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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889.4725-20150630.Y1532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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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함창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작성시기 1889
형태사항 크기: 26 X 25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40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함창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함창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안내정보

1889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1889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도 咸昌縣 향안이다. 함창향교에 소장된 본 향안은 274명의 향원을 수록하고 있고 내지에는 咸昌鄕案加錄 제목으로 좌목은 성명과 관직 또는 관품만을 기재해 두고 있다. 조선후기 재지사족들은 향안에 입록함으로써 향론을 주도해 나갔기 때문에 입록자의 현황을 통해 당시 지역 여론을 주도했던 세력을 파악 할 수 있다. 본 향안에는 17개 성씨가 확인되며 채씨 63명, 이씨 45명, 申氏 35명, 남씨 26명, 홍씨 25명, 柳氏 24명, 권씨 11명, 강씨 10명, 鄭氏 9명, 박씨 8명, 곽씨 7명, 김씨 4명, 성·趙氏 각2명, 문·안·장씨 각1명 순이다. 아울러 인천채씨를 비롯한 6개 성씨들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미루어 조선후기 함창의 향안은 이들 성씨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입록자 중 관직과 관품 보유자는 없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韓國의 鄕校硏究 』, 강대민, 경성대학교출판부, 1992
『尙州誌』, 상주시, 1989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77년에 작성된 경상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1889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도 咸昌縣 鄕案으로 함창향교에 소장되어 온 자료이다. 함창향교에는 모두 7종의 향안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향안들은 다소 중복되거나 연대가 비슷한 것이 있으나 舊案·加錄·座目·繼錄 등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본 자료의 명칭은 咸昌鄕案加錄이며 겉표지는 글씨가 멸실되어 확인할 수 없다.
조선후기 임진왜란을 거치면 소실 된 향안들은 17세기에 집중적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는데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추진되는 추세였다. 본 향안은 현전하는 자료 중 1611년 복구 된 이후 1691년, 1748년, 1769년, 1773년, 1877년에 이어 7번째 작성되는 마지막 향안이다. 본 향안의 좌목은 본관, 字號, 생년간지 등에 관한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성명과 관직 또는 관품만을 기재해 두고 있다. 향안 입록자 274명을 성씨별로 구분하면 채씨 63명, 이씨 45명, 申氏 35명, 남씨 26명, 홍씨 25명, 柳氏 24명, 권씨 11명, 강씨 10명, 鄭氏 9명, 박씨 8명, 곽씨 7명, 김씨 4명, 성·趙氏 각2명, 문·안·장씨 각1명 순으로 총 17개 성씨가 나타난다. 인천채씨 63명으로 가장 많고 그 뒤를 이어 이씨, 申氏, 남씨, 홍씨, 柳氏 6개가 218명으로 전체 80%를 차지하고 있어 이들 성씨가 조선후기 함창의 향안을 장악했던 대체적인 성씨들로 볼 수 있다. 이들 중 관직과 관품 보유자는 없다. 이는 이미 인조반정 이후 노론 전제정권에 따른 재지사족들의 중앙 관료 진출이 어려워지는 추세와 내적으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운영되던 향안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현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또한 향안이 더 이상 양반의 상징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향안 말미에는 ‘己丑三月일’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鄕任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자료적 가치
본 향안은 조선후기 함창지역 사족들의 인적구성과 성씨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작성된 향안은 18세기 들어서면 입록자 수가 격증하고 파치 되는 시기에 접어들고 이후 19세기는 향안의 권위가 더 약화·퇴색되기 때문에 향안 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향안이 존재하는 것은 관 내지 향청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입록 기준 완화와 입록자 격증 상황이 반영되었음에도 절대 다수의 입록자들은 여전히 주요 몇 개 가문에서 배출되는 현상을 보이며, 특히 김씨 성씨가 대거 등장하는 점이 본 향안의 특징이다. 입록 기준 완화와 입록자 격증 상황이 반영되었음에도 절대 다수의 입록자들은 여전히 주요 몇 6개 가문에서 배출되는 현상을 보인다. 반면 관직 내지 관품자가 전혀 없는 점은 함창지역 사족들이 仕路 진출이 완전히 막혀 있거나 향안이 더 이상 양반의 상징이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 김인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尙州誌』, 상주시, 1989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咸昌鄕案加錄
姜必憲
權朝彦
洪彙吉
洪泰吉
洪師吉
洪濬吉

洪獻吉
洪鶴吉
洪胤祖
洪胤東
洪胤寧
洪弼夏
洪以績

洪宗海
洪汝績
洪纘績
洪景績
洪龍績
洪萬績
洪冑顯

洪冑大
洪冑聖
洪宗宇
姜宅權
鄭八復
鄭八起
李東春

李東著
李東晋
李東五
朴溥吉
朴尙懋
鄭繼熙
張弼漢

李再燦
柳以燦
柳以燮
柳宜和
柳宜濂
柳淙
柳極彩

柳穆彩
柳濩
柳濤
柳克培
李德運
李德遠
李德建

權{木+卨}
權聖錘
金徹
金以基
金殷相
權說
權誡

權詗
蔡瑞國
蔡理
蔡蓍文
蔡珣
蔡蓍元
李齊泰

李齊鳳
李齊心
李齊參
李齊翼
李齊范
李齊穆
李齊弼

李齊和
李齊璧
李器玉
李完玉
李邦玉
李挺玉
李元玉

李顯玉
李相玉
李明玉
李齊喆
李齊漢
李仁玉
李如玉

李衡玉
李身玉
李承孝
南鼎興
南必奎
南必箕
南必斗

南必璧
南漢儒
南漢老
南漢柱
南鼎肇
南必曇
南必晃

南宗英
南宗烈
南必燁
南必獜
南必錫
南漢朝
南宅夏【癸巳增文科】

南宅亮
南遠運
南周運
南必宗
南必駿
南鼎燁
南必周

南必敎
申{金+奏}
姜世忠
姜世孝
姜世文
姜世濟
姜必遜

姜必晋
姜穆欽
申思九
安國輔
李世陽
李致陽
李起陽

朴尙溫
洪翰東
鄭漢紀
柳得培
柳亨源
柳以爀
柳以烜

柳以默
文必成
朴良吉
朴遇吉
柳一源
洪聖龍
洪學再

柳幹
柳橚
柳楫
柳梡
柳樑
柳{木+奭}
柳和源

柳栐
蔡琦
李{氵+寔}
李處埏
李處坤
李處垠
李處埻

姜洽
李海朝
趙榮宗
申業
申果
申光宅
申尙夔

申尙履
申尙說
申尙穆
申尙集
申尙宲
申尙羲
申紹陽

申栠
申{亻+政}
申俊
申榘
申棐
申鳳陽
申德陽

申赫然
申復陽
申儻
申確然
申德增
申光兌
申光麗

申光業
申檝
趙宗林
申宅明
朴遇春
朴再春
朴重吉

蔡德明
蔡德中
蔡希聖
鄭泰元
鄭東杓
鄭泰春
鄭東楫

鄭東權
申宅和
申宅揆
申宅夏
蔡景極
蔡景寶
蔡景獻

蔡景九
蔡景曾
蔡膺河
蔡膺漢
蔡克大
蔡禹大
蔡必大

成宙烈
成宅烈
蔡景靖
蔡瑍
蔡德龍
蔡德基
蔡信轍

蔡景游
蔡東轍
蔡獻轍
蔡景溫
蔡蓍轍
蔡羲轍
蔡文轍

蔡景涑
蔡亨大
蔡成大
蔡蓍漢
金熙啓
蔡衡國
蔡德元

蔡光國
蔡翰國
蔡憲國
蔡德必
權榥
權檏
權宗燮

洪彙績
郭文鳳
郭文郁
郭文憲
郭文命
郭文五
郭文九

郭萬冑
蔡德淵
蔡信國
申華岳
蔡{沂+玉}
蔡{汎+玉}
蔡德濬

權璞
申復泰
蔡{瀐+玉}
蔡德濟
蔡德洙
李潗
李仁宅

李濟
蔡瑎
蔡德濡
蔡蓍老
蔡蓍朝
蔡蓍祥
蔡淳

蔡沃
蔡昇龍
蔡寅龍
蔡{氵+奭}
蔡濯
蔡習
蔡蓍昌

蔡蓍德
權聖沐

己丑三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