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장의안(掌議案)으로 60명의 인명이 등재되어 있음
자료의 내용
丁亥年에 작성된 비안향교 〈掌議安〉으로 비안향교 교임인 장의 60명의 인명을 기록하고 있다. 체직기간을 별도로 기입하고 있지 않고, 개인별로 改名, 再任, 入格 등의 약간의 신상에 관한 사항만을 기록하고 있다. 등재된 인물의 성씨를 살펴보면 金氏가 24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비안향교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성씨인 朴, 張, 李씨 순으로 등재인원을 올리고 있으며, 앞선 시기에 작성된 장의안에 비해 卞氏의 대폭적인 감소와 등록 성씨 및 장의의 전체 수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인물들의 일면을 통해서 정해년은 1887년임을 알 수 있다.
본 문서에 등재된 인물들의 성씨를 살펴보면 金氏가 24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朴 10명, 張 8명, 李 7명, 禹 4명, 卞·孫·權·康·安·裴·徐 각 1명 순이다. 앞선 시기의 장의안은 총 3건이 남아 있는데, 18세기 중반에 작성된 장의안과는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서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19세기 중반에 작성된 1866년, 1872년 장의안과 비교해 보면 비안향교의 전통적 주도 성씨인 金, 張, 卞, 李, 朴씨 중 김씨와 변씨의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 등재된 인명의 절대 수가 앞선 시기의 장의안보다 급감하고 있지만, 그 중 변씨의 급감이 두각된다고 하겠다. 반면 김씨의 수는 인원수가 변동이 없어 상대적으로 김씨의 영향력이 더욱 증가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고 하겠다. 또한 이전 장의안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배, 서씨가 1명씩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 성씨는 掌議職 참여 빈도로 보아 이 지역에서의 族的 기반이 그리 견고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의를 비롯한 교임들의 임기는 대개 1년이었는데, 본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서는 그 기간이 훨씬 짧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문서는 장의들의 인명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여타의 비안향교 장의 관련 문서와 기록 기록방식으로 인해 실질적인 임기를 직접적으로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장의안에 再任, 重任의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어 장의를 자주 번갈아가며 혹은 교체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본 문서를 포함한 19세 중반에 작성된 비안향교 장의안은 모두 3건인데, 3건에서 모두 소수의 인원이지만 새로운 성씨가 등재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비안향교의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姓氏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모습을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양상은 비안향교의 春秋享祀시 임원에 대한 연대미상의 자료를 통해서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자료에 나타나 있는 12년간의 내역을 보면 비안향교도 여타 향교와 유사한 職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러 직임을 이미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별도로 ‘掌議’를 기록하고 있다. 보통 장의도 향사의 직임을 맡게 되어 향사의 직임으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장의라는 명칭으로서 향사 관련 직임으로 기록한 것은 장의가 일종의 명예직의 형식으로 비안향교에 참여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掌議는 도유사, 유사 등과 함께 향교 운영에 실질적인 임무를 담당하는 주요 도유사가 鄕中凡事를 총괄하며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는 실질적인 책임자라고 한다면 향중의 대소사를 운영해 나가는 실질적인 관리자는 장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장의는 유림 중에서 地閥이나 덕행이 있는 자로 각별히 선출되며, 이들은 향교의 경제적 문제를 포함한 향교의 전반적인 일을 담당하였다. 향교 교임은 기본적으로 향교에서 靑衿儒生, 額內儒生 중에서 선출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비안을 비롯한 영남지역에서도 향교교임은 향교유생으로 등재된 그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士族들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모든 군현마다 사정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고 특히 사족이 적은 지역에서는 土族이 校任을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통적으로 문벌사족이 강한 영남의 경우에서도 타지역에 비해 심각한 양상은 아니었지만 시대가 내려오면서 교임의 선출을 둘러싸고 紛競하는 폐단이 많아졌다. 비록 본 문서와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사료 중 이러한 폐단을 지적하는 직접 자료는 많지 않지만, 盜錄·賣任으로 인한 삭적 등에 관한 사항이 19세기 자료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비안지역에서도 교임을 둘러싼 분쟁이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겠지만 영남지방 향교에 일반적인 현상처럼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掌議는 都有司, 有司 등과 함께 향교 운영에 실질적인 임무를 담당하는 주요 校任으로 도유사가 鄕中凡事를 총괄하며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는 실질적인 책임자라고 한다면 향중의 대소사를 운영해 나가는 실질적인 관리자는 장의였다. 본 문서는 이러한 장의직을 역임한 이들의 인명을 기록한 것으로 비안향교의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본 문서에 등재된 장의들의 성씨는 총 12개의 성씨로 향촌유력 성씨 張, 卞, 金, 李, 朴, 禹氏 등 중 김씨 세력이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등재자 수로 나타나고 있고 변씨의 대폭적인 감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19세기 후반 비안향교 교임 중 실질적 관리자라 할 수 있는 장의가 재편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