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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장의안(掌議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892.4773-20150630.Y1532506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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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892
형태사항 크기: 36 X 28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임진년 6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장의안』이다. 등재된 인물들이 5년 전에 작성된 『장의안』과 일부분 중복되어 있으며 인물들의 일면을 통해서 1892년에 작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비안향교 교임인 장의 81명의 인명을 기록하고 있다. 체직기간을 별도로 기입하고 있지 않고, 개인별로 개명, 재임, 증경 등 약간 명의 신상에 관한 사항만을 기록하고 있다. 등재된 인물의 성씨를 살펴보면 김씨가 31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박, 장, 우씨 순으로 등재되고 있다. 당시 비안향교 운영의 실질적 책임자인 교임의 구성을 비롯하여 교임 주도세력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유기선

상세정보

1892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장의안(掌議案)으로 81명의 장의직 역임한 이들의 인명이 등재되어 있음
내용 및 특징
이 자료는 壬辰年 6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掌議安』으로 당시 비안향교의 교임인 掌議 81명을 기록하고 있다. 체직기간을 별도로 기입하고 있지 않고, 개인별로 改名, 再任, 曾經 등 약간 명의 신상에 관한 사항만을 기록하고 있다. 등재된 인물의 성씨를 살펴보면 金氏가 31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李, 朴, 張, 禹氏 순으로 임원직을 역임하고 있다. 등재된 인물들이 5년 전에 작성된 장의안과 일부분 중복되어 있으며 인물들의 일면을 통해서 임진년1892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인 입록현황을 살펴보면 金氏가 31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李氏 13명, 朴氏 9명, 張氏 6명, 禹氏 4명, 權氏 3명, 卞·鄭·康·黃氏 각 2명, 孫·申·洪·趙·丁·安·裴·宋氏 각 1명 순으로 등재되어 있다. 앞선 시기의 장의안은 총 4건이 남아 있는데, 19세기 중반에 작성된 1866년, 1872년 장의안과 본 문서 작성 5년 전인 1887년의 장의안 등과 비교해 보면 비안향교의 전통적 주도 성씨인 金, 張, 卞, 李, 朴, 禹씨 중 김씨와 변씨의 뚜렷한 변화가 보이고 있다. 등재된 인명의 절대 수가 18세기 중반의 장의안보다 급감하고 1887년의 그것보다는 약간 증가하고 있지만, 그 중 변씨 세력 인원의 급감이 부각된다. 반면 김씨의 수는 인원수가 훨씬 많이 증가하고 있어 단연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고 하겠다. 또한 이전 장의안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조, 송씨가 새롭게 1명씩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 성씨는 掌議職 참여 빈도로 보아 이 지역에서의 族的 기반이 그리 견고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는 사회, 신분제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중앙 관직에서 멀어진 재지사족들의 향족화현상과 농업에 있어서의 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편승하여 일정한 富를 축적한 계층의 형성으로 설명된다. 특히 경제적 부를 축적한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鄕案, 校案 등에 入錄함으로써 새로운 양반 신분으로 부상하였으며 나아가서는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鄕任으로 진출함으로써 기존의 士族과 더불어 향권을 다투는 모습도 보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는 이 시기 강화된 수령권의 비호가 컸다. 이러한 사정은 지역에 따라 시기적인 편차가 있을 뿐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기존의 양반을 舊鄕이라고 하는데 비해 이들 신흥세력을 鄕品 또는 新鄕이라 하며, 이 양자간의 대립이 향촌의 주도권을 두고 구체적으로 전개될 때 이를 총괄하며 鄕戰이라 한다. 영남지방은 전통적으로 사족의 기반이 강해서 이러한 변화가 여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지만 한편으로 仁祖反正 이후 甲戌換局, 戊申亂을 거쳐 노론 전제정치가 성립되면서 관료로의 진출이 차단되자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보수적으로 대처하였다. 영남지방은 일찍부터 양반권위의 상징이었던 향안, 院案, 교안의 입록에 있어서 中人, 庶孼을 배제시켜 그 배타적, 보수적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었지만 신향의 도전이라는 일반적인 추세는 막지 못하였다.
掌議는 도유사, 유사 등과 함께 향교 운영에 실질적인 임무를 담당하는 교임이다. 도유사가 鄕中凡事를 총괄하며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는 책임자라고 한다면 장의는 실질적인 관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장의는 유림 중에서 地閥이나 덕행이 있는 자로 각별히 선출되며, 이들은 향교의 경제적 문제를 포함한 향교의 전반적인 일을 담당하였다. 향교 교임은 기본적으로 향교에서 靑衿儒生, 額內儒生 중에서 선출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비안을 비롯한 영남지역에서도 향교교임은 향교유생으로 등재된 그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士族들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모든 군현마다 사정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고 특히 사족이 적은 지역에서는 土族이 校任을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찍부터 문벌사족이 강한 영남의 경우에서도 타지역에 비해 심각한 양상은 아니었지만 시대가 내려오면서 교임의 선출을 둘러싸고 紛競하는 폐단이 많아졌다. 비록 본 문서와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사료 중 이러한 폐단을 지적하는 직접 자료는 많지 않지만, 盜錄·賣任으로 인한 삭적 등에 관한 사항이 19세기 자료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비안지역에서도 교임을 둘러싼 분쟁이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겠지만 영남지방 향교에 일반적인 현상처럼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의를 비롯한 교임들의 임기는 대개 1년이었는데, 본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서는 그 기간이 훨씬 짧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문서는 장의들의 인명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여타의 비안향교 장의 관련 문서와 기록 기록방식으로 인해 실질적인 임기를 직접적으로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장의안에 再任, 重任의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어 장의를 자주 번갈아가며 혹은 교체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본 문서를 포함한 19세 중반 이후에 작성된 비안향교 장의안은 모두 3건인데, 3건에서 모두 소수의 인원이지만 새로운 성씨가 등재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비안향교의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姓氏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모습을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양상은 비안향교의 春秋享祀시 임원에 대한 연대미상의 자료를 통해서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자료에 나타나 있는 12년간의 내역을 보면 비안향교도 여타 향교와 유사한 職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러 직임을 이미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별도로 ‘掌議’를 기록하고 있다. 보통 장의도 향사의 직임을 맡게 되어 향사의 직임으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장의라는 명칭으로서 향사 관련 직임으로 기록한 것은 장의가 일종의 명예직의 형식으로 비안향교에 참여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자료적 가치
掌議는 都有司, 有司 등과 함께 향교 운영을 담당하는 校任으로, 도유사가 鄕中凡事를 총괄하며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는 책임자라고 한다면, 향중의 대소사를 운영해 나가는 실질적인 관리자는 장의였다. 본 문서는 이러한 장의직을 역임한 이들의 인명을 기록한 것으로 비안향교 운영의 주도세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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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六月日
掌議案
掌議案
禹龍澤
李泰坤
金鎭萬
金基稷
禹進翰
金龍凞
朴孝大
金相漸
洪祐胤
金堡鎭
張基台
朴文八
趙秉烈
金潤成
鄭基弘
金炳相
金宗永
張璣變
李萬裕
金在和
朴鸞九
金基魯
孫性仁
李元昊
張軫煥 改洛基
李鍾鳳
李炳赫
朴周鳳
金斗明
禹秉謨
張基一
丁大守
金基洙
李鎭源
張仁燮
金鍾雲
申榮顯
李周業
金另起
朴永東
禹熙容
卞文錫 改周變
金商和
金汝極
張一壽
權衡潤
金孝永
金載煥
金應濟
卞容默
金汝雨
金東植
金舜熙
李鍾履
金炳養
李鍾祐
權秉弼
金溶奎
金炳養 再任
朴潤春
朴甲泰
金炳洪
李鍾洛
金龍鎭
金載煥 曾經
金範吉
李萬基
黃煥章
安孝三
金相聲
金鍾一
黃熙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