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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877.4725-20150630.Y1532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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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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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함창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작성시기 1877
형태사항 크기: 29 X 24.5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47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함창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함창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안내정보

1877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1877년에 작성된 경상도 咸昌縣 鄕案이다. 함창향교에 소장된 본 향안은 305명의 향원을 수록하고 있고 내지에는 咸昌鄕案繼錄 제목으로 좌목은 성명과 관직 또는 관품만을 기재해 두고 있다. 조선후기 재지사족들은 향안에 입록함으로써 향론을 주도해 나갔기 때문에 입록자의 현황을 통해 당시 지역 여론을 주도했던 세력을 파악 할 수 있다. 본 향안에는 15개 성씨가 확인되며 김씨 49명, 이씨 44명, 홍씨 35명, 류씨 31명, 申·남씨 각27명, 채씨 26명, 박씨 16명, 印氏 15명, 곽씨 9명, 강씨 7명, 서·정씨 각6명, 권씨 5명, 윤씨 2명 순이다. 특히 이전 김씨 성씨의 대거 등장과 인씨의 숫자도 증가한 점이 특징이다. 아울러 김씨를 비롯한 7개 성씨들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미루어 19세기 후반 함창의 향안은 이들 성씨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입록자 중 職役을 가진 자는 進士 2명 뿐이며 관직과 관품의 종류는 5개로 확인된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韓國의 鄕校硏究 』, 강대민, 경성대학교출판부, 1992
『尙州誌』, 상주시, 1989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77년에 작성된 경상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1877년에 작성된 경상도 咸昌縣 鄕案으로 함창향교에 소장되어 온 자료이다. 함창향교에는 모두 7종의 향안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향안들은 다소 중복되거나 연대가 비슷한 것이 있으나 舊案·加錄·座目·繼錄 등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본 자료의 명칭은 咸昌鄕案繼錄이며 겉표지는 글씨가 멸실되어 확인할 수 없다.
조선후기 임진왜란을 거치면 소실 된 향안들은 17세기에 집중적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는데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추진되는 추세였다. 본 향안은 현전하는 자료 중 1607년 복구 된 이후 1691년, 1748년, 1769년, 1773년에 이어 6번째 작성되는 향안이다. 본 향안의 좌목은 본관, 字號, 생년간지 등에 관한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성명과 관직 또는 관품만을 기재해 두고 있다. 향안 입록자 304명을 성씨별로 구분하면 김씨 49명, 이씨 44명, 홍씨 35명, 류씨 31명, 남씨 27명, 申씨 26명, 채씨 26명, 박씨 16명, 印氏 15명, 곽씨 9명, 강씨 7명, 서·정씨 각6명, 권씨 5명, 윤씨 2명 순으로 총 15개 성씨가 나타난다. 앞선 향안들보다는 전체 성씨 숫자는 적어지고 김씨의 도약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이씨, 홍씨, 류씨, 신씨, 남씨, 채씨 7개 성씨가 78%를 차지하고 있어 이들 성씨가 19세기 말 함창의 향안을 장악했던 대체적인 성씨들로 볼 수 있다. 이들 중 관품을 보유한자는 進士 2명 뿐이며 그 비율이 극히 낮은 수치다. 이는 이미 인조반정 이후 노론 전제정권에 따른 재지사족들의 중앙 관료 진출이 어려워지는 추세와 내적으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운영되던 향안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현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또한 향안이 더 이상 양반의 상징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향안 말미에는 1877년‘崇情紀元後五丁丑十一月二日’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날짜 아래에는 당시의 校長 1명, 좌수 1명, 都廳 2명, 公事員 3명, 유사 3명도 함께 명기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본 향안은 19세기 후반 함창지역 사족들의 인적구성과 성씨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작성된 향안은 18세기 들어서면 입록자 수가 격증하고 파치 되는 시기에 접어들고 이후 19세기는 향안의 권위가 더 약화·퇴색되기 때문에 향안 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향안이 존재하는 것은 관 내지 향청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입록 기준 완화와 입록자 격증 상황이 반영되었음에도 절대 다수의 입록자들은 여전히 주요 몇 개 가문에서 배출되는 현상을 보이며, 특히 김씨 성씨가 대거 등장하는 점이 본 향안의 특징이다. 반면 관직 내지 관품자의 비율은 극히 낮게 나타나는 점은 함창지역 사족들이 仕路 진출이 완전히 막혀 있거나 향안이 더 이상 양반의 상징이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 김인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尙州誌』, 상주시, 1989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咸昌鄕案 繼錄
洪重標
洪元燮
洪東燮
洪圭燮
洪理燮
洪台燮

洪在燮
洪載鳳
洪致汶
洪致洙
洪鼎燮
洪命喆
洪錫喆

洪龍喆
洪奎喆
洪斗喆
洪擎銓
洪泰銓
洪萬源
洪在銓

洪源海
洪源漢
洪大燮
申景海
申廣熙
申永熙
申栢

申桌
申檏
申台熙
申{木+萬}
申履熙
申幹
申元熙

申度均
申櫓
申?
申杭
申範會
申宅會

申冕熙
申益會
申謙會
申明會
申觀會
柳景培
柳剛培

柳昌秀
柳彦秀
柳震秀
柳成秀
柳醇秀
柳龍秀
柳灌培

柳時培
柳箕培
柳彙錫
柳敬錫
柳河錫
柳海宗
柳海朝

柳海冕
柳海重
柳海達
柳海鎭
柳海輔
柳祖聲
柳至聲

柳承文
南榘正
南標正
南禾正
南彙正
南履栢
南亨烈

南魯沂
南魯宇
南魯益
南魯溥
南魯彙
南魯憲
南魯澈

南魯淑
南致一
南啓道
南啓鍾
南啓沃
南啓夏
南象稷

南桂正
南啓
南啓文
南啓泰
朴達寧
朴德寧
朴喆寧

朴國寧
朴禹冕
朴軒冕
朴璋冕
朴周成
朴周瑞
朴琮冕

朴義和
朴慶休
朴夏相
朴義瀅
朴義相
李完孝
李鳳儀

李起善【進士】
李起燦【進士】
李康元
李康永
李康濟
李康年
李康龍

李康弼
李康億
李康和
李康亨
李康春
李起容
李起文

李起武
李起英
李京宰
李仁儀
洪輔鉉
洪象鉉
洪永萬

李瀷龍
李汶龍
李愼龍
李述龍
李南龜
李舜儀
李九儀

李羽儀【改鴻儀】
李韶儀
李虞儀
李濬儀
李起元
鄭源學
鄭源祜

鄭源天
李起泰
李起恒
李起震
李康周
李象儀
蔡瑞沂

蔡尙穆
蔡尙煥
蔡時華
蔡永震
蔡周翼
蔡周翰
蔡周佑

蔡周奎
蔡周信
蔡斗寅
蔡宇九
蔡時行
蔡洪九
蔡成九

蔡鼎九
蔡亨鑽
蔡基海
蔡遇憲
蔡尙範
蔡光郁
蔡圭章

蔡鳳九
蔡元鑽
蔡時和
權在慶
權惠鎬
權世鎬
權在必

權在耆
李象赫
李以基
李鎭恒
李鎭泰
李時雨
鄭煥時

鄭洛基
郭魯範
郭晦英
郭周英
郭善英
郭魯泰
郭魯喆

郭魯郁
郭漢運
郭炳天
南炳斗
蔡觀休
柳達秀
鄭源學

姜嶷永
姜吉永
姜蓮聲
姜有信
姜台玉
姜錫熙
洪學謨

洪德周
洪烈周
洪箕周
洪儀周
洪祐祿
洪承元
印永祿

印永震
印永孝
印永鏞
印世夏
印世郁
印世喆
印世吉

印載輝
印載度
印世完
印世定
印世度
印世績
印世烈

金紀萬
金紀龍
金紀淵
金錫煥
金鎭奎
金紀燮
金紀倫

金紀海
金紀雲
金紀修
金紀肇
金紀楨
金奎煥
金奎東

金奎漢
金禎仁
金禎必
金錫老
金從龍
金從文
金從恒

金秉洛
金星九
金紀東
金紀震
金聲振
金秉文
金東赫

金東勳
金東基
金理性
金振性
金極性
金秉性
金龍性

金鳳性
金仁性
金泰性
金有性
金東郁
金奎容
金奎五

金奎七
金永性
金善性
金炳九
金炳壽
金炳坤
李景濟

李仁壽
南鎬正
申景興
申錫信
申永熙
申普均
尹稑

尹任五
徐炳周
徐炳文
徐漢相
徐錫祜
徐華重
柳鉉玉

柳鉉一
柳仁秀
柳海民
柳海年
柳海彦
洪殷喆
洪周喆

洪宗洙
朴根寧
南德正
金榮球
徐漢基
崇情紀元後五丁丑十一月二日

校長幼學申榥
座首申楗
都廳洪龍標
李禹鉉
公事員朴時寧
南魯海
柳光秀

有司蔡世龍
申大均
印世權