日
幼學 朴{車+急}
崔泰望
崔恒望

癸卯七月二十二日
幼學 金疇一
李翊善
李翊昌

李明龍
李碩英
全碩達
郭鐫
朴震煥
乙巳正月初一日
幼學 金克建

己酉九月初八日
幼學 李世彦

庚戌正月初四日
幼學 全現
李震龍
正郞 都汝垣
崔台望
金慶連 改名世郁
李翊隆 改名翊亨
李翊亮
李基標 改名基輝
崔岱望
崔{山+晋}望

甲寅正月初一日
李紉菃
幼學 全克思
金震鳴
朴尙周
縣監 朴望之
幼學 李潤英

乙卯正月初一日
幼學 裵緯
全珏
劉鳳齡
部將 朴文弼
幼學 朴尙彬
金慶選 改名世章
金稊 改名稠
朴震烱
李翊泰
李翊聖
崔魯望
李東相
生員 吳壽奎
金斗烱
朴彦冑
金斗熀
金稑
李基安
崔碩望

丁巳正月初二日
金繼達
崔嵩望
幼學 李基祥
郭邐
金慶遂 改名世鉉
李翊藩
崔載華
吳壽大 改名壽翼

壬戌正月三十日
裵紞
金漢斗
李華
鄭楷
朴繼冑
郭遈
郭逌
朴尙文
鄭榏
李基挺
李基茂
朴時冑
李基休
鄭櫶 改名桂
李翊載
鄭榰
李基彬
李翊哲
朴世尹
朴世元
李翊中
金穉
金稶

甲戌正月初三日
李翊賢
金世勣
幼學 金稷
鄭載彬
鄭重燮
朴世尙
李基錫
崔載天
李翊元
郭遠
崔載璿
進士 李基泰
幼學 李鍾岳
朴震煋
鄭景均
裵舜華
朴震焃
金萬兼
生員 吳聖賚

甲戌閏五月十八日
進士 鄭弘鉉
朴萬祉
朴文興
朴善冑
李貞吉
金世寶
金世晶
朴震熀
金世豪
崔崑望
崔崙望
崔載厚
李東樑
朴震望 改名震弼
參奉 金是洛
幼學 朴明冑
金世珪
金是洙
朴萬祺
崔載夏
持平 金是涑
幼學 崔載琇
金宗碩
吳壽應
全倫
李萬英
郭冑命
朴世貞
李天甲

癸未二月初九日
幼學 李封岳
朴尙煥
朴震燁
李天樞
李基輔
朴泰冑
崔嶙望
李東榏
崔載元
崔載大
李東櫶
金世聲
李東禎
金晶漢
朴世說
崔載一
朴泰老
李萬封
崔載平
崔翼齊
朴泰胤 改名瀞
崔載珽
郭萬績
朴泰相 改名泓
李世輝
崔璧齊

戊子正月初四日
鄭瀂
金漢明
朴震煇
鄭楗
朴萬禎
金世泰
金聖中
朴萬彙
金是河
朴萬裕
朴漢基
金是淵
李東林
李東楗
李東桓
金䆋
李基珎
李基崇
李基蕡
朴履基
李基厦
吳聖在
金嵇
李基蕃
李天元
朴徽重
吳聖伯
金世鳴
郭萬容
金世應
金世翼
李基萬
李天翰
李天祐
朴德一
朴文一
郭萬雄
鄭邦杰
朴泰明 改名濬
李天植
朴泰彙 改名洙

丁巳四月十三日
幼學 朴來鳳
金邦鉉
朴經基
朴徽聖
朴天重
李基華
李基樞
朴重元
崔擎昊
金溥鳴
李基筵
全命祐
李基東
李基蓂
金尙九
朴重亨
李天齊
金萬鼎
李垕聖
郭萬泰
金世玉
李天鍵
李克馦
朴章一
李天亨
金遠鳴
吳聖錫
朴澫
李龍聖

丁巳六月十六日
幼學 朴世老
崔光道
金宗禮
鄭天燮
李齊聖
金孝一
全得基
李昌夏
金宗孝
崔擎箕
丁巳閏九月二十四日
幼學 金宗聖
進士 崔光普
幼學 鄭仁杰
朴重賢
鄭昌燮
金宗一
金宗裕
鄭邦烈
朴林大

戊午正月初三日
幼學 李聖迪
李德夏
金泰基
鄭瑞元
朴龍祥
李聖臣
朴震甲
韓景斗
裵晋度
李聖游
李碩夏
安泰遠
全爾紀
全德垕
戊午二月初三日
幼學 韓景休
全爾翰
朴震泰
全遇貞
裵命度
全俠
崔好仁
鄭林華
鄭惟杰
裵倚度
鄭維坤
金宗寶
全胤垕
李春馦

己未正月二十八日
幼學 郭在全
李基業
李基樹
李基芊
李聖宗
生員 權垕
幼學 李基善
金萬彩
金世玾
金世鏞
金宗老
朴守一
郭萬全
吳聖封
李恒
李基玄
朴涵
金世大
朴致完 改名致鵷
朴恬
郭萬權
崔擎宇
郭珽
吳伯垕
朴致一
李興顯

己未五月初六日
幼學 全啓基
崔致雲
崔擎垕
崔漢雲
全爾規
金儀國
朴震一
崔載鼎
朴震彩
崔海雲

戊寅正月二十五日
幼學 朴萬祿
金萬城
金世鎰
郭垕朝
李基唐
鄭邦烈
朴沆
李基隆
朴沁
李天奎
金宗耈
朴震一
李基悳
郭珹
朴{忄+省}
郭孝昇
金萬斗
李天極
李天柱
李悟
崔擎啇
李大顯
朴胤曾
金濡
朴在坤
朴師文
權應三
李天光
金壽泰
郭萬杰
李天保
鄭海壽
金世鍊
朴尙坤
李哉
李尙義
金壽齊
金必剛
李忔
金壽箕
郭孝大
朴希曾
朴思容
崔擎七
朴致權
朴譚
朴師曾
李性
郭天佑
李尙德
金萬澤

戊子五月初三日
幼學 李海鎭
鄭再泰
朴林興
朴聖曾
李聃聖
崔擎參
李圻
鄭臣僑
全世光
鄭崘壽

戊子七月十六日
幼學 全纘垕
鄭錫祉
全東垕
全性一
裵應龍
金德奎
全世弼
韓邦胤

己丑十二月十五日
幼學 崔載億
鄭後僑
李埴
李東一
朴林成
李堣
鄭天壽
全命裕
朴再蕃
李後馦
全命禎
金琰
金溶
鄭錫履
金球
鄭維國
全性純
鄭翰周
崔崙岳
鄭錫福
崔東岳
李宗祿
全世璜
全命成
鄭錫禧

合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